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잠에 가게 하소서..

1931년생 이순연의 기도..

by 칠오이

우리 외갓집은 흔히들 말하는 장수집안이다.

외할아버지도 망백의 나이에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는 서류상 93세이지만

실제 나이는 95세이시며, 현재는 요양병원 집중치료실에서 호흡기에 의존해 계신다.

어릴 적부터 막내이모를 너무 좋아했던 나는 방학이면 곧잘 막내이모가 사는 대구 외할머니댁에 갔다.


머리도 부딪히지 않게 숙여야 했지만 발도 걸리지 않게 살펴보며 들어가야 했던 초록색 철문을 넘어서면

작은 마당이 있던 ㄷ자 구조의 외할머니집.

옆집 기와밑에 조그마하게 있던 옥상과 거기에 툭툭 떨어져 터져 있던 감홍시,

된장에 찌든 주방 냄새를 맡으면 비로소 할머니집에 왔다 싶었다.

엄마가 사준 세탁기를 두고도 은색 세숫대야에서 늘 빨랫비누로 손빨래하던 할머니 모습

겨울에 춥디 추운 화장실에서 간간이 나오던 민달팽이와 보일러 냄새

청소기를 두고도, 할아버지가 달고 사시던 강냉이 부스러기를 꾸부정한 자세로 주우며 걸어 다니던 할머니

밤달이 다 저물지도 않은 이른 새벽 늘 귓가에 들리던 할머니의 기도소리..

할머니는 행여 자식들이 깰까 싶어 본인의 가장 작은 목소리로 한숨 섞인 기도를 하셨지만,

일찍부터 귀가 좋지 않았던 할머니의 제법 큰 기도 음성에 매번 잠에 깼다.

먹기 싫은 된장에 아침밥을 먹으라 할까 싶어 늘 자는 척을 하며 듣던 그 기도소리는

언젠가부터 마음속으로 따라 할 정도로 똑같은 내용이었다.

먼저 떠나보낸 자식들과 남아있는 손주들에 대한 한숨 섞인 기도,

해운대에 사는 둘째 딸 부부와 손주들을 시작으로

부산에 있는 우리 가족, 미국에 있는 셋째 이모네, 곁에 있는 막내이모까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호명하며 기도를 드린 후 자는 잠에 자신을 데려가달라는 기도를 마지막으로 기도를 마치셨다.

' 자는 잠에 가게 하소서.. 자는 잠에 가게 하소서..'

그때 할머니 나이 70이 채 안되셨었다.


지난 10월이었다.

아침 일찍 전화를 받는 엄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병원에서 온 전화였다.

할머니가 많이 좋지 않으시다고, 주말에 가족들이 한 번씩 다녀가보길 권하셨다.

그날 오후 급하게 일을 마치고 부산으로 가면서 병원에 전화했다.

' 손녀인데요, 이순연 할머니 많이 좋지 않으시다 하셔서.. 급하게 지방에서 왔는데 지금 좀 뵐 수 있을까요? '

늦은 시간이었지만 병원에서는 와도 된다 하셨고,

볼 수 있다는 안도와 함께 그만큼 좋지 않으신가 보다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할머니에게 늘 최선을 다하는 막내이모와 큰 이모도 사촌언니 부부와 함께 병원으로 왔다.

추석 이후에 처음 만난 할머니는 호흡기에 의존해 계셨고 그 모습에 엄마랑 큰 이모는 통곡을 했다.

주 2회 할머니를 보러 오는 막내이모는 우리 중에 지금 할머니의 모습이

제일 낯설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왔는지도 모르는 할머니의 오그라들어버린 손을 억지로 펴서 잡아가며 곁에 앉아 각자 울었다.


코로나 전 아주 약간의 치매기를 보이셨던 할머니.

코로나가 노인에게 위험해서 차라리 안전할 병원으로 모시고, 3개월만 있기로 한 것이 벌써 5년이 흘렀다.

병원에 들어가고 얼마뒤, 사진 한 장이 왔었다.

여자는 꾸며야 한다며, 80 평생 치마와 비녀 꽂은 쪽머리, 새카만 머리를 유지했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아무렇게나 자른 새 하얀 커트머리가 너무나 낯설었다.

태어나 처음 해본 커트머리에 본인이 가장 낯설었겠지만 행여나 자식들이 걱정할까

어색한 웃음을 지으시는 사진 속 할머니를 보며 엄마와 이모가 말없이 눈물을 흘렸던 게 엊그제 같은데..

길고 길었던 코로나는 끝났지만, 할머니는 더 이상 바깥생활이 힘들 만큼 쇠약해졌다.

' 키다리 할머니 '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큰 키와 좋은 체격이었는데

이제는 너무나 작고 야윈 한 여자만이 호흡기에 의지한 채 누워있을 뿐이었다.


좋은 소리, 인생의 철학, 나를 위한 사랑의 세레나데였을 소중한 한마디 한마디의 말들이

잔소리로 치부되어 모진 말로 대꾸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너무나 후회스럽다.

바로 앞동에 살지만, 저녁 한번 같이 먹어드린 날은 손에 꼽는다.

내일 먹지머, 주말에 가지머.. 차일피일 미루던 하루 이틀 한 달 일 년들..

못한 사람은 후회만 남아 슬프고,

누구보다 잘했던 막내이모는 더없이 깊은 슬픔 속에 할머니를 떠나보낼 준비를 한다.

인간은 왜 태어난 순간부터 슬픔을 벗어날 수 없는가?!

평생 배를 곯았던 소녀,

아들 없는 설움 속에 살았던 여자.

먼저 떠나보낸 자식들을 마음에 뭍고 남은 그 손주들의 걱정에 한숨과 눈물 마를 날이 없던 할머니.

한순간도 여자 이순연이 되어 볼수 없었던 슬픈 시절에 태어난 불쌍한 우리 할머니.

그렇지만 딸들이 있어서 내가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했다는.. 사랑이 최고였던 여자 이순연.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의 여정 속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이 그녀의 오랜 기도처럼

' 자는 잠에 편안히 가실 수 있길..' 후회뿐인 못난 손녀가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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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