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인질목록 3장: 하차
#손준겸
최병기: 열차에 폭탄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다치신 곳은 없나요?
손준겸: 네, 보시다시피 없어요! 광고해도 될 판이에요.
최병기: 아, 여기 작성하신 인적사항을 보니까 지하철 광고업체를 운영 중이시라고…….
손준겸: 네, 조그맣게 운영하고 있어요. 뭐, 대단한 수준은 아닙니다.
최병기: 예……, 정말 자그마한 업체네요. 직원이 총……, 1명. 그러니까 사장님이네요?
손준겸: 네! 직원과 사장을 겸하고 있는, 손준겸입니다.
최병기: ……예, 그렇군요. 슬슬 지하철과 관련된 이야기로 넘어가도 될까요?
손준겸: 여태 얘기하고 있지 않았나요?
최병기: 네? 언제……? 아! 지하철 광고가 지하철과 관련된 이야기인 건 맞죠. 그러니까 제 말은 폭탄에 관한 얘기요.
손준겸: 어떤 게 궁금하실까요? 다 말씀드릴게요.
최병기: 먼저, 가장 중요한 부분부터 시작하죠. 폭탄을 어떤 식으로 처리했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손준겸: 네, 물론이죠! 폭탄……. 역시 그 폭탄이 문제였어요. 살면서 폭탄을 본 적이 있어야 말이죠. 제가 업무 특성상 여러 물건을 다루게 되는데 폭탄은 또 처음이었어요.
최병기: 아무래도 그렇겠죠? 폭탄을 광고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손준겸: 어쨌든 폭탄이 들어있던 가방을 열차 밖으로 휙 던졌어요. 그게 끝이죠. 폭탄에 방수기능이 없어서 다행이었죠. 이런 걸 보면 우리한테 한강은 정말 중요한 존재에요. 그렇지 않나요?
최병기: 한강 중요하죠. ……근데 그게 끝인가요? 이야기를 너무 과감하게 생략하신 거 같은데요.
손준겸: 광고쟁이로 살아남으려면 과감함은 필수죠! 과감함과 파격! 이게 가장 중요해요. 그리고 폭탄 버리는 데 뭐가 더 필요한가요? 아, 물론 폐기물 스티커 부착하는 거는 빼고요. 구청까지 갈 시간은 없었어요. 저 같은 영업직은 또 시간이 그렇게 중요하거든요.
하차 30분 전, 조종실에 있던 김선범에게까지 계획을 무사히 전달한 류기태가 승객들에게 호기롭게 외친다.
“자, 시작해봅시다. 각자 주어진 일 까먹지 말고.”
대답은 나오지 않지만 모두들 제각기 움직인다.
류기태의 지시에 따라 일을 수행하는데,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치고 손발이 척척 맞는다.
#고재성
조종실과 열차 곳곳을 뒤져봤지만 신문지 한 장 찾지 못한 고재성은 결국 맨손으로 본인만의 화장실로 간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뒤처리를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퍽 난감하다.
열차 마지막 칸에 들어선 그는 긴 한숨을 내쉰다.
유치원생 시절 할머니 댁 거실에 지린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살다 살다 내가 맨바닥에 똥을 지릴 줄이야.”
고재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한다.
평소 뚱한 얼굴로 반복적인 진료에만 힘써왔던 그로서는 무척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개인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답게 환자들이나 함께 일하는 간호사들에게 권위적인 태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중한 모습만을 선보인 감이 있다.
농담은커녕 같이 제대로 된 식사 한 번 한 적 없는 재미없고 다가갈 틈이라고는 내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병원사람들은 내내 생각해왔을 것이다.
“……이야, 똥이라니. 진짜 똥이야. 어이가 없네.”
연신 혼자 중얼거리며 그는 허리를 숙인다.
비교적 낮은 실내온도와 건강한 소화기관 덕에 악취가 풍기진 않는다.
그는 지하철에게, 또 이 끔찍한 장면을 목격할 사람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
적당한 청소도구만 있었어도 말끔히 정리했을 거라고 나름 핑계를 대본다.
왠지 자꾸 웃음이 나온다.
똥이라는 단어에 배꼽이 떨어져라 웃던 어린 시절이 불현듯 떠오른다.
#류기태, 정성도
“키가 한 190되나?”
류기태가 혼자 우두커니 서있는 정성도를 보며 묻는다.
그의 질문에 정성도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그리곤 누가 봐도 자신감에 찬 얼굴로 대답한다.
