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가족이 뭐 별거야? 별거다

서울 지하철 인질목록 3장: 하차

by 류해인

#류기태

오후 5시 36분, 태평경찰서 제1 조사실.


“앞서 진행된 목격자 진술조사에서 밝혀진 내용이 너무 빈약해서요. 부디 선생님께서는 차분하게 많은 얘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예상외로 길어지고 있는 진술조사에 문도현 경사는 몹시 피곤한 눈치다.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힌다.


조사실 천장은 시선을 사로잡을만한 요소는 쥐뿔도 없지만 한참동안 천장타일을 응시한다.


서서히 뒷골이 당겨온다.


“아, 그랬어? 그것 참 안타깝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경우가 더러 있는 류기태가 조사관의 정수리와 이마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정보만 빈약한 게 아니어서 더 안타깝네.”


“…….”


류기태의 시선이 어디에 닿고 있는지 알아챈 문도현 경사가 말을 잃는다.


이번 목격자에게서도 예의나 차분함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할 것 같다고 일찍이 결론짓는다.


내친김에 이렇게 묻는다.


“선생님께서는 따로 탈모 약을 복용 중이신가요? 꽤 풍성하시네요. 부럽습니다.”


“아까 폭탄 뭐시기 하지 않았어? 조사실에 왔으면 조사를 해야지 이 양반아.”


류기태는 어림도 없다는 어투로 지적한다.


더불어 요새 공무원은 일을 너무 대충하는 경향이 있어 꼬박꼬박 납부하고 있는 세금이 너무나도 아깝다며 경우 없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금일 진행한 목격자 진술조사에서 처음으로 먼저 나서서 목격자와 친밀감을 쌓아보려 했지만 결코 간단치가 않다.


“……아아, 네, 죄송합니다.”


경찰의 사과로 본격적인 진술조사가 시작된다.


“네, 그래서 ……그렇게 폭탄을 한강에 던져버리고 열차에서 하차하셨다고요?”


문도현 경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사를 이어간다.


“그렇다니까! 지하철 문 아래쪽에 수동개폐장치 있잖아. 그거 알지? 그걸로 문 딱 열고! 저 멀리 던져버렸지. 무게가 있어서 그런지 잘 날아가던데?”


류기태가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 직접 출입문을 여는 시늉까지 선보인다. 이렇게 하단부에 있는 레버를 돌리고, 이렇게, 이렇게, 하면 문이 활짝!


“……범인이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던가요? 기껏 준비한 폭탄이 날아가 버렸는데.”


문도현 경사가 떨떠름한 얼굴로 보다 깊은 사유를 요구하는 심화 질문을 던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우리가 범인 남대문을 연 것도 아닌데 난리칠 건 또 뭐야? 그리고 애초에 범인은 언제부턴가 조종실 안에만 틀어박혀있었다니까?”


류기태도 눈앞의 경찰과 같은 카테고리에 포함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 남자의 현저히 부족한 지능과 거기서 비롯된 저조한 이해력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아, 거 참, 이해력 딸리네. 말하다보니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대학은 나왔나?”


“……갑자기 이 대목에서 그건 왜 물으시죠?”


문도현 경사가 몸을 뒤로 내빼며 경계한다.


근 세 달 사이에 이렇게나 폭력적인 질문을 받은 건 처음이다.


“뭐, 별 건 아니고, 지금 그게 이해력을 총동원한 거라면 대학 다니는 4년 내내 꽤 힘들었겠다, 싶어서. 아! 미리 말해두는데, 나 지금 걱정하는 거야.”


그렇게 경계할 것까지는 없다며 류기태가 연장자 특유의 너그러운 미소를 장착한다.


“2년제 나왔습니다.”


경찰이 연장자의 인자한 미소에 껌벅 넘어간다.


“아, 그래? 그나마 다행이네. 그만큼 고생은 덜 했으니까. ……그래도 2년 동안 머리 굴린다고 힘들었겠어.”

“그러시는 영감님은…….”


대뜸 학벌을 운운하는 류기태의 모습에 약이 오른 문도현 경사가 그렇게 말을 꺼내며 신상정보가 띄워져있는 노트북 화면을 확인한다.


이내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H―a―r―v―a―r―d University


“하버드……를 졸업하셨네요?”


영어에 문외한인 그조차도 발음하기 쉬운 그 단어에 눈이 의심스럽다.


