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갑자기 찾아오는 이별은 없다

서울 지하철 인질목록 3장: 하차

by 류해인

#이한성

오후 5시 10분, 태평경찰서 제1 조사실.


문도현: 여자친구랑 최근에 헤어지셨고, 사용하던 칼을 구매하겠다는 지인이 있어서 그 지인에게 가는 중이었다. 여기까지, 정리한 내용이 맞나요?

이한성: 맞습니다.


문도현: 이한성 씨 칼을 구매하겠다던 그 지인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이한성: ……네.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근데 혹시, 지금 제가 의심받고 있는 건가요?


문도현: 꼭 그렇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렵고, 절차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만 말씀드릴게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한성: 아, 아무래도 흉기를 소지하고 있어서 그런 거겠죠?

문도현: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조사일 뿐이니까요.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한성: 게다가 최근에 결별도 했고? 그렇죠?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인 성인남자가 날카로운 흉기를 가지고 지하철에 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질극이 벌어졌다? 아주 의심스러운 정황이죠.

문도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실히 조사에 임해주시면 오해라는 건 다 없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이한성: 오해, 오해하니까 생각나는데, 그게 참 사람 피 말리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문도현: ……여자친구 분 얘기인가요?

이한성: 해도 될까요?


문도현: 혹시 길까요?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아서…….

이한성: 연애 기간에 비하면 순식간이죠.

문도현: 실례지만, 교제를 얼마나……?


이한성: 6년 7개월이요.


문도현: 아……, 그래도 일단 들어볼까요?


이한성: 그러세요. 간접 경험이라도 하시면 좋잖아요.

문도현: ……네?


이한성: 아, 그러니까 제 말은 장기간 연애한 사람 얘기를 주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말이죠.



“잠깐 앉아봐.”


영업을 마치고 가게 뒷정리를 하고 있던 차에 이한성의 여자친구가 말을 꺼냈다.


“응? 왜?” 쓰레기봉투를 묶던 이한성이 물었다.

“일단 앉아봐. 할 얘기 있어.”


부엌과 마주보고 있는 바 형태로 된 테이블의자에 앉은 여자친구가 테이블을 툭툭 쳤다.

“뭔데? 거기서 얘기해. 여기서도 다 들려.”


쓰레기봉투 입을 질끈 묶은 이한성은 손을 깨끗이 씻고 냉장고를 열어 숙성중인 횟감을 확인했다.

여자친구는 이한성 몰래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게 하나 내려고.”

그는 그제야 하던 일을 멈추고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2호점 하자고?”


“하자는 게 아니라, 내가 한다고. 2호점도 아니고.”

“그러니까 지금 새로운 가게를 열겠다는 소리지?”

이한성이 정리한 말에 여자친구는 , 하고 짧게 답했다.


“……왜? 작년 여름에 내가 2호점 얘기 꺼냈을 때는 싫다더니.”

그때는 종일 붙어있어도 좋았으니까, 하고 여자친구는 속마음을 말할 수 없었다.

대신 무난한 대답을 뱉었다.


평범하고 뻔뻔한 대답이었다.

“그때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거고. 이제 슬슬 준비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근데 2호점이 아니라 굳이 새로운 가게를 하는 이유는 뭐야?”


그의 당연한 물음에 여자친구는 이번에도 미리 생각해둔 대답으로 대응했다.

“다른 음식도 해보고 싶어서. 몇 년 동안 한 가지 음식만 했더니 조금 지겹기도 하고. 슬슬 놔줄 때가 된 거 같아.”


여자친구의 대답을 들은 이한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그날 밤 대화가 끝나자마자, 이한성의 여자친구는 더욱 바삐 움직였다.

가게준비로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도와달라고 할 법도 한데, 단 한 번을 그러지 않았다.

둘 사이는 더 멀어졌다.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드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날로부터 몇 주의 시간이 흘렀다.




이한성은 여자친구의 새로운 가게로 들어서자마자 버럭 큰소리부터 냈다.

“야, 진현주! 초밥 그만두고 기껏 차린 게 선술집이야?”


