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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갑 Aug 31. 2024

주취 살인 - 1

연재소설 <블랙홀>

변동원은 이른 아침부터 신예지에게 전화를 해댔다. 그녀는 오늘도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변동원은 서서히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려 점심시간에 반주 몇 잔을 곁들였다. 반주는 시나브로 음주로 변주되었다.


창밖으로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술은 비를 만나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변동원은 오후 업무를 전폐하고 내처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 신예지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지 않으면 분노게이지가 한 칸씩 상승해갔다. 그는 자신을 무시하는 신예지에 대한 분노가 임계점에 다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변동원은 회사를 조퇴하고 집으로 갔다. 그는 등산복 차림에 하이킹 배낭을 메고 창이 좁은 검정색 모자를 눌러썼다.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설경구와 흡사했다. 변동원은 날이 잘 선 등산용 칼을 면도하듯 뺨에 몇 번 문지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취중이었지만 거사를 앞둔 변동원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했다. 직접 차를 몰고 가는 건 음주운전 단속에 걸릴 위험이 있으니 피한다. 택시를 타고 가서 대로변에 내려 CCTV를 피해 신예지의 집까지 걸어간다.


변동원은 이미 몇 번이나 신예지의 집을 찾아갔기에 지형지물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거사할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술이 부족해서인지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비와 술과 분노가 잘 배합되어 서로 밀고 당기면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한 마디로 사고 치기 딱 좋은, 머리가 단순해지기 그지없는 날이었다.


비와 함께 어둠이 내리자 골목이 한결 을씨년스러워졌다. 변동원은 골목 끝에서 우산을 쓰고 신예지의 집을 예의주시했다. 그는 틈틈이 주머니에서 소주 팩을 꺼내 마셨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을까. 소주 두 팩을 마시고 났더니 이윽고 신예지의 어머니가 퇴근해 왔다. 그녀는 우산을 쓴 채 대문 열쇠를 찾느라 잠시 머뭇거렸다.


“조용히 문 열어!”


변동원이 재빠르게 다가가 신예지의 어머니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했다. 그녀는 뒤돌아보려고 고개를 돌리다가 목덜미에 닿는 차가운 금속성 물질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집에 누구 있어?”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변동원이 문을 잠그고 물었다.


“아들이 있어요.”


신예지 어머니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백수로 빈둥거리는 아들이 집에 있어서 사실대로 말한 측면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집에 아들이 있다고 하면 남자가 범행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 답한 것이었다.


그러나 변동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며 신예지 어머니의 목에 칼금을 그었다. 그녀는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섬찟하도록 차가운 느낌에 오줌을 지렸다. 제자리에 멈춰선 채 걸음을 떼지 못할 지경이었다.


변동원은 신예지 어머니의 눈앞에 핏빛이 선명한 칼을 들이밀었다. 그녀가 나무토막처럼 무거운 다리를 힘겹게 옮겨 아들의 방문을 열었다. 만취해서 아침나절에 집에 들어온 아들은 침대 위에 드러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평소 애물단지처럼 여겨 상종도 하지 않던 아들이지만 이 순간만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신예지의 어머니는 죽을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아들이 일어나기만 한다면 칼 든 남자에게서 자신을 구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음만 앞설 뿐이었는지 아니면 얼어붙은 혀 때문이었는지 분명 고함을 질렀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목구멍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픽, 하고 났을 뿐이었다.


신예지 어머니는 식도 쪽을 칼에 베여 피를 뿜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변동원의 칼은 정확하게 아들의 심장에 가서 푹 꽂혔다.


“여보, 나 왔어.”


신예지의 아버지는 그로부터 30분쯤 지나 퇴근해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늙은 가장의 지친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변동원은 공장 작업복 차림의 그가 안전화를 벗어 신발장에 넣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늙은 가장은 피곤함에 젖은 기색이었으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국을 마주할 생각에 잠시 따뜻한 눈빛을 보였다. 정말이지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큼 선한 눈빛이었다. 늙은 가장은 낯선 불청객을 보자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벌린 채 미동도 하지 못했다. 변동원은 연습용 샌드백을 찌르듯 무방비 상태의 늙은 가장을 무참하게 난도질했다.      


신예지가 늦은 밤 주택가 도로를 또각또각 걸어가고 있었다. 원피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버스를 탈 때만 해도 비가 추적거렸는데 언제 그쳤는지 버스에서 내릴 즈음엔 우산을 펼 필요가 없었다. 초겨울처럼 쌀쌀한 날씨였지만 찬바람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새로 입사한 회사의 환영 만찬장에서 꽤 술을 마신 탓이었다. 도로 군데군데 빗물이 고여 있었으나 가로등 불빛에 번들거려 발을 헛디딜 염려는 없었다.


변동원의 여성 편력과 폭력에 회사를 그만둔 후 신예지는 부모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하나뿐인 오빠가 부모의 등골을 빼먹으며 대학을 졸업하고도 여전히 빈둥거리면서 속 썩이고 있었다. 신예지는 자신까지 부모에게 걱정을 끼칠 수 없어 아침마다 출근하듯 집을 나섰다.


신예지의 부모는 젊어서부터 한시도 쉬지 못하고 공장일과 허드렛일을 나가는 가련한 처지였다. 신예지는 집을 나서긴 했으나 딱히 갈만한 데가 없어 매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변동원의 전화는 하루에도 수십 번 걸려왔지만 신예지는 아예 수신 거부로 설정해두었다.


도서관에서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책을 넘기며 시간을 보낼 때 신예지는 신문의 구인구직란을 꼼꼼히 넘겨보았다. 그리고 전화로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고 면접기회가 오자 자신의 성실함을 피력한 덕분에 신예지는 새로운 직장을 얻게 되었다. 강철을 가공해서 베어링을 만드는 개인 회사의 경리직이었다.


신예지는 새 직장에서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사람들과 새롭게 시작하고픈 마음에 환영 만찬장에서 주는 술을 마다치 않고 넙죽넙죽 받아마셨다. 부서장과 직원들이 신예지더러 화끈한 신입이라며 추어주었다.


적당히 술에 취해 걷다 보니 가로등 불빛이 드리운 밤길도 꽤 운치가 있어 보였다. 신예지는 주택가 도로에서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불현듯 외진 곳에서 검은 물체가 튀어 올라 반대편 골목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배가 고파 쓰레기통을 뒤적이던 도둑고양이가 인기척에 놀라 후다닥 달아난 모양이었다.


도둑고양이보다 더 놀란 신예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술기운이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집에 도착한 신예지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손에 쥐고 있던 우산으로 대문을 밀어보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철제대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평소 문단속이 철저한 어머니의 행동으로 봐서는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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