그런 이유로 “분교……인가요?” 하고 나름의 반박할 거리를 찾는다.


“에엥? 내가 알기로 하버드는 분교가 없는데? 최근에 생겼나? 하도 오래전에 졸업해서 난 잘 모르겠어. 아마 아닐걸?”


놀랍게도 류기태가 하버드, 그러니까 미국 케임브리지 소재의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건 사실이다.


틀림없다.


그의 좁은 집 거실 한가운데, 낡은 벽걸이 TV 위에 내걸린 액자에 넣어 두진 않았지만 그에겐 하버드 대학교 졸업장이 있다.


새하얀 종이 상단 부근에는 당연히 [HARVARD UNIVERSITY]라는 학교명이 적혀있고, 왼쪽 밑에는 크림슨 색상―쉽게 말해 진홍색―의 학교 로고가 박혀있다.


졸업장은 그 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세상이 그렇다. 그리고 그가 그 위대한 졸업장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편법이나 부정도 없었다.


졸업장은 못 주겠는데요? 꼴사나워서. 류기태가 졸업을 앞둔 시점에 이런 식의 불합리한 일도 물론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성실히 강의를 수강했고, 꽤 좋은 성적으로 학업을 마쳤다.


당연히 학비도 빠짐없이 지불했다.


졸업요건을 충족한 학생에게 졸업장을 수여하지 않는 대학은 없다. 그리고 류기태가 졸업한 37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버드는 명문 중의 명문학교였다.


“그렇게까지 대단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 남들이 보면 그냥 다 늙은 할아버지니까.” 류기태는 한없이 느긋한 어투로 말한다.


“예……, 알겠습니다.”


문도현 경사의 어투가 왜인지 공손해진다.


동시에 예순다섯 살이 그리 늙은 건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한다.


“어, 그럼 이쯤에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 될까요?”


“넘어가든 넘어오든, 경찰 양반 마음대로 해.”


그 말이 꼭 그 방향에 맞춰 반대편으로 가겠다는 반항적인 의미로 들린다.


목격자의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하기란 어려울 듯싶다.


“아까 처음 말씀하실 때 다른 인질, 그러니까 객실에 있는 승객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셨는데요. 기억하시나요?”


“기억하지, 그럼. 바보도 아니고 그거 하나 기억 못하게? 경찰 양반도 기억하는 걸 내가 기억 못할라고? 난 하버든데?”


잔뜩 날이 서있는 목격자의 말투에 문도현 경사는 어떤 포인트에서 화가 나셨을까, 고민하려다 만다.


원래 이런 성격의 사람이라고 상정해두는 편이 신상과 정시퇴근에 이롭게 작용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노년으로 치닫고 있는 남자 특유의 악의 없는 말버릇인지도 모를 일이다.


평생을 한 가지 언어 습관만 고수한 사람에게 다른 방식으로 말하라 권유하는 것도 그것 나름대로 다소 무리한 요구인 것 같다.


예순다섯은 그런 나이다. 그동안의 습관을 버리는 것이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것보다 몇 갑절은 더 어려워진 나이.


조사관이 질문한다.


“승객들과 주로 어떤 얘기를 하셨을까요?”


그때 조사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오더니 최병기 순경이 고개를 내민다. “저, 선배님?”


“어, 최 순경…… 왜? 뭐가 잘 안 돼?”


실수로라도 후배 경찰의 조사능력을 과대평가하는 법이 없는 선배 경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는다.


후배 경찰은 억울하지만 억울하지 않은 척 그건 아니라고 대답한다.


자기는 그저 상사, 그러니까 당신보다 높은 직급의 상사가 등장했다는 소식을 전하러 왔을 뿐이란다.


후배의 말에 문도현 경사는 알겠다고 대답한다.


“저, 선생님?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문도현 경사가 류기태를 보며 말한다.


“나간 김에 오줌보도 비우고와.” 류기태가 선심 쓰듯 대답한다.


“자, 안녕하세요, 어르신?”


문도현 경사를 대신해 최병기 순경이 류기태의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어르신이라는 호칭은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일단 안녕하자고! 그나저나, 꽤 어려 보이는데?”


류기태가 처음 본 경찰의 외모를 평가한다.


채소윤과의 목격자 진술조사에서 이미 들어본 적 있는 말인지라 최병기 순경은 능숙하게 받아친다.