“189, 요.”
“키가 엄청 크네.”
“감사, 합니다.”
류기태는 칭찬이 아니었다는 말을 낼름 삼킨다.
그는 어디까지나 친절한 사람이었고, 스스로가 몹시 친절하다고 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꽤 어린 시절부터 류기태는 키가 멀대 같이 큰 사람들의 지능을 의심해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심장이 저 높은 곳에 위치한 뇌까지 피를 공급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여태 그가 대면해온 장신들의 지적수준을 토대로 판단해본다면, 그가 그런 편견을 가지는 것도 영 무리는 아니다.
반면, 지면으로부터 165센티미터도 안 되는 곳에 정수리를 가지고 있는 류기태는 심장이 빠릿빠릿하게 몸 구석구석 피를 내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이렇게 묻는다.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지적수준을 가늠해보고자 던진 질문이다.
“아침은 뭐 먹었나?”
“안, 먹었어요.”
정성도는 성인이 된 이래로 아침식사를 한 적이 없다.
“원래, 아침을, 안, 먹어요.”
“그래?”
이번에도 역시 본인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한 류기태는 몰래 탄식을 뱉는다.
생략할 게 따로 있지 아침식사를 안 하다니.
하루하루 부지런히 멍청해지기로 마음먹은 게 분명하다.
“난 항상 챙겨먹고 나와. 잡곡밥에 국, 반찬 서너 가지. 마지막으로 사과까지. 그렇게 먹고 나오면 오전 내내 아주 든든해.”
“저도, 어제, 사과, 먹었어요. 잠들기, 전에.”
피가 뇌에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배달사고가 난 게 분명하다고 류기태는 결론짓는다.
사과를 자기 전에 먹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는 이쯤에서 대화를 끝내기로 결심한다.
“저기 가서 석기 청년 하는 거 도와주면 되겠다.”
정성도는 아무도 모르게 웃는다.
그의 미소는 언제나 가려져있다.
#홍지선, 이한성
홍지선과 이한성은 칼에 묻은 지문을 꼼꼼히 지우는 역할을 맡게 된다.
진짜 흉기로 사용될 뻔했던 물건이니 중요한 작업이다.
먼저 홍지선이 외출 때마다 챙겨 다니는 손수건으로 말끔히 지문을 지운 뒤, 이한성에게 건네준다.
이한성은 칼을 가지런히 정리해 가죽가방에 넣는다.
본래 이한성의 물건이니 주인의 지문은 제아무리 많이 묻어있다 한들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다.
“저……, 뭐라고 불러야 될까? ……총각?” 한참을 고민하던 홍지선이 입을 연다.
“네? 아, 편하실 대로 불러주세요. 총각도 좋아요. 아까 들으셨다시피 결혼 안 했거든요.”
이한성은 본인의 긴 연애사를 처음 본 사람들에게 줄줄이 읊어댄 뒤라 약간 민망한 상태다.
한 명씩 돌아가며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나 사연이 있으면 터놓고 말해보라는 류기태의 말에 저도 모르게 줄줄줄 내뱉고 말았다.
“그래요. 한성 총각. 이 아줌마가 참견 하나만 해도 될까?”
자녀 없이 오직 남편과 단둘이 지내온 중년 여성 특유의 조심스러움이 배어있는 몸짓이다.
젊은 사람들을 대하는 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
“참견……이라면? 어떤 걸?”
“전에 만났던 여자친구한테, 먼저 사과해요.”
홍지선은 더없이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참견을 넘어 지시처럼 들린다.
홍지선의 말에 이한성이 울컥하며 답한다.
“……제가 왜요? 버림받은 사람은 저에요. 상처받은 사람도 저고. 잘못도 걔가 했잖아요. 아까 전부 설명―”
홍지선이 천천히 손을 들어 이한성의 말을 끊는다.
“사과하고, 사과 받아요. 사람은…… 그렇게 정리하는 거예요.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정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어색하지만 그래서 더욱 진심으로 보이는 미소 하나가 홍지선의 입가에 걸려있다.
“그리고 총각은 버림받은 게 아니에요. 그냥 헤어진 거지. 물론, 상처는 받았겠죠. 그런데 상처는 일방적으로 주기만 할 수 없어요. 오랜 시간 함께한 사이일수록 그게 잘 안 돼요. 사는 게 다 그렇더라고요? 분명 여자친구도 한성 총각한테 상처받았을 거예요. 그러면 또 총각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겠죠. 내 상처가 더 크고 깊다. 절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다.”
