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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갑 Sep 14. 2024

주취 살인 - 3

연재소설 <블랙홀>

안방은 출입한 흔적 없이 정돈된 상태였으나, 작은방은 벽과 천정이 비산 혈흔으로 도배되어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방문 앞에 쓰러져 있는 50대 여성은 외출복 차림이었고 침대 위의 20대 남성은 츄리닝 바람이었다. 여성은 목 앞부분이 날카로운 흉기로 절개되어 있었고 남성은 자다가 변을 당한 듯 반듯이 누운 자세로 왼쪽 가슴에서부터 흘러나온 피로 침대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지구대에서 경찰서로 옮겨온 신예지는 조사실 의자에 앉아 훌쩍거리며 여전히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오후부터 추적추적 내린 가을비 탓일까. 밤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져 초겨울 날씨를 방불했다. 신예지는 이제 갓 떡잎을 밀고 나온 듯 무척 앳돼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눈물에 지워져 흘러내리는 마스카라를 수습할 경황은 없어 보였다.  


“저보다 열 살 많은 남자였어요. 처음 취직한 회사의 주임이었죠.”


신예지의 얼굴에 공포감이 어리는가 싶더니 심하게 몸을 떨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지 몰라요. 흑.”


딱딱, 이빨을 부딪으며 간신히 말을 잇던 신예지가 다시 눈물을 쏟았다. 형사2팀장 김석규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었다. 그녀는 손수건을 눈자위에 가져가더니 탁자에 엎드려 한동안 어깨를 들썩였다.


맞은편에 앉아 질문을 던지던 오경문 형사는 계속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는 시곗바늘이 자정을 지나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신예지의 어깨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것을 본 김석규가 재빨리 오경문의 팔을 툭 치며 제지했다. 조사실 안을 모니터하는 형사 둘은 저녁에 마신 술 때문인지 시간이 너무 늦어서인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지구대에서 처음 마주친 신예지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맨발로 아스팔트 길을 얼마나 달렸는지 찢어진 스타킹과 발가락에는 시뻘건 피가 맺혀있었다. 그녀는 장의자에 주저앉아 꺽꺽, 딸꾹질 섞인 울음소리만 낼 뿐 말문을 열지 못했다. 마치 엄청난 충격으로 말하는 걸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그게 세 시간 전이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많이 진정된 상태였다.


“업무를 하나하나 자상하게 가르쳐주는 게 좋았어요. 하나뿐인 오빠와는 정반대 타입이라 호감이 생기더군요.”


고개를 든 신예지가 손수건을 꼭 쥔 채 말했다. 그녀의 아래턱과 입술이 불규칙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신예지는 변동원 주임의 곱상한 외모와 자상함에 이끌려 가끔 차와 식사를 함께 했다. 그러다가 깊은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녀는 난생처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준 변동원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물오른 나무가 되었다.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나날이었다.


변동원은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자신이 쳐둔 사랑이라는 그물에 신예지라는 물고기가 제대로 걸려든 것이었다. 잡아둔 물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 했던가. 자신의 사랑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신예지를 보며 변동원은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변동원은 여성 편력이 있는 데다 집착이 강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걷어차지 않는 이상 여성이 먼저 떠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떠나보내지 않았다. 여성에게 싫증을 느껴야 변동원은 호의를 베풀 듯 떠날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여성은 감지덕지하며 서둘러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변동원은 곱상한 외모와 달리 폭력적인 성향이 다분했다. 특히 술을 마시게 되면 폭력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하루는 상춘객들이 즐겨 찾는 사찰에 들렀다가 민속주점에서 토속음식과 곁들여 동동주를 마시게 되었다. 취기가 오르자 변동원의 손이 무람없이 신예지의 치마 속을 더듬었다. 한껏 욕정이 오른 변동원은 서둘러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로 가자더니 카섹스를 요구했다. 그녀는 불교를 믿진 않지만, 사찰 앞에서 그런다는 게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신예지가 완곡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이미 욕정의 포로가 된 변동원의 완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신예지는 무릎에 잔뜩 힘을 주고 버티다가 변동원에게 주먹으로 몇 차례 얼굴을 얻어맞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신예지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변동원이 욕정을 풀고 난 후였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변동원이 두 손 모아 싹싹 빌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했다. 신예지는 거기서 진정 어린 사과와 반성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그게 악어의 눈물임을 알아채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변동원은 폭행 후 반성과 사과를 반복했고, 그리고는 지극정성으로 신예지를 대했다.


물론 이후에도 신예지는 크고 작은 이유로 변동원에게 폭행과 학대, 인격모독을 당했지만 그와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변동원이 반복적으로 흘리는 악어의 눈물은 마음 여린 신예지의 모성애를 자극했고 그녀는 그걸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착각했다.


그러다가 변동원이 새로 입사한 여직원에게 상냥하고 친절한 모습을 보이자 신예지는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예전 자신에게 다가서던 모습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그러자 악어의 눈물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신예지는 직원휴게실로 그를 불러내어 단호하게 이별을 통보했다.


“누구 맘대로 떠나! 내가 허락하기 전엔 절대 못 가!”


변동원은 불같이 화를 내며 폭력을 행사했다. 주먹과 발길질로 무지막지하게 가해지던 폭행은 동료직원들이 뜯어말리고서야 겨우 멈춰졌다. 신예지는 그날 이후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고 신경질적으로 걸려오는 변동원의 전화를 아예 받지 않았다.


“그냥 참고 계속 만나줬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요. 흑흑.”


신예지가 자책 조로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예지 씨 잘못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 말아요. 변동원 그놈이 나쁜 새끼지.”


김석규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신예지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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