말끔하게 정리된 가게내부를 보며 이한성이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안주나 만들겠다고? 기껏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이?”

평소 이한성은 일본에서 음식 공부를 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술이 음식 맛을 지배한다는 이유로 술과 음식을 함께 내는 가게들을 철저히 비난해왔다.

안주는 음식이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안주를 음식 만들 때처럼 정성스럽고 맛있게 하면 되지. 단지 그 음식에 어울리는 술만 곁들이는 거야. 술도 내가 직접 맛보고 선별할 거야.”

태연하게 대답하고는 가게를 살피는 여자친구에게 이한성은 적잖이 실망했다.


함께 타지에서 힘겨운 유학생활을 견뎌낸 동료이자 연인의 시각으로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가게가 생각보다 넓네? 여기 월세 꽤 비쌀 텐데. 내부 인테리어에도 꽤 투자한 거 같고.” 이한성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런가? 술집이 적어도 이 정도 크기는 돼야지. 회전율 생각하면 마냥 좁게 할 수도 없잖아. 그리고……, 인테리어도 소개받은 업체여서 비교적 저렴하게 했어.”


조목조목 대답하는 여자친구의 모습이 왜 이리도 정 없게 느껴지는지 이한성의 불만은 몸을 부풀려갔다.

“그럼 월세는? 감당할 수 있어? 아니면 뭐 초반에는 저축한 돈에서 까먹을 생각이야?”

“전에 비하면 월세가 비싸긴 하지. 근데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네 말대로 모아둔 돈도 꽤 있고. 그동안 돈 나갈 일이 없었잖아?”


여자친구는 지나간 세월을 떠올리듯 씁쓸하게 한쪽 입술에 미소를 내걸고 덧붙였다.

“이제는 큰 돈 나갈 일도 없으니까.”


“…….”


이한성은 왜인지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막연히 꽤 오래전부터 어긋나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느낌만 받을 뿐이었다.

연인사이에 다툼이나 충돌이 없는 건 지극히 정상적이다.


싸우지 않고 잘 지내는 연인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자주 다투던 연인사이에 다툼이 줄어든다면, 눈에 띄게 싸우는 횟수가 줄어든다면 그건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툼은 서로를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하는 연인들에게서 몸을 곧잘 숨기곤 하지만, 사랑의 불꽃이 식어버린, 무관심이 일상이 되어버린 연인들 사이에서도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다툼은 서로를 향한 싫증이나 미움의 표출이 아니라 관심과 애정의 확인이었다.

딱히 무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게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여자친구를 한참 지켜보던 이한성은 앉아있던 의자를 제자리에 집어넣었다.


“현주야, 간다. ……오픈 준비, 마저 잘하고. 연락해.”

이한성은 힘없이 여자친구의 가게를 나섰다.

“…….”


이한성이 나가자마자 진현주는 그대로 주저앉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차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며칠 후, 늦은 밤, 현관문이 열리고 이한성이 성큼성큼 들어오자 진현주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왜 말 안했어?” 이한성이 따지듯 물었다.

“……뭘? 내가 말 안 한 게 뭔데?”


그동안 이한성에게 말하지 않는 수많은 것들 중 어떤 걸 말하는지 진현주는 알고 싶었다.

“동업자 있다는 거!”


“……아, 말하려고 했지. 근데 얘기할 시간이 없었잖아.”

있는 대로 열을 내고 있는 이한성이 무색할 만큼 진현주는 침착하게 답했다.


“너나 나나, 가게 때문에 바쁘고.”

“그래도 그런 건 미리 말했어야지! 나 바보 만들겠다는 거야 뭐야? 내가 왜 그런 애기를 여태 모르고 있어야 되는데, 나 네 남자친구 아니야?”


“맞지, 남자친구. ……진정해.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서로 정신없이 바쁘니까, 그래서 그랬던 거야.”


“남자잖아! 동업자가 남자라고! 그렇게 중요한 걸 남자친구한테 숨겼는데, 다른 뜻이 없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곱씹어 생각할수록 화가 났는지 이한성의 얼굴은 이미 불콰해진 상태였다.

