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거기 계셨어요?

by 진기유

함께한 시간만큼, 그 추억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 것이 되어 있었다. 뜻밖의 곳에서 할머니를 발견하고, 할머니를 추억하곤 한다.


할머니의 부고를 알고 딱 5년 뒤 1월 1일. 챙겨 보는 TV 교양 프로그램이 있어 어김없이 노트를 펼치고 화면 앞에 앉았다. 필기까지 해 가면서 즐겁게 보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날의 주제는 <이중섭>이었다. 한 주 전에 이미 예고가 있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지만 한 주 동안 잊고 있었는데 화면에 이중섭의 황소 그림이 나온 순간, 기억은 먼 9년 전으로 돌아가 할머니께 이중섭에 대한 두 권짜리 책을 내밀었을 때의 무게감, 책의 표지, 할머니의 놀라고 기뻐하는 표정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내 가슴을 비틀었다. 곧바로 눈물이 터져, 패널들이 밝은 스튜디오에서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도 나는 계속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방송 내내 눈물을 쏟으면서도 이중섭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어떻게 할머니가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그들의 언어로 풀어줄지 궁금하여 어른거리는 화면을 기어코 바라봤다. 그러는 동안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보고 싶어요, 할머니’

내게 울면서 이중섭의 생애에 대해 들려주었던 할머니, 함께 덕수궁으로 미술전을 보러 갔던 날의 할머니. 기억이 아직 선명한데도 보고 싶었다.

방송은 이중섭의 가족애에 대해 다루었다. 그림 속에 쓰인 ‘ママ、パパ(엄마, 아빠의 유아어)’라는 글자, 벌거벗은 아이들을 그린 유머러스한 성격, 일본인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 생활고, 어려운 시대를 겪어야 했던 운명, 그 속에서 늘 가족을 그리워하며 쓴 편지. 할머니가 그 책을 읽으며 내게 들려주셨던 내용과 같았다. 할머니, 제가 다시 이중섭을 만나고 있어요. 그래서 할머니가 사무치게 떠올라요. 가족도 사랑하는 이성도 친구도 아닌 사람을 두고 눈물을 쏟으며 그리워할 사람이 있다는 것, 그럴 인연을 만났었다는 것, 그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눈물을 닦았다.



*

포털사이트 메인 화면에 작게 흑백 인물사진이 올라 있었는데 그 얼굴이 룸메이트였던 할머니와 똑 닮아서 깜짝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사진 속 인물은 윈스턴 처칠이었다. 사진을 눌러 들어가 보니 영국 총리였을 뿐만 아니라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이기도 했다는 점을 상세히 다룬 내용이었다. 처칠의 사진을 더 찾아보았다. 윈스턴 처칠을 검색하면 쏟아져 나오는 가장 유명한 사진, 그와 비슷한 연령일 때의 다른 사진들을 보니 그야말로 내가 함께 살았던 할머니와 아주 많이 닮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닮은 게 아니라 똑같이 생겼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사람은 왜 닮은 사람들을 보면 웃음이 나올까. 할머니 생각에 반가움과 그리움에 눈물이 났다가 돌연 웃고 있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이걸 알았다면 나는 할머니께 말했을까? 할머니는 아무리 위대한 남자라도 성별이 다른 사람을 닮았다고 하면 싫어하셨을까? 절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피어났고, 지나간 시간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동안 <룸메이트는 여든 살>을 읽어봐 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이야기는 인명이나 고유명사, 사건의 전후 관계에 살짝 변화만 주었을 뿐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의 추억을 여러분과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할머니도 그만큼 많은 분들의 마음 속에서 새롭게 그려졌겠지요. 감사합니다.





이 책을 쓰면서 느꼈다. 할머니가 나한테 해주신 것의 반의 반의 반의 반도 못 해드렸고, 짜증을 부리고 뻔뻔하게 굴었구나.

어떤 날은 타이핑을 멈추고 펑펑 울었고, 어떤 날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할머니와의 추억을 남기고 싶어 글을 썼는데 나의 모자람을 반추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것이 지금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더 잘하도록, 좋을 때뿐 아니라 화나거나 미울 때도 내 모자람을 생각하며 잘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 필요하다. 오늘 하루 나와 내 소중한 사람들이 무사히 밤을 넘긴다는 것은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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