“하지만 그게 칭찬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겠죠? 저도 다 알고 있어요!”


“칭찬 맞는데? 왜 내 칭찬을 마음대로 규정해? 경찰이면 그래도 되는 거야?”


종종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지금과 같은 오해가 빈번히 일어나곤 하는데 류기태는 왜 그런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그는 어엿한 세계 최고의 대학교를 졸업한 수재답게 유독 이와 같은 상황이 자주 벌어지는 것에 대해 깊은 사유를 해봤지만,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그 이유는 현상의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았기 때문이다.


모든 원인이 류기태 본인에게 있다는 사실까지는 미처 깨우치지 못한 탓이다.


“……아, 칭찬하신 거군요! 몰랐습니다.”


최병기 순경은 기껏 칭찬을 꺼낸 상대방을 무안하게 한 것 같아 거듭 사과한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어.” 류기태가 대뜸 손을 든다. “저기, 내가 조사를 좀 받고 싶은데 말이야. 이를테면, 목격자 진술 같은. 가능한가?”


“그럼요! 가능하고말고요!”


최병기 순경의 목소리가 한층 커진다.


누가 들어도 오늘 처음으로 목격자 진술서를 작성해본 경찰처럼 보인다.


“조사관이 이렇게 있으니 얼마든지 가능하죠! 자, 어떤 진술부터 하고 싶으세요?”


“으잉? 조사관이 질문을 해야지. ……보통 그러던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난데없이 제공받은 발언의 자유에 류기태는 당황한다.


“아, 그렇죠! 그럼 질문 시작하겠습니다아!”


최병기 순경은 질문하는 경찰이 아니라 경기시작을 알리는 캐스터 같다.


류기태는 좀 전에 앉아있던 뚱한 표정의 경찰보다는 한결 낫다고 생각한다.


“여기……, 마지막으로 했던 질문을 보면…….”


최병기 순경이 선배가 작성하고 있던 진술서 내용을 확인한다.


“승객들과 주로 어떤 얘기를 나누셨나요? 또 어느 분과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누셨죠? 반대로 어느 분과 사이가 안 좋았나요?”


“갑자기 질문이 아주 길어졌구만!”


“피곤하실 텐데 얼른 조사 마치고 귀가하셔야죠! 서둘러 끝내겠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목격자의 컨디션까지 고려해가며 조사관은 열의를 보인다.


“좋은 자세야! 이번에도 칭찬이야.” 류기태가 엄지를 들어 보인다.


“감사합니다!” 조사관도 이번만큼은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질문이 뭐였지?”


“아, 주로 어떤 얘기를 나누셨나, 또 어느 분과 대화를 많이―”


“자, 우선 거기까지!”


목격자가 조사관의 말허리를 과감히 자른다.


“지하철에 있던 시간이 워낙 길다보니까 정말 별 얘기를 다했지. 직업이 뭔지, 대학은 나왔는지, 평소 대변은 잘 누는지, 항문질환은 없는지, 가정형편은 어떤지, 폭탄은 어떻게 할 건지, 범인의 꿍꿍이는 뭔지……, 하여간 엄청 많아.”


“음……, 방금 말씀하신 것들 중에 제가 궁금한 건 몇 개 안 되네요? 대충 두 개쯤?”


“역시 그렇지? 그럼 대학 얘기부터 할게?” 류기태가 당당하게 다음 안건을 제시한다.


“아…….” 조사관이 망설인다.


“왜? 싫어? 항문질환 얘기부터 듣고 싶어?”


가장 중요한 안건이니만큼 뒤로 미뤄두려 했던 류기태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묻는다.


“그게 아니라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최병기 순경은 쩔쩔대면서 말을 주워 담아보려 애쓴다. “직업을 먼저 얘기하셔서 그거 먼저 하실 줄 알았어요! ……그러면 대학 얘기부터 해주시죠!”


“좋아!”


류기태가 주먹을 불끈 쥔다.


“근데, 내가 하버드 나왔다는 건 알고 있나?”





장소는 다시 지하철, 때는 류기태가 자기는 하버드 출신이라는 말을 꺼냈던 직후.


“기태할아버지는 대학 생활 어땠어요?” 승객들 중 유일하게 하버드에 관심이 있는 선하나가 묻는다.


“다 똑같지 뭐. 하버드라고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어."