“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대충은 알겠는데, 그런 거 진짜 아니야. 그냥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오빠야. 그리고…….”


진현주는 잠시 말을 끊었다 덧붙였다.

마치 가장 중요한 의미를 담은 말을 하듯이.

“그 오빠, ……결혼할 사람 있어. 날짜도 잡았고.”

연인끼리의 싸움에서 한쪽이 감정을 전면에 내세워 말할 때 다른 한쪽은 감정을 거세한 표정과 말투로 얘기하는 것.


이런 태도는 보다 큰 싸움으로 번지기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지만, 어떤 순간에는 불안요소로 비춰지기도 한다.


“……하.”

이한성이 한숨으로 대화를 맺는다.


연인사이의 대화에서 불현듯 터져 나오는 한숨은 불안을 넘어 위기다.

이한성은 진현주를 한참동안 쏘아보고는 그대로 현관문을 나섰다.

진현주는 그를 잡지 않았다.

그날 밤의 대화가 제대로 봉합되지 않은 채 또 며칠이 흘렀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한 이한성이 여자친구에게 이별통보를 받고나서 가장 먼저 뱉은 말이었다.

사실 갑자기 찾아온 이별은 아니었다.

진현주의 이별은 몇 달에 걸쳐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그 시점과 이유를 정확히 대라고 하면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별의 이유가 너무 많아서인지, 그 반대인지는 당사자인 그녀조차 알 수 없었다.

“…….”

진현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말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남자친구에 대한 불만과 서운한 점으로 에세이를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그 많던 것들이 죄다 사라졌다.


사라졌다고 해서 그때 느꼈던 감정도 같이 휘발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언젠가부터 앙금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에 이르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스스로도 표현할 길이 없는 감정이었다.

“말해보라니까? 내가 바람을 폈어? 아님 널 때리길 했어? 나 너한테 욕 한번 한 적이 없어. 그것도 아니면 돈을 못 벌었어? 나 종일 가게에서 일만 했잖아. 안 그래?”


한참을 말없이 이한성의 눈을 바라보던 진현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진짜 이유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네 말대로 너는 바람도 안 폈고 폭력과 폭언을 행사하지도 않았고, 종일 가게에서 일하며 부지런히 돈을 벌었지만 그냥 헤어지는 게 맞는 거 같다고 설명했다.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너랑 함께 하고 있다고 내가 더 행복한 건 아닌가봐.”

진현주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이한성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분명 그녀의 입을 통해 들은 명확한 이유는 없었지만, 그래서 이것저것 추측에 빗대어 물으려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20대의 절반이 넘는 세월을 함께 보낸 연인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사랑할 수는 없지만 예의는 지키고 싶었다.



#김선범

오후 5시 17분, 태평경찰서 제2 조사실.


최병기: 안녕하세요.

김선범: 네, 반갑습니다.

최병기: 여기 기록을 보니, 올해 초까지 서울 2호선 열차를 운행하셨네요?


김선범: 네, 서울교통공사 소속 기관사였습니다. HYH-8981열차를 직접 운전했었죠.

최병기: 그러시군요. ……저, 조금 민감한 질문일 수 있는데, 자진퇴사하신 건가요?

김선범: 뭐, 비슷합니다.

최병기: 특별한 사유가 있을―


김선범: 저기, 수사관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정보가 있어요.

최병기: ……정, 보요?

김선범: 예예, 이번 사건에서 그야말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보요.

최병기: 그게 뭘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저한테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김선범: 그럼요! 그러려고 꺼낸 얘기에요! ……자, 들을 준비되셨나요?

최병기: 아, 잠시만요. 후……. 후, 네, 준비됐습니다.

김선범: 사실은요. 지하철, ……아, 그러니까 제가 올해 초까지 직접 운전했었고 오늘은 그냥 승객으로 있던 HYH-8981열차에 다름 아닌,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어요!


최병기: 폭탄이요!?


김선범: 네! 폭탄이요!


최병기: 아직 열차에 있는 건가요? 그러면 빨리 연락을…….

김선범: 아아, 진정하세요. 지금은 없어요. 제가, ……아, 그러니까 열차에 같이 있던 승객들이 무사히 제거했어요.


