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원래 그렇다
사랑은 위기에 빠진 지구도 구할 수 있어
늦은 시간,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마친 선하나가 귀가한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하기위해 편의점으로 부랴부랴 달려갔던 기억은 잊혀진지 오래다.
집은 고요하다. 어린 동생들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방에 들어간다.
이불에 감춰진 동생들의 발을 밟지 않게 조심하며 방을 가로지른 그녀는 책상에서 영어교재를 꺼내든다.
내일 있을 영어과외 전에 예습을 해둬야 한다.
예습을 철저히 하지 않은 날이면 선생님이 버럭 화를 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격이 더러우니 아직 남자친구가 없는 게 분명하다고 선하나는 혼자 키득댄다.
방을 빠져나와 부엌 식탁에 교재를 내려놓는다.
식탁에는 빵과 우유가 있다.
화장실로 가려던 선하나는 안방으로 간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바닥에 이불을 깔고 쉬고 있던 엄마가 벌떡 몸을 일으킨다.
“어? 하나야, 왜? 뭐 필요한 거 있니?”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엄마를 보자 선하나는 오히려 당황한다.
“어? 그건 아니고…….”
어색하지만 하려던 말을 끝까지 해본다.
“저기, 엄마, 간식 고마워요. ……사랑, 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소녀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고 곧장 방문을 닫는다.
엄마는 멍하니 아이가 있던 자리를 쳐다본다.
그렇게 5분이 흐른다.
부모들은 그 말에 당해낼 재간이 없다.
특히 사춘기라는 폭풍 속에 허우적대고 있는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 말은 위기에 빠진 지구도 구할 수 있다.
방금 한 소녀가 가족을 구했다.
“식당 예약이 몇 시였지?”
도상준은 그 말을 시작으로 일장연설을 늘어놨는데 간단히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나는 매우 배가 고파요’ 라는 의미다.
“나도 모르지.”
옆에 있던 도상길이 당연하게 대답한다.
도상길, 도상준 형제가 나란히 갖춰 입은 정장이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들이 품고 있는 비대한 뱃살을 감싸기에는 옷감이 턱없이 부족하다.
셔츠 가운데 정렬해있는 단추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동료들을 지켜내는 중이다.
낙오자가 발생하는 순간, 각자가 추가적으로 감당해야할 부담을 떠올린다.
단추들의 눈물겨운 협동에도 불구하고 잔혹하기 그지없는 도상길 도상준 형제는 안무를 맞춰온 듯 동시에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기지개를 켠다.
그 순간, 틱― 하는 단추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저만치 떨어진 땅바닥에 단추 2개가 나뒹군다. 도상길과 도상준은 삐죽이 고개를 내민 서로의 뱃살과 단추가 머물렀던 자리를 보며 깔깔 웃는다.
살 좀 빼라며 서로의 게으름과 식습관을 질책한다.
“아이, 형! 살 좀 빼! 머리만 길면 임산부라고 착각하겠어. 머리카락이 자랄 리는 없겠지만.”
“그러는 넌? 예정일이 언젠데? 쌍둥이지?”
민머리 형제가 좋다고 웃으며 사무실을 나선다.
지정석에 주차되어 있는 고급 세단 운전석에 앉아있던 이선진 대리가 두 상사를 향해 손을 흔든다.
“식당에 전화해서 음식 미리 주문해놓을까요?”
“야, 막내야. 식당 예약 몇 시라고 했더라?”
조광필이 큰소리로 묻는다. 그다지 넓지 않은 사무실 면적을 고려했을 때 다소 쓸데없는 고성이다.
큰형님의 질문에 몸서리치며 놀란 문지성이 옆에 앉아있던 한재천의 어깨를 건드린다.
“형님, 몇 시였죠?”
“형님,한시반입니다!”
한재천이 대신 대답한다.
그러자 문지성이 투덜댄다.
“아, 왜 형님이 대답해요.”
그리고는 방금 형님의 대답 때문에 본인의 업무평가에 적신호가 떨어졌다며 난리법석을 떤다.
정신 사납게 떠드는 두 사람 옆에서 정성도는 눈을 감고 음악에 집중한다.
새로 구입한 헤드폰―이전에 사용하던 헤드폰은 음악을 하는 친구에게 선물했다―에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없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가 직접 선택한 제품이다.
더 이상 정성도에게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는 소음이 아니다.
같은 해 겨울, 장석기는 모 유명 랩 경연 프로그램에 지원한다.
여섯 번째 도전이다. 지난 다섯 번의 도전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어떤 결과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어떤 수확도 얻지 못했다.
경연에 참가하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도전한다. 그의 몸이 원하기 때문이다.
심장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심장은 말을 한다.
그런 현상은 대개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사람에게 일어난다.
장석기는 올해도 심장의 말을 귀담아듣고 경연장으로 향한다.
경연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압도된다.
꿈이 이곳에 있다. 열정이 이곳에 있다. 희망이 이곳에 있다.
기나긴 대기시간 끝에 그의 차례가 된다.
장석기가 눈앞에 서있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넨다.
이 남자는 꿈을 이룬 자다. 꿈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불과 세 걸음 떨어진 곳에 서있는 이 남자는 증명한 사람이다.
“네, 들어볼게요.”
꿈에 살고 증명해낸 사람이 말한다.
기필코 무언가를 찾아내겠다는 의지가 담긴 눈을 하고 있다.
장석기는 그 맹렬한 눈빛에 안심한다.
“시작하겠습니다.”
장석기가 성대를 가다듬고 더운 숨을 길게 내쉰다.
그의 입에서 가사가 흘러나온다. 그의 심장이 말한다. 꿈을 뱉는다.
그간 키워온 꿈을 전한다.
지새온 밤과 마이크에 튀긴 침을, 방음부스 안에서 흘려보낸 시간을 증명한다.
동시에 지인들에게 받아온 은근한 멸시와 걱정의 탈을 쓴 비난, 가족들에게 받은 의심의 눈초리를 묵살한다.
준비한 것들을 모두 쏟아낸 장석기는 다시 허리를 숙여 눈앞의 남자에게 인사한다.
합격과 불합격을 목전에 둔 지금 이 순간을 장석기는 기꺼이 사랑한다.
심장이 펄떡 뛴다. 수시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무대 기대할게요.”