홍지선이 주먹을 움켜쥔다.
“…….”
이한성은 몇 번의 헛기침으로 상처를 회복하려는 사람처럼 목을 가다듬는다.
홍지선의 한쪽 손이 이한성의 어깨를 토닥인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신기한 게 하나 있는데, 상처라고해서 전부 아프기만 한 것도 아니더라고요? 총각은 요리하는 사람이니까 잘 알겠네요. 손에 상처 많지 않아요?”
이한성이 고개를 끄덕인다.
구태여 손을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자잘한 상처부터 화상 흉터까지 셀 수 없이 많다.
“그 상처를 가만히 보고 있거나, 생각하면 그때 당시 아팠던 기억만 떠오르나요? 분명 그렇지만은 않을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상처가 나던가요? 그런 적은 거의 없을 걸요?”
이한성이 두 손등을 쫙 펴고 상처를 살핀다.
처음 요리를 하겠다고 나섰던 어린 시절의 당당한 모습과 무모하게 잠을 줄여가며 연습한 칼질의 흔적, 뜨거운 물과 기름에 고통 받던 많은 시간이 새겨져있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역사가 깃들어있는 듯하다.
이한성은 문득 여자친구와 함께 했던 유학시절을 떠올린다.
빠듯했지만 하루하루 진귀한 여행을 만끽하는 심정으로 지냈다.
이한성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만다.
홍지선도 온화하게 웃는다.
이한성의 얼굴에도 홍지선과 같은 미소가 생겨난다.
그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인다.
#채소윤, 선하나, 류기태
“저, 학생.”
눈치란 눈치는 다 보고 한참을 망설이던 채소윤이 드디어 입을 연다.
그녀 옆에 앉아 더플백 안쪽에 붙어있는 꾸리의 털을 하나하나 떼고 있던 선하나가 고개를 돌린다.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고민을 해본 뒤, 채소윤이 중얼거린다.
“아까 했던 말……, 진짜야?”
“했던 말이요? 뭐요?”
선하나는 지하철에 올라탄 뒤로 자기가 했던 수많은 말들 중 어떤 걸 의미하는 거냐고 되묻는다.
하도 많아서 전혀 감이 안 잡힌단다.
“……그, 집안사정 어쩌고 한 거.”
“아아, 아빠는 2년 전에 집 나가고, 엄마가 종일 설거지해서 번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거요? 저랑 남동생 2명까지, 총 네 식구가.”
선하나는 자신의 가정형편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오히려 그걸 듣는 채소윤이 불안하고 민망해하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런 채소윤의 감정을 알아챈 선하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이미 자기 손을 떠난 일에 미련 같은 건 없다는 얼굴이다.
“그럼요, 진짜죠. 제가 오늘 처음 본 사람들한테 거짓말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러겠어요.”
채소윤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어린 소녀를 향해 말한다.
“저어, 그럼 공부 좀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말도 진짜겠네? 아르바이트에 시간 안 뺏기고.”
선하나는 냉큼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어림도 없는 생각이라며 고개를 좌우로 휙휙 돌리고는 자조적으로 피식댄다.
“어쩔 수 없어요. 동생들이 내년부터는 초등학교 들어가거든요. 쌍둥이들인데, 남자애들이라 워낙에 잘 먹어요. 저도 그래서 편의점 알바 하는 거예요. 가끔 유통기한 지난 것들 집에 가져갈 수 있거든요.”
“공부……, 내가 가르쳐줄까?”
채소윤의 뺨이 발그레 달아오른다.
학습지도가 아니라 교제 제안이라도 하는 표정이다.
“물론, 너만 괜찮다면. 나도 뭐, 퇴근하고 나면 할 것도 없고.”
“……쌤, 그러다 진짜 결혼 못하는 거 아니에요? 퇴근하고 남자를 만나야죠. 왜 제 공부를 봐줘요.” 선하나가 낄낄 웃는다.
“……남자는 내가 알아서 만나.”
“그러지 말고, 저기 의사 아저씨랑 잘해보라니까요? 4살 차이면 괜찮은 거 아니에요?”
“이상한 소리하지 마라.”
“아아, 똥 싸서 그래요? 급하면 아무데나 쌀 수도 있죠! 선생님이란 사람이 그런 걸로 섣불리 사람 판단하고 그러면 안 돼요!”