최병기: 인질로 잡혀있던……, 그러니까 승객 중에 폭탄 제거 전문가가 있었나요?


김선범: EOD


최병기: 네? 이오……, 디?


김선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문가가 있진 않지만, 무사히 제거했어요. 우려하고 계시는 인명피해도 없을 거예요. 한강에 버렸거든요! 운이 나쁘면 한강에 사는 동물들이 피해를 입기는 하겠네요.

최병기: 무단 투기는 벌금형에…….

김선범: ……아, 맞다. 대형 폐기물은 구청에 신고하고 버려야 되는 거죠?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최병기: 저기, 근데 선생님? 갑자기 신나신 것처럼 보이는데……, 제 착각이겠죠?


김선범: 그런가요? 뭐, 착각 좀 하시면 어때요! 그나저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최병기: 방금 직접 말씀하신 폭탄이 가장 중요한 거 아니었나요? 중요한 게 또 있을까요?


김선범: 사건파일 제목부터 바꾸셔야죠! 서울지하철 인질 사건이 아니라, 폭탄테러 사건으로! 물론 승객들의 발 빠른 대처로 폭탄이 터지진 않았지만요. 음, 그러면 <폭탄테러 미수사건>이라고 하면 되겠네요!


노트북을 이용해 보고서를 작성하던 최병기 순경은 잠시 고민하고는 참고조사인의 의견을 반영하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인질범은 사라지고 폭탄테러범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근데 가장 중요한 증거품인 폭탄이 강에 있단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깊은 한강에.





#지하철

하차 45분 전.


“근데요. 저희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거예요?”

어느덧 편안해진 분위기에 선하나가 의문을 던진다.


“이렇게 여유롭게 있는 법도 배워야 되는 거야.” 류기태가 으스댄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열차에서 내리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냐는 말이죠. 어쨌거나 밖에서는 2호선 지하철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선하나가 소년을 가리킨다.

“저 오빠가 아빠한테 문자까지 했다고 했잖아요. 지하철에 인질범 있다고.”


소년은 별 반응 없이 눈만 끔뻑거린다.


사실 소년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누구보다 민첩한 신체능력을 가졌지만, 말을 고르는데 있어서만큼은 초짜나 다름없다.

감정표현도 서투른 편인데다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데도 다소 어려움을 겪어왔다.

선천적인 결함이라기보다 경험이 부족한 탓이다.


“뭐, 그때는 진짜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으니까.” 옆에 앉아있던 채소윤이 대신 나서서 옹호해준다. “나도 만약 신고만 할 수 있었으면 바로 했을 거야. 실제로 무서웠던 것도 사실이고.”

“그건 그래요.” 손준겸도 시인한다. “처음 보는 사람이 막 소리치면서 칼을 휘두르고 있는데 누가 안 무서워하겠어요.”

장석기가 선하나의 말에 의견을 덧댄다.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러네요. 경찰도 분명 이쪽 상황에 관심가지고 있을 거예요. 서울 한복판에서 인질극이 벌어졌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아마 저희들 모두 인질로 잡혀서 위협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죠.”

“그렇다니까요! 이대로 저희끼리 밖에 나간다고해도 경찰들이 꼬치꼬치 캐물을 걸요?”


내세운 의견에 다른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에 마냥 신난 선하나가 열을 올린다.


“생각해보세요! 어떤 경찰이 ‘아, 아무도 다치신 분이 안 계시다고요? 천만다행입니다. 그럼, 댁까지 안녕히 가십시오.’ 이러겠어요?”


“경찰이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고 하면 되지.”


류기태가 정성껏 꾸리를 쓰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한다.


세상에 걱정할 게 얼마나 많은데, 뭘 그런 걸 걱정하고 자빠졌냐는 어투다.


류기태의 의견에 고재성이 자기는 평생을 너무나도 진실 되게 살아온 나머지 연기에는 영 소질이 없단다.

또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 해도 전문 연기자들이 아니니 경찰들이 바로 알아챌 게 틀림없다며 칭얼댄다.