곳곳에서 작은 박수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촤르륵― 하는 금속음이 들려온다.
장석기는 합격을 의미하는 목걸이를 손에 쥔다.
차갑다. 금속 특유의 서늘한 감촉이 전해져온다.
“…….”
장석기는 말없이 제자리에 우뚝 서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적절한 다음 행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에겐 처음 벌어진 일이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찾아온 순간이다.
난생 처음 꿈의 조각을 들여다본 순간은 평생 기억되는 법이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꿈이 존재함을,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줄 알았던 꿈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그 원대한 꿈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 장석기의 손에 들려있다.
기회가, 터무니없이 작긴 하지만 어찌됐든 기회가, 꿈꾸는 모든 이가 바라던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 기회를 장석기가 놓칠 리 없다.
차근히 준비한 그는 기회를 꽉 움켜쥔다.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더없이 적절한 순간이다.
적절한 사람이 적절한 순간에 부여잡은 적절한 기회.
그 순간, 사람은 꿈을 이룬다.
그로부터 3주라는 시간이 흐른다.
아쉽게도 장석기는 랩 경연 프로그램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가 탈락한 순간, 남은 참가자들과 작별의 악수를 나눌 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수고하라는 인사를 열 번도 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적은 수의 참가자만이 남아있다.
지난 3주간 장석기는 천국에서 지낸 기분이었다.
천국은 구름 위가 아닌 무대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닫는다.
사람들이, 그것도 생전 처음 본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두 손을 내세워 응원을 보낸다. 그의 이름을 연호하고 환호한다.
그의 행보를 격려하고 성공적인 음악활동을 기원한다.
경연장소를 빠져나온 장석기는 두 손을 내려다본다.
무대의 여운이 미약하게나마 살아 숨 쉰다.
기분 좋은 긴장감에 휩싸인 듯 파르르 떠는 손을 두 눈에 담아낸다.
꿈의 조각이 한가득 차있다. 두 눈을 감는다.
이제 잠을 자지 않아도 꿈과 만날 수 있다.
다시 눈을 뜬다.
두 눈을 똑바로 뜬 채로 꿈을 꾸고 마주할 수 있다.
오전 6시, 이한성은 재료 준비에 열중하고 있다.
자그마한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며칠 전부터 화제에 오른 힙합 가요가 흘러나오고 있다.
아티스트 소개란에 익숙한 이름이 보인다.
이한성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하며 결과론에 입각해 의견을 내세우는 사람처럼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난 김에 영업 준비를 마치면 연락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올해 봄에 새로 사귄 친구다.
그것도 지하철에서 우연한 기회로 피치 못할 사건에 함께 연루되어 생뚱맞게 알게 된 친구다.
단단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를 가졌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눈빛을 한 친구였다.
정말 하나마나한 얘기지만, 정말 그 누구도 할 수 있는 뻔뻔한 말이지만, 이한성은 그 친구가 잘될 줄 예감하고 있었다며 다시 한 번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 눈빛을 한 사람이 꿈을 만나기 위해 떠났다는데 어떤 사람이 외면할 수 있겠는가.
꿈을 만나는 것. 그것은 삶의 이유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그 이유를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 사이에는 결코 메울 수 없는 틈이 있다.
친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꿈과 마주했다는 사실이 이한성은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그와 동시에 진리나 다름없는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만 애써 지운다.
환희에 뒤덮여있을 친구를 끄집어내서 진실을 말해줄 만큼 이한성은 매정한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 진실과 무조건 마주칠 거라고 섣불리 생각하는 건 기우일지 모른다.
이 세상에는 분명 평생토록 꿈과 단짝으로 지내는 사람도 있다. 적지 않다.
기껏 만난 꿈에게 외면 받는 것. 그건 이 세상 어떤 것보다 고통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어렵사리 만난 꿈이 평생 옆에 있을 거라고, 변치 않을 거라고 여기는 것이 외려 자만일지 모른다.
인간은 자만에 빠지기 쉬운 동물이다.
이한성 또한 자만에 빠지고 말았다. 기껏 만나 친구가 된 꿈과 소원해졌다.
소원하다 못해 버림받았다. 20대를 다 바친 가게를 정리했을 때야 비로소 그는 그 진리를 알아챘다.
노래가 끝나고 다음 곡이 재생된다.
움츠려있던 어깨를 쭉 펴고 이한성은 영업 준비를 이어간다.
단단한 도마 위로 날렵한 칼날이 춤춘다.
그가 쥐고 있는 칼자루에는 그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다.
[LEE]
그리운 사람에게서 받은 선물이다.
비록 꿈에게 버림받았지만, 다시 못 만날 것도 없다.
10년 전 그가 했던 것처럼 차곡차곡 계단을 오르면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해봤으니 더 쉬울 지도 모를 일이다.
꿈이 저 앞에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그 존재를 의심하느라 기운을 소진할 필요도 없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좇고 있다는 막연한 피로감에 지칠 것도 없다.
그저 한 걸음, 또 한 걸음 신명나게 걸어가면 될 일이다.
꿈은 믿는 사람 눈에만 보인다.
믿는 사람만이 만날 수 있다.
원래 그렇다.
“저어, 어르신, 강아지는 밖에 두고 오셔야 돼요.”
간호사의 난처한 목소리에 진료실에 있던 고재성이 문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그러다 이 놈이 삐지기라도 하면! 처자가 책임질 건가?”
토라진 누군가를 상대하느라 고생깨나 해본 사람처럼 류기태가 버럭 호통을 친다.
항문질환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내지를 수 없을 정도로 큰소리다.
꾸리는 늘름한 자태로 매끈한 바닥에 엎드려있다.
서늘한 대리석에 기분이 꽤 좋아 보인다.
단번에 류기태를 알아본 고재성이 사태를 수습한다.
“아, 저, 김 간호사님? 괜찮습니다. 바로 진료실로 안내해드리세요.”
병원 원장의 등장에 언제 그랬냐는 듯 치켜 올라간 류기태의 눈썹이 제자리를 찾는다. 그답지 않게 웃음을 머금고 있다.
“오! 고 원장! 오랜만이야? 나 기억하지? 이 놈도 기억하고? 이제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아. 이 놈이 자네보다 훨씬 똑똑해. 이 놈은 화장실에서만 똥을 싸거든! 물론 진짜 화장실에서!”
