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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갑 Sep 07. 2024

주취 살인 - 2

연재소설 <블랙홀>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문 앞에 선 순간 신예지는 머리끝이 쭈뼛 서고 팔뚝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고 느껴질 만큼 집안이 무척 조용했다. 얼핏 이질적이고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듯도 했다.


신예지가 신발을 벗고 거실에 들어섰다. 탁자 위에 놓인 양주병과 함께 담배꽁초로 수북한 재떨이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젊은 남자 하나가 소파에 기대어 고개를 천정으로 올린 채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바로 한 달 넘게 전화를 해오고 있는 변동원이었다.


하지만 신예지는 눈앞에 천연덕스럽게 널브러진 변동원을 보고도 그렇게 놀랍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듯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다만 무언가에 세게 얻어맞은 듯 고막 깊은 곳에서 쇳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느낌과 아득한 쇳소리는 거실 바닥에 어지럽게 널린 혈흔을 볼 때까지도 계속 이어지다가 선혈이 낭자한 채 쓰러져 있는 작업복 차림의 남성을 보는 순간 뚝 끊어졌다.


꺅!

신예지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날카로운 소리가 거실 안에 울려 퍼지자 변동원이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오른손을 치켜들고 신예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변동원의 손에는 피 묻은 칼이 들려있었다.


하지만 전광석화처럼 달려들던 변동원이 다행스럽게 탁자에 걸려 넘어졌다. 그 바람에 탁자 위의 양주병과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꽁초가 바닥에 쏟아졌다. 신예지는 화들짝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맨발로 집을 뛰쳐나와 무작정 도로를 내달렸다.


변동원은 어이없게도 탁자에 걸려 넘어지면서 시신 위에 털썩 엎어졌다. 신예지를 본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기제 삼아 용수철처럼 몸을 부양시켰지만, 취기에 깜빡 든 잠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등산화를 신은 두 다리가 제대로 워밍업 되지 않아 그만 탁자를 뛰어넘지 못하고 정강이인지 무릎인지 어디쯤 걸려 넘어진 것이었다.


변동원은 정강이인지 무릎인지 어디쯤을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도 잊은 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바닥에 흥건한 선혈을 짚고 일어서다 슬랩스틱 코미디언처럼 미끄러져 강하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변동원은 허둥지둥 바닥에서 간신히 일어나 구석에 떨어진 칼을 챙겨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신예지는 미친 여자처럼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골목길을 뛰어갔다. 도로에 고인 빗물이 그녀가 내딛는 맨발에 첨벙거리며 사방으로 튀었다. 수많은 물방울이 가로등 불빛에 영롱하게 반짝이면서 잘 찍은 한편의 CF를 연상케 했다. 신예지가 죽을힘을 다해 내지르는 비명만 소거해 버린다면, 비 내린 밤거리에서 맨발의 원피스 여인이 변주해 내는 한편의 퍼포먼스라 해도 될만한 장관이었다.


변동원은 태어나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기상천외한 소리를 지르며 순식간에 큰길가로 나가버린 신예지를 더는 쫓아갈 수 없었다. 신예지가 달려가는 속도도 빨랐지만, 행인들의 이목이 하나둘 쏠리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계속 뒤쫓아 가다간 낭패를 당할 것 같아 그는 사건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변동원은 분노의 추격전을 벌이느라 터질 것 같았던 심장을 간신히 추슬렀다. 그는 거실 바닥에 나뒹구는 양주병을 들고 나발을 불었다. 입안에 양주가 콸콸 쏟아져 들어가자 혀뿌리가 얼얼하더니 곧이어 식도를 타고 짜릿한 알코올 기운이 뱃속으로 들어왔다.


이 모든 게 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술만 아니었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도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변동원은 생각했다. 물론 자신이 법 없이도 살 만큼 착한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막 나가는 인생은 아니었다. 끓어오르는 혈기와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해 여성편력을 일삼거나 여성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이런저런 폭력을 행사하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대책 없는 인간은 절대 아니었다.


신예지에 대한 감정도 다르지 않았다. 이 세상 어떤 미친놈이,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여자가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해서 ‘그래, 잘 가’ 한단 말인가.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줄 수 없는 거야 인지상정이고, 그래서 보고 싶은 마음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화를 해대는 것은 사람이라면 응당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예지가 전화를 아예 모른 체하니 변동원은 그간 자신의 소행은 생각지도 않고,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분노를 느낀 것이었다.


어떤 이가 말했다. 헤어지자는 여성을 붙잡아두고 보내주지 않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건 그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잡아놓은 물고기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또한, ‘살을 맞대고 산 세월이 얼만데’ 어쩌고저쩌고하는 건 그 세월에 쌓인 애증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마치 정복자로서 여성 위에 군림하려는 심리일 뿐이다.


이에 대해 변동원은 ‘그건 네 생각일 뿐’이라고 일축하고는, 자신은 결코 여성을 소유물로 취급한 적이 없고 시종일관 하나의 인격체로 대했다고 목에 핏대를 올리며 말했다.


여성을 대하는 생각이 그릇되고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비뚤어졌다 한들 변동원이 여자 때문에 살인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놈의 술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무릇 술은, 슬픔에 젖은 사람은 더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하고, 분노에 젖은 사람은 더욱 강렬한 분노에 떨리게 하며, 심약한 사람에게는 용맹함을 넘어서는 만용을 안겨주고, 평소 생각이 진중한 사람은 한없이 단순하게 만들어주는 희한한 물질이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술을 일컬어 신비의 물이자 묘약이라 했고 심지어 마약이라고까지 했었다.


변동원은 발로 차서 냉장고 문을 열고 소주 두 병을 챙겨 배낭 안에 쑤셔 넣었다. 집을 나서자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변동원은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 주택가 뒷산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묵묵히 걸었다. 제법 먼 산길을 걸어와서 숨은 가빴지만, 헝클어진 머릿속이 정리되고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형사2팀장 김석규에게 긴급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서 상황실이었다. 팀원들을 데리고 불빛에 번들거리는 빗길을 미끄러지듯 걸어 호프집으로 이동할 때였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2차 술집으로 가는 상황에 출동 지시가 떨어진 것이었다. 형사들은 갑작스러운 지시에도 누구 하나 투덜대지 않고 곧장 지구대로 발길을 돌렸다.


신예지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멍한 얼굴로 지구대 장의자에 앉아있었다. 맨발에 찢어진 스타킹, 시뻘건 피가 밴 발가락은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신예지는 엄청난 충격의 여파로 말하는 걸 잃어버린 사람처럼 꺽꺽, 딸꾹질 섞인 울음소리만 낼 뿐이었다. 신예지에게서 진술을 받거나 현장에 동행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형사2팀은 지구대 순찰차를 타고 신예지의 집으로 향했다. 폴리스라인을 친 단독주택 입구에서 의경들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서자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이미 과학수사대 요원들이 들어와 현장 감식에 한창이었다.


거실 중앙에 60대 남성이 많은 피를 쏟고 엎드린 채 죽어있었다. 시신을 슬쩍 들어보니 가슴과 복부에 흉기로 찔린 자상이 얼핏 보아도 대여섯 군데나 확인되었다. 탁자 위엔 재떨이에서 쏟아진 담배꽁초가 흩어져 있고, 먹다 남긴 양주병이 뒹굴고 있었다. 거실 바닥엔 피의자의 것으로 보이는 피 묻은 발자국이 어지럽게 널렸고 탁자와 소파에까지 혈흔이 낭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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