치, 하고 별꼴이라는 듯 홍지선이 비아냥댄다.


“그렇게 다 똑같이 사는 게 싫어서 아줌마는 그저 그런 대학에 갔나?”


류기태도 지지 않는다.


이 여자에게만큼은 왜인지 좋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녀에게서 여동생을 느끼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해보지만 소용없다.


“그 시절엔 다들 집 근처에 있는 대학으로 가고 그랬어요! 집안 여자들까지 서울로 가기엔 형편이 빠듯했으니까!”


“형편이 아니라 성적이 빠듯했던 건 아니고?” 류기태가 목소리를 높인다.


“……저 공부 잘했어요! 진짜에요!”


유학은 고사하고 서울 소재의 대학에 가기에도 집안 형편이 빠듯했던 홍지선도 버럭 대답한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인다.


본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현실에 굴복해본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을 듯한 표정이다.


“그래! 잘했겠지! 여자 중에서!”


이 여자와 같은 얼굴을 어디선가, 정확히 말하면 가장 가까웠던 누군가에게서 지켜본 기억이 생생한 류기태는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말을 지껄이고 있는 입을 도려내고 싶어진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대학졸업장도 갖다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도 말고 딱 1분 전이면 된다.


하지만 하버드를 졸업한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학을 졸업한들 그런 능력은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류기태는 1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선하나의 질문에 답한다.


“백날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는 거지. 남들이랑 다 똑같아.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친구들이랑 수업 듣고.”


류기태는 거짓말을 한다.


하나의 대답에 무려 세 개의 거짓말이 섞여있다.


그는 백날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던 사람이 아니었고, 남들이랑 똑같지도 않았으며,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한 적도 없다. 무엇보다 그는 함께 공부한 친구가 없다.



1시간이면 볼펜 한 자루와 노트 한 권을 살 수 있다.


20시간을 일하면 일주일동안 굶지 않아도 된다.


30시간이면 깨끗한 강의 교재를 사 읽을 수 있다.


50시간이면 신세지고 있는 교수님의 돈을 조금, 아주 조금, 미약한 성의를 보일 만큼,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절대 잊은 게 아니라고, 갚을 의지가 있다고 소극적으로 티낼 수 있을 만큼 갚을 수 있다.


대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이 24시간 열려있다는 사실이 류기태는 이 세상 어떤 것보다 감사했다.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여전히 새벽인 시간대에 도서관에 가 공부를 할 수 있다니.


그 사실이 그에겐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찌든 기름내를 풍기며 도서관에 자리를 잡을 때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짐을 챙겨 각자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도서관을 떠나는 그들의 얼굴엔 오늘도 열심히 학업에 정진했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도서관에서 류기태의 모습을 자주 본 학생들은 저 동양인은 엉덩이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선천적으로 엉덩이에 살이 빈약한 인종의 특이한 공부습관이라고 치부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공부하는 내내 서있을 수는 없으니까. 몇 시간이고 서서 공부할 필요는 없으니까.


가득 차있는 수업시간표와 아르바이트 스케줄로 지칠 대로 지친 류기태의 몸은 항상 휴식을 원했다.


한시라도 몸이 어딘가에 기대있거나 편한 자세에 이르면 어김없이 잠이 쏟아졌다.


그런 그가 취할 수 있는 학습방법은 몸을 불편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우두커니 서서 정성스레 필기한 노트를 들여다보고 강조하기 위해 밑줄 칠 부분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교재에 밑줄을 긋거나 종이 끝을 접는 행위는 돈을 벌기 싫다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다. 더러운 교재는 다른 학생들에게 되팔 수 없었다.


그렇게 아침이 될 때까지 공부를 이어가고 간단하게 요기를 하는 것으로, 류기태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하루를 채 끝내지 않은 상태로 새로운 하루를 맞는 건, 그야말로 밤을 꼴딱 새고 등교하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몸을 혹사시키다 못해 빈사상태로 이끄는 짓을 그는 평일 내내 저질렀다.


강의가 시작되기 1시간쯤 전에 미리 강의실로 가 자리를 잡고 다시 화장실로 향한다. 간단히 씻고 다시 강의실로 돌아온 그는 엎드린 채 기절한다.


강의 시작 5분 전, 마음 따뜻한 교수님의 손길로 잠에서 깬 류기태는 다시 화장실로 가 세수를 한다.