“……일단 들어오세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병원에서 가장 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이제 똥은 가릴 줄 알지?”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즐겁다는 듯이 류기태는 그야말로 활짝 웃는다.
“그런 소리하실 거면 가세요!”
“뭐야, 아직 바지도 안 내렸는데 똥구멍부터 열라는 거야? 그럼 안 되지.”
주인의 말에 동의하듯 꾸리가 멍, 하고 짖는다.
“그나저나, 병원에 환자가 너무 없는데……. 혹시 소문이라도 난 거 아니야!? 여기 원장이 아무데서나 똥 눈다고!?”
“……영감님만 조용히 하시면 소문날 일 없을 겁니다!”
“그게 또 그렇게 되나? 그럼 소문나는 건 금방이겠네!”
신난 아이처럼 류기태가 깔깔거린다. 그에게는 아주 귀한 일이다.
지하철 광고업자 손준겸에게 드디어 집이 아닌 그럴듯한 사무실이 생긴다. 여전히 직원 겸 사장 역할이지만, 사업은 나름 순항 중이다.
손준겸이 홀짝이던 믹스커피를 내려놓고 신규 고객 명단을 확인한다.
익숙한 글자가 보인다. 근방에서 꽤나 큰 규모의 항문외과를 운영하는 의사의 이름이다.
내친김에 광고카피를 어떤 식으로 해야 좋을지 창의력을 발휘해 고민해본다.
이내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번뜩 떠오르지만, 곧장 지워버린다. 대신 웃음이 터진다.
그렇게 광고했다가는 쫄딱 망해 병원 문을 닫던지, 더 큰 건물로 이사를 가던지 둘 중 하나일 게 틀림없다.
아마 전자이지 않을까싶다.
손준겸이 깔깔깔 숨넘어가듯 웃는다.
“실례합니다.”
그때 사무실에 손님이 방문한다.
“아, 네! 어서 오세요!”
손준겸이 기분 좋게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한다.
손님의 얼굴을 보자 그의 웃음이 더욱 커진다.
이번엔 반가움이 담겨있다. 더 환하게 웃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커다란 웃음이다.
“지하철 광고니까, 지하철에 빠삭한 사람이 도움 되지 않을까요? 나 서울지하철 노선도 다 외울 수 있어요!”
김선범이 자랑스럽게 외친다.
그렇게 손준겸은 드디어 사장이 된다. 사장 역할만 하는 사장이 된다.
노선도를 달달 외우는 걸로 모자라 지하철도 운전할 줄 아는 아주 든든한 직원이 들어온다.
중학교 영어교사 채소윤이 맞선을 본다.
상대 남자가 본인을 소개한다.
채소윤이 남자의 말을 귀로 받아드리며 눈으로 재빠르게 정보를 수집한다.
나이는 마흔셋, 키는 170센티미터가 조금 안 되어 보이고 몸무게는 그 절반쯤 되어 보인다. 자그만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엔 채소윤의 차례다.
그녀가 나이를 밝히고 취미 공개 단계로 나아가는 중에 남자는 돌연 의자에서 질펀한 엉덩이를 뗀다.
“저, ……어디 가세요? 화장실?”
“집이요.”
남자의 목소리가 사뭇 당당하다.
집과 화장실이라는 단어를 혼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지금요?”
“네.”
“갑자기? 왜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알잖아요.”
남자는 그야말로 세상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 있는 사람처럼 재수 없게 말한다.
“그리고 급한 일은 제가 아니라, 그쪽한테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그대로 카페를 나서는 남자에게 채소윤은 뒷말을 붙이지 못한다.
너무 비참해서 남자의 인중을 한 번 두 번 세 번, 기왕이면 인중이 평평히 펴질 만큼 때리고 싶다.
비참하지만, 왠지 그녀도 알 것 같다.
멀쩡하던 외모가 갑자기 못나게 보일 리는 없고 부드럽던 목소리가 갑자기 소음으로 들리는 것도 이상하다.
집에서 뿌리고 나온 고급브랜드 향수가 악취로 변모할 가능성 또한 전무하다.
그럼 이유는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그녀가 남자에게 제공한 정보라고는 외모라는 시각 정보, 목소리라는 청각, 냄새라는 후각 정보뿐이다.
그 외로는 나이라는 신상 정보가 전부다.
한 해 한 해 숫자를 올려가는 평범한 수치라고만 생각했던 나이가 남자에게는 핵심 중 핵심 정보였던 모양이다.
“……왜 엄마는 내 나이를 안 말해서 이 사달을 만들어.”
카페를 나서며 채소윤은 맞선자리를 주선한 엄마에게 과감히 비난을 돌린다.
상대 남자는 분명 학교선생님이라는 직업만 듣고 혹했을 것이다.
그래도 오늘 마실 커피는 장만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녀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터덜터덜 걷는다.
버스정류장 앞 도로에 정차되어있는 경찰차를 보자 지난달에 겪었던 어이없는 일이 떠오른다.
지하철 인질극이란 그런 것이다.
그때 일을 떠올릴만한 소재는 여기저기 산재해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서울 시내에 지하철역과 경찰차는 널리고 널렸다.
그래도 몸에 아무런 거부반응이 없는 걸로 봐서 또 마냥 괴롭기만 했던 순간은 아니었네, 하며 그녀는 피식 웃는다.
웃음은 다른 무언가를 불러온다.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나란히 인질이 됐던 사람들이 절로 생각난다. 웃음은 좀 더 밝아지고 자연스러워진다.
“……채 선생님? 채소윤 선생님 맞죠?”
경찰차 운전석에서 걸어 나온 젊은 남자가 대뜸 말을 걸어온다.
채소윤은 습관처럼 재빠르게 위아래로 눈을 움직인다.
나이는 서른도 채 안 되어 보인다. 팽팽하게 당겨진 얼굴피부가 말해준다.
피부도 말을 할 줄 안다. 원래 그렇다.
키는 175센티미터가 조금 넘어 보이고 몸무게는 키에서 100정도를 뺀 것처럼 보인다.
경찰 일을 하고 있다.
경찰차에서 내렸다고 해서 전부 경찰일리는 없지만, 경찰차에서 내린 사람이 경찰근무복을 입고 왼쪽 어깨에 무전기를 꽂고 있다면 경찰일 확률이 올라간다.