거의 울먹이다시피 웃어대는 선하나가 목소리를 낮춘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아무데나 싼 것도 아니잖아요? 나름 배려한다고 마지막 칸까지 가서 쌌잖아요.”
“똥 얘기 좀 그만해! 가만 보면 기태아저씨랑 똑같아. ……그리고 나는.” 채소윤이 피식 웃는다. “연상 싫어해. 연하가 좋아.”
“……아아아! 그게 문제였구나!”
선하나가 채소윤의 어깨를 철썩 때린다.
사이좋은 이모와 조카처럼 보인다.
“그래서, 내가 공부 가르쳐주는 거 싫다고, 좋다고?”
채소윤의 표정이 일순 진지해진다.
“저야 감사하죠! 근데 쌤 퇴근할 시간에 저는 편의점에 있는데요? 과외를 편의점에서 해요? 제가 일하는 시간대에는 손님이 많아서 정신없어요. 아무래도 힘들 거 같은데.”
“알바는 그만둬. 그래도 돼. 생활비 지원해줄 거야.”
“……쌤, 연하 좋아한다는 얘기가 혹시…….”
“또, 또! 또! 이상한 소리! 생활비 지원은 내가 아니라 기태아저씨가 해주시는 거야.”
“엥? 왜요? 왜 기태할아버지…….”
선하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왜라고 물을 시간에 공부나 하래.”
채소윤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할아버지 말씀이, 자기가 돈이 좀 많대. 그냥 그렇게 알고 있으래. 돈 많은 할아버지는 원래 오지랖이 넓은 거래.”
류기태가 짐짓 모른 척하며 채소윤과 선하나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지금처럼 가족이 그리웠던 적이 없다.
특히 세상에서 첫 번째로 사랑하는 여자와 두 번째로 사랑한 여자.
그는 그 두 여자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누구보다 기뻐했을 거라 확신한다.
방긋이 웃었을 거라고 몇 번이고 확신한다.
#장석기, 정성도
정성도가 장석기가 있는 곳으로 수줍게 다가간다.
“어, 성도. 기태아저씨가 너한테도 일 시켰어?”
장석기 말한다.
정성도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근데 별 거 없는데. 일이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장석기가 꾸리의 등을 쓰다듬는다.
류기태에게 지시받은 일은 다름 아닌 꾸리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아저씨가 하도 진지해서 긴장했는데. 막상 보면 어려운 것도 아니었어.”
장석기의 손을 피해 정성도는 꾸리의 얼굴을 부드럽게 긁어준다.
그런 친구를 보며 장석기가 한참동안 말을 고른 뒤 입을 연다.
“……저기, 성도야 그럼 너는 여기서 나가게 되면 다시 조직으로 가는 건가? 그, 사마천? 거기로?”
이번에도 정성도는 고개만 위아래로 흔든다.
“……그래? 그렇지, 거기 사람들은 너한테 가족이나 다름없으니까. 가족들이랑 지내는 게 맞지.”
장석기는 아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동시에 안타까움이 물씬 풍긴다.
정성도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결코 평범한 생활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든다.
더군다나 가족이라는 관계에 깊은 결핍을 품고 있는 친구에게 조직은 직장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맞아, 가족. 내, 가족, 이야.”
정성도가 순순히 인정한다.
동시에 각자 어딘가에 흩어져있을 가족을 떠올린다. 웃음이 나온다.
동시에 아버지 생각이 난다. 절로 눈이 찡그려진다.
‘정성도’라는 이 남자의 모든 것은 어릴 적,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고등학생 시절에 완성되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그의 큰 키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움푹 들어간 눈두덩과 툭 튀어나온 이마 또한 아버지의 것을 닮았다.
삐뚤빼뚤하게 자리 잡은 콧등도, 다부진 턱도, 얇은 머리칼도 아버지에게 받았다.
그중 아버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바로 정신적인 부분이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관념과 사상가치, 논리적 판단 체계, 나아가 인생관까지 정성도에게로 여과 없이 스며들었다.
그런 아버지의 정신은 특이하게도 정성도의 언어 체계를 통째로 바꿔버리고 말았다.
‘자고로 남자는 말이 적어야 하고, 말을 하더라도 천천히 또박또박 본인 의견을 피력할 줄 알아야 한다’ 라고 말하는, 남녀구분이 필요치 않은 미덕을 남자에게만 국한시키는 편협한 시각을 가졌던 것이다.