“누가 연기하래?”


류기태가 꾸리의 등을 톡톡 친다.


그러자 강아지가 그의 품에서 폴짝 뛰쳐나간다.


류기태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리 중 누가 이 열차에 폭탄 설치했는지 아는 사람 있어?”

“폭탄이요? 또 갑자기 폭탄이 여기서 왜 나와요?”

선하나의 물음은 가볍게 무시하고 류기태가 말을 이어간다.


“저 나이키 가방. 우리 전부 다 처음에는 폭탄 들어있는 줄 알았잖아? 누가 버려놓고 갔는지는 당연히 모르고. 그러니까 그냥 처음부터 인질극이 아니라 폭탄테러인 것처럼 말하면 되지. 열차에 폭탄으로 추정되는 검정가방이 있었다. 범인은 모르겠다. 그건 경찰이 알아봐라!”

“……그럼 제가 아빠한테 보낸 문자 내용은요?”


소년이 처음으로 류기태에게 말을 건다.

“어, 소년, 반가워.”


류기태가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든다.


“기껏 친구까지 됐는데 말 한 번 못 섞어보고 헤어질 뻔했네. ……뭐, 아무튼 그것도 어려울 것 없지.”

류기태는 나름의 계획을 공유한다.


그의 말이 끝나자 선하나가 묻는다.

“그게 할아버지가 생각했다는 계획이에요?”

“간단히 얘기하자면 그렇지.” 류기태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치켜든다.

“……복잡하게 하면요?”


“어, ……아직 생각 안 해봤어.”


류기태가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한다.

아무래도 복잡한 계획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단다.




#정성도

오후 5시 20분, 태평경찰서 제1 조사실.


문도현은 때 아닌 기시감에 답답할 지경이다.

“쓰읍……, 초등학교는 어디 졸업했어요?”

정성도가 더듬더듬 답한다.

“쩝, 아니네.”

문도현의 세 번째 시도가 빗나간다.

“하, 이상하네. 나랑 6살이나 차이 나는 걸로 봐서는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을 리는 없고, 뭘까요 도대체?”


“그건, 저도, 모르죠.”


“그리고 무엇보다 순수미술 전공. 나랑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인데……. 그쪽은 저 본 적 없어요?”

“네, 처음, 봐요.”


“전과도 없는 걸로 봐서, 형사 시절에 봤던 범인도 아닌데…….”

문도현은 혼잣말이 너무 컸다고 여겼는지 황급히 정정한다.

“아, 오해는 마세요. 그쪽이 범인처럼 생겼다는 말은 아니니까. 마스크가 특이하긴 하네요.”

문도현은 연신 중얼중얼, 생각을 이어간다.


묵혀뒀던 기억까지 끄집어내어 상대방의 정체를 파악하려한다.

노란색 마스크에 헤드폰, 190센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큰 키……, 분명 익숙한……. 그의 눈이 번쩍 뜨인다.

“야! 이 새끼!”


무사히 기억을 떠올린 문도현의 입에서 욕이 가장 먼저 나온다.

“너! 오늘 오전에 뭐했어! 지하철 타기 전까지 뭐했냐고! 이 새끼 여기 있었네!”

그리하여 경찰은 금일 오전 11시 경 놓쳤던 [범죄조직 회담 사건]의 마지막 도주자를 검거한다.

문도현의 연락을 받은 사건 담당 팀장 고종한 경위는 역시 강력반 에이스라며 그를 치켜세웠다.

정성도는 그대로 강력계 사무실 유치장에 입주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그곳엔 반가운 손님들이?

“어? 성도 형님!” 문지성이 방긋 웃으며 직장 상사의 입주를 환영한다.

“어?야,너,뭐야!” 한재천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친구의 입주를 환영한다.

“이야, 이제 보니 특기가 도망치는 거였네?” 도상준 전무는 정성도의 남다른 도주 실력을 칭찬하며 사업파트너의 입주를 환영한다.

처음 가보는 장소에서 식구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기쁜 일이 또 있을까?

정성도가 환하게 웃는다.


물론, 마스크 때문에 그의 웃음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