너무 올라가서 백 퍼센트가 된다.
“……안녕, 하세요?”
잔뜩 경계한 채 인사한 채소윤은 그때서야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챈다.
나란히 인질이 된 사이는 아니지만, 인질 사건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경찰은 대개 범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녀는 범죄에 연루된 적이 있다.
고로 채소윤과 경찰관 사이에 특별한 관계 하나가 성립된다.
“어머! 안녕하세요, 최 순경님.”
그녀는 목소리 톤을 한껏 끌어올려 다시 인사한다.
“네, 오랜만입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최병기 순경이 묻는다.
“아……, 저요? 아까 선 봤어요. 엄마가 하도 성화여서.” 대충 둘러댈까 했지만 채소윤은 솔직하게 말한다.
“음……, 잘 안 됐나보네요? 이렇게 혼자 계신 거 보면? 그것도 이 시간에?”
채소윤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오후 1시.
“시간이 왜요?”
“애매한 시간이잖아요. 그것도 선 본 사람한테는. 같이 점심을 먹었다고 하기엔 빠듯하고, 그렇다고 같이 점심 먹기로 약속했나 싶다가도 이미 자리를 파했다고 하시니까.”
듣고 보니 그랬다.
만일 정석대로 맞선이 진행됐다면 자리를 옮겨 같이 식사를 했을 것이다.
“정확히 맞췄어요. 한 달 새 뭔가 달라진 거 같네요? ……뭐랄까, 사람이 성숙해졌다고 할까? 전에 조사받았을 때는 마냥 어리게 보였는데.”
채소윤의 짧은 평가가 내심 마음에 들었는지 최병기 순경이 부드럽게 웃는다.
“저 아직 되게 어려요.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한 달 새 나이를 먹을 순 없잖아요.”
한 달 사이에도 10년은 너끈히 먹어 치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만큼 순수한 남자를 본 채소윤이 조금 슬픈 감정을 느낀다.
그 순간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감지한 최병기 순경이 묻는다.
장난스런 기색이 담겨있다.
“그래서, 맞선 상대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어요? 바지 위에 속옷을 입고 나오던가요? 아님, 마시던 커피로 세수라도 했어요?”
“아니요.” 짧게 웃고 채소윤은 어깨를 으쓱한다. “제 나이가 많아서 싫대요. 나이 듣더니 그냥 나가버렸어요.”
“……체포할까요?”
어느새 최 순경의 손엔 수갑이 들려있다.
이번엔 조금 더 크게 웃은 채소윤이 눈앞의 남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랬다간 최 순경님이 체포돼요.”
“아쉽다. 유치장 한번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말이라도 고마워요. ……하여간, 남자들은 어린 여자만 좋아한다니까요. 이제 결혼은 포기해야 될까 봐요.”
채소윤은 자조적인 어투로 패배선언에 가까운 말을 뱉는다.
“그런가요? 전 연상이 더 좋던데. 저보다 어리면 왠지 여자로 안 보인다고 해야 되나? 저는 희한하게 학생 때부터 줄곧 그랬어요.”
웃으며 말을 마친 최병기 순경은 방금 본인이 어떤 실언을 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눈치다.
일생일대의 패착을 둔 스물여섯 살의 어린 경찰은 슬슬 근무지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눈앞에 서있는 연상의 여자에게서 새로운 질문이 들려온다.
“최 순경님? 여자친구 있어요? 지난달에는 없었는데.”
웃음은 다른 무언가를 불러온다.
그게 가끔은 사랑일 때도 있다.
세상이 그렇다.
한 달 후, 한쪽의 적극적인 애정공세 끝에 공무원 커플이 탄생한다.
공세를 펼친 쪽이 그 쪽일지 그녀 쪽일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합의 과정에서 어떠한 협박이나 공갈도 없었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경찰을 공갈하고 협박하기란 결코 만만치 않은 법이다.
반면, 불은 원래 잘 옮겨 붙기 마련이다.
특히 우연히 붙은 불일 경우 걷잡을 수 없다.
“뭐야? 네 놈이 왜 여기 있어?”
파출소로 들어선 류기태가 과감한 삿대질로 대화를 산뜻하게 시작한다.
“여기가 제 직장이니까 여기 있죠.”
한 달 만에 만난 사람이 반가울 법도 하건만, 문도현 경사는 내내 무표정이다.
“그때는 뭔 경찰서 강력곈가 거기 있었잖아!”
속일 사람을 속이라는 양 류기태가 꽥꽥댄다.
“그때는 인원이 워낙 없어서 땜빵으로 간 거예요. 형사는 예전에 했던 일이고. 지금은 그냥 경찰이에요. 파출소 직원.”
류기태가 경찰의 얼굴을 가만히 살핀다.
“……그래? 그럼 내 일도 땜빵 해줘.”
“……뭔데요?”
잠시 후, 사용되지 않는 하수구 구멍에서 강아지를 꺼낸 소방대원이 말한다.
“선생님, 앞으로 이런 일은 경찰이 아니라 저희한테 연락주세요.”
“예예, 그럴게요. 고맙수다.”
반려견을 받아든 류기태가 애정 어린 손길로 털 뭉치를 쓰다듬는다.
“꾸리 이놈은 높은 곳 무서운 줄 몰라. 지가 무슨 고양이나 되는 줄 알고 있다니까.”
장비를 챙겨 떠나는 소방대원들을 일별한 문도현 경사는 짧게 한숨을 내쉰다. “잘 들으셨죠? 경찰이 이런 일까지 해결하려면 잠 못 자요.”
“난 젊을 적에 제대로 자본 적이 없어.”
“그건 병 아닐까요?”
의사는 아니지만 그 정도 문제는 누구나 알 수 있다는 듯 경찰이 말한다.
“내가 잠 많은 사람치고 성공한 놈을 못 봤어.”
류기태에게 온몸을 내맡긴 꾸리가 주인의 말에 반응하며 왕! 짖는다.
“예예.” 문도현 경사는 모든 게 다 귀찮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다. “전 이만 가볼게요. 그럼 쉬세요.”
“어이, 이런 일은 해결 못하는 경찰 양반.”
강아지를 땅바닥에 내려놓은 류기태가 무심하게 말한다.