뻑뻑한 눈으로 들여다보는 거울 속에는 언제나 시체가 서있다.





최병기: ……정말 힘들었을 것 같아요.


류기태: 그래도 그렇게 고생한 덕에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으니까. 후회는 없어.


최병기: 다행이네요. 그래도 졸업하시고 나서는 승승장구하신 거 아닙니까?


류기태: 오, 다음 얘기가 바로 그거였어.





피가 흐르고 있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검붉은 입술을 쭉 내민 선하나가 하버드도 다른 대학이랑 똑같다는 시시한 대답에 다음 질문을 던진다.


“할아버지처럼 옛날사람이 미국 유학까지 갔던 거면, 엄청 잘 살았겠네요? 부럽다.”


“…….”


류기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낭설에 가까운 소리를 해대는 중학생의 당돌한 태도에 넋이 나갔다기보다 그냥 어떤 식으로 대답해야 이 아이의 섣부른 추측을 일축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그런 차분한 동작조차 열다섯 소녀가 보기에 한심한 자기방어로 여겨질 뿐이다.


그래서 소녀는 이번 논쟁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것에 도취된 듯 신나서 말을 덧붙인다.


“할아버지는 아르바이트 하면서 공부해본 적 없죠? 대학 졸업하고도 고생이라곤 안 해봤죠?”


자칫 어른에게 버르장머리 없는 말을 서슴없이 지껄이는 청소년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선하나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


누구에게나 그럴만한 사정은 있지만, 이 소녀의 사정은 정말 사정다운 사정이다.


“…….”


이번에도 역시 류기태는 말이 없다.


다만 이번에는 깊은 의문에 빠진 것에서 오는 침묵이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니, 아르바이트 없이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고?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


눈앞의 소녀는 분명 그런 의미를 도출해낼 수 있는 말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어떤 방해 없이 공부에만 몰입해왔다’


이 단순한 명제가 류기태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본인보다 네 배는 더 산 어른이 벙어리처럼 말을 잃자 소녀는 질문을 이어간다.


“대학 졸업하고는 뭐하셨어요?”


“……졸업하고? 한국에 왔지.”


결국 류기태는 잊고 싶지만 평생을 따라다니던 기억과 마주한다.




스물아홉, 대학을 졸업한 류기태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했다. 고향이 좋았다. 고향에 있는 가족이 좋았다.


고향은 그대로였다.


낡은 주택들이 줄지어있는 동네엔 길고양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정돈되지 않은 길 구석엔 종량제봉투가 나뒹굴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기정아, 오빠 왔어.”


변하지 않은 건 딱 도어락 비밀번호까지였다.


거실로 들어선 류기태는 곧바로 이전과 달라진 점을 발견했다.


거실에 가구라고는 없었다.


큼직한 TV가 있던 자리는 정체 모를 종이박스들이 쌓여있었고, 거실 벽면 너비에 딱 맞게 구입했던 가죽소파는 사라지고 두꺼운 이불이 가지런히 정돈된 채 놓여있었다.


그 외에도 집안 곳곳에 자리하고 있던 온갖 크고 작은 물건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기정아!”


류기태는 큰소리로 외쳤다. 길을 잃고 떠돌고 있는 집안 물건들을 애타게 부르듯.


대답이 없다. 집안은 고요했다.


“이 시간에 다들 어딜 간 거야…….”


손목시계를 굽어본 류기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일단 짐을 풀었다.


그의 방만큼은 그대로였다.


말끔히 정돈된 책상과 책꽂이에 꽂혀있는 모든 책에 먼지 하나 없었다. 어머니의 손길이 빠짐없이 닿은 덕일 것이다.


짐정리를 마친 류기태는 여독에 못 이겨 맨 바닥에 누워 까무룩 잠들었다.


네 시간 후, 류기태는 눈을 떴다.


그의 목 밑으로 얇은 이불이 덮여있었다.


조금은 상쾌해진 몸을 이끌고 방을 나간 류기태는 3년 만에 만난 가족들을 보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오랜 시간동안 묵혀왔던 그리움의 눈물이라기보다 놀람과 미안함이 담긴 눈물이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여인은 늙어있었다.


3년이 아닌 13년의 세월을 건너 마주한 것 같았다.