또한 ‘남자는 취향에 있어서도 남자다워야 되는 법이다.
남자가 빨간색, 노란색, 분홍색 이런 색깔 좋아하는 거, 그거만큼 꼴사나운 게 없어. 그리고 또, 남자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돼.
내가 가장 이해 못하는 게 바로 음악이나 미술 같은 걸로 돈 버는 족속들이다.
악기나 뚱땅거리고 붓으로 대충 휘갈기는 걸로 돈을 벌어? 세상에 그것들만큼 한심한 사기꾼도 없다’ 하며 시대착오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정성도는 아버지의 말씀을 아주 잘 듣는, 그야말로 아버지가 바라마지않던 모범적인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어긋난 발상과 생각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한 발언들은 규칙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가 정한 규칙을 어기는 아들은 모범적이지 못하다.
정성도는 규칙을 지키지 않고는 도저히 살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았다. 아버지가 정해놓은 규칙을 따랐다. 그리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정성도는 혼자 남았다.
정성도라는 인간을 만들어놓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정성도가 아버지에게 벗어나는데 소요된 시간은 아주 길었다.
자그마치 10년이 걸렸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와 단둘이 지낸 기간만큼 걸렸으니 딱 알맞은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10년, 정성도는 비로소 아들이 아니게 되었다.
그저 정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이 된 것이다.
아버지를 잊는데 가장 필요한 건 아버지가 심어준 것들을 뽑아버리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취향에 손댔다.
빨강과 노랑, 분홍색 같은 색깔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중 노랑이 그의 마음에 들어왔다.
그는 노란색이 다 같은 이름의 노란색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름이 있듯 색깔에게도 고유한 이름이 있었다.
다음으로는 음악에 취향을 붙였다. 음악은 아버지를 잊는데도, 다시금 떠올리는데도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신비로운 장치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미술을 공부했다.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됐다. 붓으로 대충 휘갈기는 걸로 돈을 벌기란, 세상 어떤 일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그간의 노력에도 정성도의 언어 습관만큼은 고쳐지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고집해오던 어투는 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정성도는 아버지를 완전히 떼어내는데 실패했다.
전부 잊지는 못했다.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면 아버지 생각이 났다.
“가족……, 중요하지.”
장석기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가끔은 얼굴 보고 살자? 한성이랑 셋이 같이 보면 되겠네.”
정성도가 아주 좋다고 대답한다.
“사무실로, 놀러와. 가족, 소개, 시켜, 줄게.”
자기가 가장 재밌게 본 영화가 다름 아닌 ‘신세계’인지라, 그건 고민 좀 해봐야 할 거 같다며 장석기가 껄껄껄 웃는다.
그렇게 정성도에게 가족 같은 친구가 생긴다.
친구란 어디서든 생길 수 있다.
원래 그렇다.
고재성이 근심과 걱정을 해소한 흔적을 그대로 남겨둔 채 1224호 칸으로 복귀하자 곳곳에서 아우성이 터진다.
몇몇―홍지선, 채소윤―은 똥을 대신 싸기라도 한 듯 부끄러워했고, 또 몇몇―류기태, 이한성, 장석기, 손준겸, 선하나―은 노골적으로 비난을 퍼붓는다.
주로 여기까지 냄새가 들어온 것 같다는 의견과 지하철을 사전에 설계된 용도로 적절히 사용하지 않고 개인적인 취향에 맞춰 변기로 사용하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냐는 맹비난이다.
정성도는 마스크를 한껏 얼굴에 밀착시킨다.
꾸리는 언제든지 그 현장으로 뛰쳐나갈 기세다.
그런 꾸리를 보며 류기태는 호기심이 풍부한 것은 좋지만, 식분은 참아달라며 진정시킨다.
집에 가면 더 맛있는 게 많단다.
그때, 말없는 소년이 슬그머니 류기태에게 다가가 언제쯤 하면 되겠느냐고 묻는다.
그 말에 류기태가 조종실 문을 톡톡 두드린다.
그러자 열차의 속력이 줄어든다.
마침 열차는 당산철교로 진입해 한강 위를 내달리고 있다.
다시 류기태가 조종실 문을 두드린다. 열차의 오른편 출입문이 열린다.
“우와―”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온다.
세차게 들어오는 상쾌한 강바람이 열차 내 탁한 공기를 밀어낸다.
새까만 외줄을 타듯 열차가 철교 위를 내질러 나아간다.
“자, 지금이야.”