“예?”
“하고 싶은 게 도대체 뭐야?” 대뜸 류기태가 묻는다.
“……하고 싶은 거라뇨?” 문도현 경사의 미간에 옅고 촘촘한 주름이 생겨난다. “지금은 늘어지게 낮잠이나 자고 싶네요.”
“하기 싫어 죽겠다는 얼굴로 살고 있어서 하는 말이야. 한 달 전에도 그랬고. 보아하니 내내 그렇게 살아왔을 거 같아서.”
“…….”
커다란 빗방울이 떨어지기라도 한 듯 문도현 경사의 얼굴에 파문이 인다.
옴짝달싹하는 경찰의 입술을 본 류기태는 놓치지 않고 말한다.
“뭔데? 설마 TV 나오는 연예인은 아니지? 암만 뭐든 할 수 있는 나이여도 그건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나이 때문이 아니라 얼굴 때문에. 그것만 빼고 다 말해봐.”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서른여섯 살 남자가 한참을 쭈뼛대다가 중얼거린다.
“……운동이요.”
“운동? 운동 좋지! 근데 무슨 운동? 설마 농구는 아니지?”
그렇게 말했다가는 얻어맞아도 싸다는 어투다.
“……농구는 왜요?”
“농구 선수하기엔 키가 조금……. 아닌가, 180센티가 안 되는 선수도 있으려나? 그쪽은 잘 모르겠네.”
지면에서 170센티미터 높이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는 두 눈으로 류기태를 노려보던 남자가 의기소침해진 목소리로 말한다.
“제약이 많네요.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거 같은데요?”
“괜찮아! 원래 그런 거야. 할 수 없는 거 빼고 전부 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류기태는 호탕하게 경찰의 어깨를 툭툭 친다.
“그래서 뭐라고? 무슨 운동이야?”
“……복싱이요. 원래 복싱선수였어요. 고등학생 때까지 하다가 사정이 있어서 그만 뒀지만.”
문도현 경사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쉽사리 해낼 수 없는 반복적이고 끊임없는 단련, 링 위에서 흘리는 땀과 피, 인간과 인간의 결연한 충돌, 수많은 관객들을 증인으로 내세워 눈앞에 서있는 사람보다 강함을 몸소 증명해내는 그 순간을, 철저한 규칙 아래 인간이 인간을 굴복시키는 원초적인 순간을 소망했다.
하지만 문도현 경사는 링에 남지 못했다.
그가 더 이상 링에 오르지 못한 이유가 눈물을 쏙 빼놓는 안타까운 사정이건 단순한 변심이건 링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여전히 링에 오르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순찰을 나가기 전 탈의실에서도, 선잠을 자다가 신고를 받고 비척비척 현장을 향해가는 도중에도, 주취자를 일으켜 세우는 순간에도 떠오르곤 했다.
“복싱 그만두게 만든 그 사정이라는 거 말이야. 지금도 유효한 거야?” 류기태가 묻는다.
“예? ……아니요? 아버지가 두 번 돌아가시진 않으니까요.”
문도현 경사가 다소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18년 전에 세상을 뜬 아버지는 더 이상 그를 슬프게 하지 못한다. 그저 그리운 감정을 불러올 뿐이다.
“그래? 음, 하긴 그렇지……. 돌아가신 분이 또 돌아가시면 살아 돌아오는 거지.”
어디 이런 멍청한 놈이 다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로 류기태는 덧붙인다.
“그럼 바로 하면 되겠네?”
“지금요? 이제 와서 복싱을 하라고요?”
“이제라도 찾아온 게 어디야. 요놈 이거 가스레인지까지 걸어가는 거 귀찮다고 국 없이 맨밥만 꾸역꾸역 처먹을 놈이네.”
류기태가 일갈한다.
복싱에 관한 모든 걸 통달한 사람처럼 문도현 경사는 살짝 비웃더니 이내 조심스레 덧붙인다.
“에이, 어르신, 제가 지금 서른여섯이에요. 복싱을 몰라도 너무 모르신다. 복싱 그게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에요…….”
그게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인지 더 이상 본인을 속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인지는 모를 일이다.
“원래 서른여섯이 되면 주먹이 없어지는 거냐?”
류기태가 자그만 주먹을 내보이고는 요란하게 흔든다.
“그럼 내 주먹은? 벌써 없어져서 똥 싸고 똥도 못 닦았게? 아님 내가 서른여섯도 안 되어 보이냐? 형이라고 불러주랴?”
예순다섯의 백발노인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아이고, 형님, 주먹이 없으시면 제 주먹이라도 가져가셔요.”
“잘 있었어?”
이한성이 통화상대에게 속삭이듯 묻는다.
―응. 너는?
“나도. 생각보다는 잘 지내.”
말끔히 정리된 재료들을 보며 이한성이 조금은 개운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생각을 좀 더 열심히 잘해봐. 그럼 더 잘 지낼 수도 있겠네.
진현주가 장난을 섞어 말한다.
“생각 좀 해보고.”
별안간 짧은 웃음이 터진다.
전 남자친구의 웃음소리에 맞춰 짧게 웃은 진현주가 질문을 던진다.
―근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아……, 저기, 원래는 직접 만나서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말이 안 나올 거 같아서.”
뱉고 있는 말과는 달리 생각보다 술술 말이 나오는 걸로 봐서 직접 마주보고 했어도 됐겠다고 이한성이 생각한다.
―할 말 있는 거야? 뭔데? 돈 빌려줘?
진현주가 어색한 웃음을 던진다.
“나 돈 많아. 이번 주에 복권도 당첨될 거니까 더 많아지겠다.”
―그래, 축하하고. ……뭔데 그럼? 이렇게 심각하게 할 얘기가 뭘까?
“또 그렇다고 마냥 심각한 건 아니고…….”
이한성이 망설인다.
―아, 알았다.
“뭔데?”
―피 수혈 안 해줄 거야. 같은 혈액형이어도 안 돼. 바늘 싫어.
진현주는 차마 ‘결혼해?’ 라고 물을 수 없다.
둘 사이에 결혼이라는 단어는 금기어나 다름없다. 누가 그렇게 정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나 건강해. 그래도 아직은?”
실없는 농담에 이한성의 긴장이 어느 정도 해소된다.
―다행이네.