덜컥 두 눈으로 눈물을 쏟아내는 장남을 본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 서두르던 식사 준비를 뒤로 하고 그를 품에 안았다.


방청소를 하던 류기태의 여동생 기정도 방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왜, 왜? 오빠 왜 울어?”


“그러게 말이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럴까?”


다 큰 아들을 깡마른 품으로 끌어안은 어머니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태는 생전 눈물 한번 보인 적 없는 자식이었다.


그런 자식의 눈물을 직면했을 때는 위로보다 그 이유를 찾으려드는 게 자연스러운 법이다.


본인이 눈물을 보인 이유에 대해서 류기태는 말을 아꼈다.


두 여인도 재차 묻지 않았다.


류기태의 두 여인은 그런 여자들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를 일순간이라도 민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여자들이었다.


류기태는 점심식사를 하며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고.


두 여인은 답했다. 잘 지냈다고.


도저히 잘 지냈을 리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두 여인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렇게 답했다.


너무도 당연한 얼굴로 내뱉는 대답에 류기태는 또 다시 마음이 저려왔다.


“아까……, 아침에는 어디들 갔다 온 거야?” 애써 태연한 얼굴로 류기태가 질문했다.


“엄마랑 일하고 왔지. 뭐 어디 놀러갔다 왔을까봐?”


여동생 기정은 그렇게 장난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동생의 대답을 들은 류기태는 속으로 대답했다.


차라리 놀러갔다 온 거면 좋겠다고. 그러면 조금은 덜 슬퍼했을 거라고.


두 여인을 마주한지 20분도 안 되어, 그들의 일상이 눈에 그려졌다.


일과 일, 일만 가득한 생활이었을 것이다.


“가구들은 어쨌어? TV랑 소파, 부엌식탁, 라디오, 예전에 쓰던 것들 다 없어졌던데?”


“……아, 그거? 버렸지. 너무 낡았잖아.”


역시 멀쩡한 얼굴로 대답하는 여동생을 보며 류기태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불과 3년 만에 TV가 낡을 수 있는 것일까.


조금 낡았다고 해서 멀쩡히 사용하던 부엌식탁을 버릴 수 있을까.


아무리 낡았다한들 국그릇과 밥그릇을 버릴 수 있는 걸까.


이 모든 것들이 버림받을 만큼 낡기에 3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 아닐까.


반면, 3년이라는 시간은 가세가 기울기에는 더없이 충분한 시간이었다.


유학중인 장남의 학비를 마련하기위해 푼돈을 받고 가구와 가재도구들을 팔아버리기에 차고 넘치는 시간인 건 분명했다.


“……얘, 기태야.”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대는 장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는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타지에서 공부하느라 고생했다. 혼자 힘들었지?”


그날, 류기태의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이 꺽꺽 목 놓아 우는 모습을 봤다.


열여덟,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음 한 점 내뱉지 않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울음이란 금덩이보다 귀한 법이다.


그런 귀한 순간을 어미가 돼서 놓칠 리 없다.


그녀는 아들의 모습을 두 눈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담아내고 가슴 속에 품었다.


대학을 졸업한 류기태는 그렇게 한 번 무너졌다.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가족들 앞에서 무너지다니.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어려운 건 처음뿐이었다. 처음만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다시 무너졌다. 속절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가족이 진 빚의 출처가 문제였다.


장남의 부족한 학비는 집안의 낡은 가구를 판다고해서 해결될 액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류기태는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다.


그때 그의 가족을 구원해준 돈은 전국 수백 개 지점을 보유한 탄탄하고 도덕적인 주머니를 가진 은행 출신이 아니었다.


그 돈은 어느 뒷골목, 찌든 담배 냄새가 온 가구에 스며든 좁고 더러운 사무실로부터 나왔다.


그게 문제였다.


악덕하고 비열한, 도덕적인 척하는 주머니. 항시 말로만 고객을 우선시한다는 최악의 채권자.


류기태는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 일해 월급을 받았다.


월급의 90퍼센트를 가족을 위해, 가족이 진 빚을 변제하는데 사용했다. 그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에게 월급은 그야말로 피 같은 돈이었다. 피와 땀을 뚝뚝 흘려가며 일한 대가로 번 돈이었다.


그러나 빚은 피로 배를 채우는 괴물 같았다.


월급 같은 소소한 수혈로 괴물의 뱃속을 배부르게 하기란 불가능했다.