류기태의 지시에 소년은 더플백을 똘똘 뭉친 다음, 오른손에 쥐고 출입문 밖으로 있는 힘껏 던진다.
숫돌이 들어있는 더플백은 저 멀리 날아가 한참을 자유낙하한 뒤, 무사히 한강 수면 위로 떨어진다.
“숫돌 비싼 거 아니야?”
장석기가 이한성에게 묻는다.
숫돌은 이한성이 칼과 함께 지인에게 넘겨주려고 챙겨온 것이다.
“하나 또 사면 돼. 그나저나 숫돌 사용하기 전에 원래 물에 담가놓는 건데, 저거 줍는 사람은 바로 써도 되겠다.”
이한성이 일말의 아쉬움도 없는 개운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자, 폭탄제거 완료.”
류기태가 쾌변이라도 한 것처럼 속이 다 시원하다는 얼굴로 너털웃음을 짓는다.
전깃줄에 몸을 맡긴 참새들처럼 줄줄이 객실 바닥에 앉은 채로 활짝 열린 열차 출입문 밖을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승객들이 하나둘씩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다.
열차가 철교를 지나자 다시 출입문이 닫힌다.
“이제 마지막이죠?”
홍지선이 소회를 밝히듯 웅얼거린다.
“다들 저 따라오세요.”
손준겸이 앞장서서 일행을 이끈다.
열차 다음 칸으로 이동한다.
가장 중요한 단계이니만큼 김선범도 합류한다.
“이거야?”
류기태가 손준겸이 가리키고 있는 벽면을 응시한다.
지하철 광고판이다. 꿈과 열정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곳, 서울대학교에 지원하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서울대도 광고 같은 걸해요?”
채소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처음 봤어요.”
“그러게요. 사이버 대학 광고도 아니네요.” 장석기가 시인한다.
“서울대가 뭐 별거야? 그냥 대학교 중 하나지, 광고 좀 했다고 뭔 놈의 유난은……. 요새 신입생들이 많이 없나보지 뭐.” 류기태는 금세 투덜댄다.
“그러니까요! 코앞에 하버드 다녔던 사람이 있는데, 서울대는 아무것도 아니죠!”
대학입시의 치열함을 알기에는 턱없이 어린 선하나가 류기태의 장단을 맞춰준다.
“서울대가 명문이라는 거, 그거 전부 관성이고 타성이야. 옛날부터 그런 이미지였으니까 사람들이 무턱대고 그렇게 판단하는 거라고. 막상 까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류기태가 신나서 망언을 한다.
“그런 감이 있긴 해요. 맞다, 재성 씨.”
손준겸이 류기태의 말에 대충 동의하고는 대뜸 고재성을 부른다.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재성 씨는 어디 의대 나왔어?”
“서울대요.”
고재성의 간결하게 대답한다. 불쾌한 기미는 전혀 없다.
이제는 아주 익숙하다는 얼굴이다.
숨 쉬듯 내뱉는 무례함에 어느새 면역이 생겨버린다.
“……아, 서울대.”
선하나가 민망한 듯 속삭인다.
“의대는 또 그 무게감이 다르죠.”
“오호, 의사 양반 서울대 나왔구나? 서울대도 제법 괜찮은 학교지.”
류기태가 고재성에게 뒤늦은 관심을 보인다.
자기처럼 국제적인 위상을 자랑하는 인재까지는 아니어도 그 정도면 얼추 비슷한 수준이겠거니 멋대로 생각한다.
손준겸이 머쓱하게 웃으며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은다.
“……자자, 영감님 지시대로 찾은 건데, 어떻게들 잘 기억할 수 있겠죠?”
“광고 내용보다 중요한 건 여기 나오는 사람이야.”
류기태가 광고에 등장하는 남자를 가리킨다.
“자, 각자 이 남자 얼굴이랑 옷차림 잘 기억해. 이 사람이 오늘 폭탄 테러범이야. 깔끔하게 잘생겼네. 역시 사람 얼굴 보고 판단하면 안 돼, 그치?”
그렇게 인질들의 만장일치로 이번 사건의 범인이 확정된다.
경찰 측은 인질들의 증언을 취합하여 몽타주를 제작하고 사건발생 시간을 전후로 해서 역 근처 모든 CCTV 영상을 확인해보지만, 예상 용의자의 발끝도 찾지 못한다.
서울대학교 광고에 등장하는 남성은 현재 부산에 거주 중인 프리랜서 모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