“음…….”
진현주가 조금은 난감한 듯 입을 연다.
―……시간 더 필요해? 얼음 좀 더 부셔줘? 아이스 브레이킹도 이정도면 욕먹을 거 같은데.
“사과하려고.”
이한성이 입술을 파르르 떨고 두 눈을 질끈 감는다. 그 모습이 그의 진심을 여실히 나타내 주고 있다.
―……나한테?
진현주는 ‘왜?’ 라고 묻지 않는다.
“응. 너한테.”
이한성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차분히 말을 이어간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여태 살아오면서 부모님 제외하고 너한테 잘못한 게 제일 많은 거 같아서.”
―너무 성급하게 판단한 거 아니야? 찾아보면 훨씬 많을 텐데?
진현주는 장난스럽게 받아친다. 오랜만에 통화하는 사람에게 우는 목소리를 들려주는 건 예의가 아니다.
“……그럴 수도 있고.”
이한성은 그녀가 무안하지 않도록 살짝 웃음을 흘려보낸다.
“여하튼. 너한테 사과해야 되는 건 맞아.”
―그래? 그렇단 말이지…….
진현주가 신중하게 말을 고른다.
―그럼, 미안했어. 이렇게 한마디만 해.
“…….”
이한성도 이유를 묻지 않는다.
―진짜야. ……그거면 돼.
진현주가 다시 중얼거린다.
“미안했어.”
이한성의 머릿속으로 지난 시간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그동안 미안했어, 현주야.”
―나도.
진현주가 이한성의 사과를 받고 사과한다.
―나도 미안했어.
이로써 둘은 진짜 이별을 한다.
그제야 그 시절의 서로를 용서한다.
모 중학교의 영어 선생님이 여느 때처럼 학교로 출근한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녀가 웃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출근길이란 원래 그런 법이다.
양쪽 발목에 매달고 있던 모래주머니를 막 벗어던진 사람처럼 발걸음이 경쾌하다.
평소라면 이 나이 먹고 시작한 연애에 신난 꼴이 우스워서라도 감정을 자제하려 애썼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본인보다 연상이라는 점이 좋다는 남자와의 연애를 시작한 여자라면 그런 생각을 품을 하등의 이유도 없다.
다름 아닌 내 나이가 좋다고 하지 않던가. 서른여섯이라는 이 나이가.
채소윤은 다시 한 번 헤벌쭉 웃는다.
여자친구에게 오늘 하루도 잘 보내라는 메시지를 보낸 최병기 순경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무척 생경하다.
분명 그녀와 재회한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그러나 그 직후에 벌어진 모든 상황은 철저한 의도 속에 이루어졌다고 그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벌어진 뒤에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그때 그 순간에 대해 떠올리는 건 아무렴 간편한 일이다.
특히 그 일이 사랑과 관련된 일이라면 객관적인 판단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한다.
사랑은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한데 뒤섞어버리는 요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단 한 가지, 최병기 순경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건 그가 채소윤의 미소에 반했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웃음에 그의 세상이 흔들리고 천지가 뒤바뀌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웃음은 사랑만큼이나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웃음에 홀딱 빠져버린 사람은 그 누군가를 웃게 만들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그렇게 된다.
한 번이라도 더 그 웃음을 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녀와의 재회에서 최병기 순경은 짧은 고민 끝에 그걸 해낸다. 그녀를 웃게 만든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이미 배불리 먹어버린 나이에 고민하고 얽매어 스스로를 가둬버리는 예쁜 미소를 가진 여자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위로와 고백.
“저는 연상이 좋던데요?”
이렇게 탄생한 공무원 커플은 훗날 공무원 부부가 된다.
누구보다 행복한 부부생활을 해왔던 홍지선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이불을 정리하고 침실을 나선다. 부엌으로 가 커다란 컵에 물을 한가득 따라 마신다.
집에서 가장 익숙한 자리에 앉는다. 그 자리에 앉으면 정면으로 방문이 보인다.
코끝이 잠시 아려오지만 울지 않는다.
그동안 흘린 눈물로 충분하다.
홍지선이 손톱으로 손바닥을 깊숙이 누른다. 어찌나 세게 누르는지 팔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
그녀의 망설임이 한참 이어진다.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최근에 겪은 일련의 기막힌 사건이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와 교훈을 선사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게 꼭 쓸모없는 시간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 사건에서, 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녀가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는데, 다름 아닌 웃음이다.
그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홍지선은 불끈 쥔 주먹에 힘을 풀고 지하철을 생각한다.
지하철 안에 있는 승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본다. 그러자 웃음이 절로 솟는다.
홍지선의 감정상태가 바뀌는데 그거 하나면 족하다.
그녀의 고민은 거기서 멈춘다.
연신 터지는 웃음에 깊어질 눈가주름과 떨어져나갈 배꼽을 걱정하면서 심각한 고민을 이어가기란 쉽지 않다.
그녀는 다용도실에서 물걸레와 먼지떨이를 챙겨온다.
혹시 몰라 마스크도 착용한다.
심호흡을 하고, 하늘에 있는 남편에게 허락을 구한다.
당신 물건은 이제 버리겠다고,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 전부 새 걸로 사주겠다고.
그녀가 방문을 연다. 청소를 시작한다.
“선생님! 채소윤 선생님!”
교무실에서 다음 수업을 준비하던 채소윤은 반장을 맡고 있는 학생의 다급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다.
학생이 부리나케 교무실로 뛰어 들어오며 담임선생님을 애타게 부르는 경우 백이면 백 좋지 않은 일이다.
“어? 왜, 왜! 왜 그래?”
“반에서 싸움 났어요!”
학생의 외침에 채소윤은 뛰쳐나간다.
교실이 교무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이 이처럼 고마운 적이 없다.
덕분에 채소윤은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 눈에 담아낸다.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올해로 열여덟이 되었다.
소년의 이름은 방진백이다. 평소 소년은 아주 조용하다.
담임선생님인 채소윤도 일대일 면담시간을 제외하고는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어떤 학교에나 있을법한 아주 평범한 소년이다.
그 소년이 지금 어떤 무리와 대치하고 있다.
그를 노려보고 있는 다른 소년들은 비슷한 키를 가졌지만, 몸집은 거의 두 배에 육박한다. 세 명 모두 그렇다.