보통의 경우, 빚을 감면해나가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든든한 한편이 되어준다.


게다가 월급이라는 근사한 버팀목이 있는 경우라면 더욱이 그렇다.


월급은 해를 거듭해갈수록 많아지는 게 일반적이다.


반대로, 빚은 적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차근히 갚아나가면 된다.


하루하루 그렇게 흘러오다보면 이자를 감당하기에도 벅찼던 날이 어느 날부터는 원금도 야금야금 깎아먹을 수 있는 날이 찾아오는 법이다.


그러나 류기태의 경우 시간을 등에 업지 못했다. 시간은 같은 편이 아니었다.


괴물은 시간이 흐를수록 몸집을 불려나갔고, 더 많은 피를 요구했다.


류기태는 선택해야했다.


눈앞이 깜깜할 때, 저 앞이 낭떠러지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을 때, 자기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 외길이라는 걸 인지했을 때에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대로 걸어가 떨어질지, 새로운 길을 만들어낼지.


류기태는 직장을 그만두고 회사를 설립했다.


금융투자회사였다.


의외로 사람들은 하버드 출신이라는 그의 근사한 배경에 혹했다. 경제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건만, 그랬다.

그의 이름을 내건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다.


빚을 갚는데 5년이 소요됐다.


만약 그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내지 않은 채로 외길을 내처 달렸다면, 그대로 회사에 소속되어 월급을 받아 빚이라는 괴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살았다면 적어도 15년은 걸렸을 것이다.


빚을 갚고 류기태는 다시 한 번 일어섰다. 그리고 곧바로 넘어졌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그를 넘어트린 원인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빚을 갚고, 집을 구입했다.


서른 중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건 그만의 연약한 생각이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아랫배에서 시작된 통증은 서서히 배 전체로 번져갔다.


동시에 대변을 잘 보지 못했고, 눴다하면 혈변이 나왔다.


급히 병원을 찾았지만, 담당의사는 너무 늦었다고 했다.


직장암의 경우, 수술적 치료, 내시경적 치료, 항암 화학 요법 등 꽤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볼 수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을 시도해보기에도 이미 늦었다고 했다.


이제는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모녀가 고통 받은 시기가 비교적 짧았다는 것이 류기태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직장암이라는 병명을 선고받은 그 순간이 촉매제가 되기라도 하듯, 암은 빠르게 두 여인의 몸을 갉아먹었다.

한 달하고 보름이 막 지났을 무렵, 59세가 된 류기태의 어머니와 25세가 된 여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마친 그 주부터 류기태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유학을 준비하던 시절부터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매주 일요일 오전이면 하늘 높은 곳에 계신다는 누군가를 향해 기도를 올렸었다.


한 주를 마무리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중얼대고 나오면 얼마간 느껴지는 상쾌함에 만족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누군가의 존재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 누군가가 못돼먹은 개새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류기태와 가깝게 지내던 목사는 당연히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힘든 시련과 조우하게 되면 누구든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거라고 했다.


그럴 때면, 그분에게 향하는 발길을 끊을 게 아니라 왜 내게 작금의 시련이 주어졌는지 깊이 고민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전언했다.


나아가서는 누군가의 의도를 사하고 충만한 축복이 전해져오길 마땅히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고 지껄였다.


류기태는 목사의 번호를 삭제했다.


각자에겐 각자의 사연이 있는 법이다.


류기태는 그렇게 혼자가 됐다.




그리고 30년 후, 서울의 2호선 열차 안에서 친구들을 사귄다.


나이가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어찌어찌 그렇게 된다.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 류기태는 각고의 노력을 펼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대화 목록 작성이다.


이는 그의 머릿속에서 그야말로 번쩍! 하고 떠오른 것이다.


별다른 용도도 없이 그저 매일 들고 다니던 수첩에 사람들의 이름과 특징을 적고서는, 하버드를 졸업한 자신만의 남다른 지적인 습관이라고 정성껏 포장한다.


그는 흐뭇한 미소를 열심히 감추며 새로 사귄 친구들의 이름을 적는다.


그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때론 우스꽝스럽게, 때론 치졸하게 대화를 이어간다. 그것이 류기태만의 애정표현 방법이다.


친구를 재밌게, 화나게, 슬프게.


예순다섯이라는 나이에 그는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낸다.


그 어려운 걸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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