부피로만 따지자면 한 명과 여섯 명의 싸움이다.
“얘들―”
채소윤의 외침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상황이 마무리된다.
방진백이라는 이름의 소년은 주먹을 뻗는다.
다리에서 시작되어 허리를 타고 흐르는 힘을 고스란히 받아 주먹에 싣고 그대로 폭발시킨다.
두 다리는 주먹이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정확한 자리에 위치해있다.
모든 주먹과 발의 위치가 딱 맞아떨어진다.
세 명의 학생이 차례차례 바닥에 널브러진다. 단 세 번의 펀치면 충분하다.
두 눈으로, 선택받은 그 눈으로 소년의 동작을 빠짐없이 관찰한 채소윤은 두 달 전 지하철에서 만났던 강승호라는 이름의 또 다른 소년을 떠올린다.
재능은 꽃처럼 피어난다. 그리고 꽃은 어디에나 있다.
“안녕히 주무세요.”
소년이 말한다.
“그래, 푹 자라.”
아버지가 대답한다.
소년은 현관문을 나서고 옥탑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아주 천천히, 평소 그답지 않게 무척이나 굼뜬 움직임이다.
소년이 부엌에 나있는 자그만 창문에 귀를 댄다.
딸깍―!
꿀꺽꿀꺽―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가 아버지의 식도를 식혀주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TV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소년은 안심한다.
아버지의 하루가 보람찼다는 소리, 소년은 그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행복하다는 것을 안다.
소년은 주먹을 뻗는다.
그의 곁에는 항상 아버지가 있다.
소년의 아버지도 한때 링 위에 올라서서 주먹을 뻗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리 많은 재능을 지닌 채 태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그에겐 좋은 눈이 있었다.
상대방의 어깨를 읽어내는 건, 아주 조금 좋게 타고난 눈과 반복적인 훈련으로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그 너머를 보는, 그 너머의 너머를 보는 눈은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런 눈은 가슴에 꼭 품은 채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 눈을 가지고 태어난 어느 아버지가 같은 눈을 가진 아들을 가르친다.
아버지의 권유가 아니라 소년 본인의 의지로 시작된 여정이라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럽다.
링에 오르기 전, 소년의 아버지가 말한다.
“신나게 하고 와라, 아들.”
“네.”
소년이 대답한다.
“다치지 마라, 아들.”
소년이 가지고 있어야 할 긴장감까지 모조리 가져간 듯 보이는 아버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네.”
소년은 침착하게 대답한다.
공기를 떠도는 먼지 냄새와 예열한 근육의 두근거림, 부지런한 심장박동, 쏟아지는 조명과 시선, 함성소리, 탁 트인 공간에 우뚝 솟아있는 사각 링.
무대는 완벽하게 갖춰졌고, 그 무대 위로 2명의 선수가 오른다.
그중 누가 주인공이 되고 엑스트라가 될지는 모를 일이다. 그 둘의 지위를 가르는 유일한 잣대는 오직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주먹뿐이다.
이내 공연이 시작된다.
이곳에서 소년은 주인공이다.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소년이 주먹을 뻗는다.
언뜻 보면 링 위에서 소년이 보이는 움직임은 눈앞의 상대가 뻗는 주먹이나 몸짓에 하나씩 하나씩 반응해가며 적재적소에 꺼내든 대응책의 일환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링 위에서 소년의 모든 순간순간은 철저히 계산된, 소년의 본능과 신체지능이 깔아놓은 판 위에서 벌어지는 공연과 흡사하다.
한 발 한 발 상대에게 다가가 압박하고, 견고한 가드를 무력화시키고, 방심을 틈타 주먹을 꽂아 넣는다.
모두 소년의 머릿속 악보 표기에 충실한 진행이다.
유려한 풋워크, 정확한 타격, 필요한 모든 근육 하나까지 올바르게 사용하여 전달하는 힘의 흐름. 단 한 숨의 호흡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소년은 상대방을, 경기를, 링을 압도한다.
반면, 소년을 상대하고 있는 남자는 일이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다.
주먹이 닿질 않는다.
나름의 계산과 본능을 잘 배합하여 갈고닦은 주먹을 뻗어보지만 어림없다.
모든 주먹이 소년을 피해간다.
링의 비호를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의문이 커진다.
‘왜? 왜 안 맞는 거지?’
머릿속에 생각이 들어찬다. 어쩌다 일이 요지경까지 흘러왔을까 생각을 이어가던 상대는 소년의 훅을 얻어맞고 쓰러진다.
일단 편히 누워서 마저 생각해보자.
여기 한 남자가 소년을 보며 먼 과거를 떠올린다.
중년과 노년 사이, 사실상 노년이나 다름없는 외견을 가진 남자에게 소년이란 그런 존재다.
소년에겐 그런 힘이 있다.
소년의 눈을 보고 있자니 옛 시절을 떠올리지 않고는 못 배길듯하다.
남자는 본인에게도 눈앞의 소년과 같은 눈빛으로 살아오던 때가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낸다.
거의 50년에 가까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하지만 그쯤이야 그에겐 무척 간단한 일이다.
하버드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을 찾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노산을 걱정하며 이 세상에 유전자도 남기지 못하고 죽는 건가 밤낮으로 고민하던 채소윤은 검사결과를 듣고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그녀의 뱃속에 생명이 피어오른다. 그것도 두 생명이 나란히 피어있다.
기적이 원래 그렇다.
우연히 다시 만난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평생을 약속하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동안, 한 소년은 주먹을 뻗는다. 뻗고 또 뻗는다.
소년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맥없이 쓰러진다.
쓰러지고 또 쓰러진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더는 쓰러트릴 상대가 없어진다.
우린 그걸 1등이라 부른다.
정점이라 부른다.
챔피언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했다.
세상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문도현 경사는 어떤 소년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낡은 복싱 체육관 역사상 두 번째 제자가 된다.
소년의 아버지가 가르친 첫 번째 제자는 며칠 전 챔피언이 되었다.
챔피언을 가르친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챔피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가 챔피언이 될 수 있는 길은 다시 태어나 남들이 평생에 걸쳐 흘릴 땀을 단 몇 년 만에 쏟아내는 것뿐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스포츠가 원래 그렇다.
조금만 움직여도 산소를 달라며 허덕이는 못난 몸뚱아리를 보며 문도현 경사는 후회한다.
비관적인 생각과 덧없는 미련에 허비한 그동안의 시간을 안타까워한다.
지금보다 한순간이라도 더 젊을 때, 육체와 정신이 조금이라도 더 빠릿빠릿하던 때 선택하지 않은 본인의 망설임에 치를 떤다.
줄넘기. 줄넘기. 줄넘기.
샌드백. 샌드백. 샌드백.
줄넘기. 줄넘기. 줄넘기.
샌드백. 샌드백. 샌드백.
문도현이 땀을 흘린다.
그건 땀을 흘리던 시절을 그리워하던 사람에게 커다란 즐거움이다.
운동에 열중하던 어느 날, 문도현 경사는 쭈뼛대며 체육관 관장에게 묻는다.
“음, 저기, 그냥 혹시나 해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보는 건데요. 제가 이렇게 열심히,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운동하다보면 프로선수로 활약할 수 있을까요? 뭐, 외국 같은데 보면 사십 대에도 활동하고 하니까…….”
“아니.”
관장은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젓는다.
선수시절 관장은 그리 훌륭한 선수가 아니었지만, 다른 선수의 기량과 역량을 판단하는 눈만큼은 최고 중 최고다. 정점이다.
그처럼 객관적이면서도 상상력이 풍부한 눈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그의 눈에는 선수의 현재 기량과 그 너머가 보인다.
선수가 걸어갈 수 있는 길과 오를 수 있는 링을 눈앞에 생생히 펼쳐낼 수 있다.
그가 정식으로 코치한 선수는 여태 단 한 명뿐이고, 그 한 명이 유일한 가족이라는 점이 다소 믿음직스럽지 못할 수 있지만, 그의 첫 번째 제자는 챔피언이 되었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만큼 안타깝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객관적인 평가나 다름없을 것이다. 프로를 목표로 하기에는 무리다.
“아…….”
내심 기대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던 문도현 경사의 표정이 굳는다.
전문코치의 눈에 비친 본인의 모습이 어땠을지 돌연 부끄러워진다.
다시 복싱을 시작하고 필요이상으로 흥분한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적에 나름 열심히 운동했다한들 자기는 어디까지나 사십을 바라보는 아저씨일 뿐이라는 현실이 조금은 서럽다.
혈기 넘치던 시절로 돌아간 것은 몸이 아닌 정신상태일 뿐이라는 생각에 힘이 빠진다.
지금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은 청소년시절 문도현이 아니라 두툼한 배를 끌어안고 있는 중년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는다.
복싱체육관 관장이자 코치 강재훈은 본인 말 한마디에 두 눈 가득하던 빛을 서서히 잃어가는 서른여섯 살의 두 번째 제자를 물끄러미 본다. 그러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줄 요량으로 입을 연다.
“근데.”
관장이 씩 웃는다.
그 웃음은 무언가에 진심인 사람에게나 지을법한 웃음이다.
무언가에 진심으로 다가서고자 아득바득 애쓰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웃음이다.
“꽤 잘하는 ‘선수’는 될 수 있지.”
훗날, 문도현 경사는 생활체육 복싱계에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꿈의 크기가 조금 작아졌다고 해서 꿈이 아니게 되지는 않는다.
꿈이 그렇다.
“그러니까, 링에 오를 수 있다는 얘기죠?”
문도현 경사가 다 알아들었다는 뜻에서 환하게 웃는다.
파출소 근무를 마친 문도현은 부랴부랴 운동복과 운동화를 챙겨 체육관으로 향할 것이다.
환복을 마친 뒤 열심히 땀을 흘릴 것이다.
터지지 않도록 심장을 잘 달래고 폐가 헐떡대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체력을 기를 것이다.
굵은 땀을 흘리며 무쇠 같은 주먹을 뻗을 것이다.
가끔은 경찰업무에 시달려 며칠 운동을 못하기도 하고, 기껏 줄였던 허리둘레가 잠깐의 방심으로 다시 순식간에 불어나기도 할 것이다.
그럴 때면 실망도 하고 습관처럼 후회도 할 것이다.
그래도 그는 다시 주먹을 뻗을 것이다.
또 땀을 흘릴 것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링에 오를 날이 올 것이다.
덩그러니 솟아오른 링에 올라 주먹을 뻗을 것이다.
그가 흘린 땀과 단련한 근육의 무게만큼 묵직한 주먹을 뻗어 눈앞의 상대를 쓰러트릴 것이다.
사각 링.
그 신성한 테두리 안쪽에는 신체능력의 총계, 거룩한 땀, 천지를 뒤엎는 전율, 그가 꿈꾸는 모든 것이 응집되어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경기를 치른 후, 문도현은 하늘에 서있을 것이다.
하늘이 되진 못해도 서있을 수는 있는 법이다.
그는 당분간 하늘에서 살아 숨 쉴 것이다.
문도현은 한없이 기뻐할 것이다.
다시 링 위에 올랐다는 사실에, 링 위에 서서 누군가와 주먹을 맞대고 있다는 것에 감격하며 만족할 것이다.
그리곤 다시금 꿈에 한 발짝 다가섰다고, 비로소 꿈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환한 웃음을 지을 것이다.
꿈이 원래 그렇다.
꿈꾸는 자의 웃음이란 그런 것이다.
갓난아기가 자라 아이가 되고 소년이 된다.
소년은 챔피언이 된다.
그 과정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본 남자는 눈물을 흘린다.
두 눈이 흘리는 투명한 액체를 만져본 남자는 당황한다.
몸에 이런 이상한 것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남자를 당황케 한다.
그럼에도 남자는 그대로 둔다. 닦아내지 않는다.
소년에겐 땀이라고, 매일 흘리던 땀이 오늘은 희한하게도 눈에서 나오는 것뿐이라고 대충 둘러대면 될 일이다.
남자는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년을 본다.
남자도 활짝 웃는다.
소년이 달려와 남자를 끌어안는다.
온 세상이 남자의 가슴 속에 파묻힌다.
남자가 온 세상을 끌어안는다.
“아버지, 사랑해요!” 소년이 환하게 웃으며 외친다.
“사랑한다, 아들.” 남자가 소년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사랑한다.
원래 그렇다.
**서울지하철 인질 목록 -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