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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영임 Nov 03. 2024

비우기&채우기

#자식 #돈 #친척 #인생 #독립 #은퇴 #정리


비워야 채우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진천(鎭川)이다.

지명에도 드러나듯 미호천, 큰 물길을 품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방은 팽개치고 냇가로 달려간다. 뜨거운 여름 한낮 입술이 파랗게 질리도록 멱 감고 물장구치며 논다. 귀에 물이 들어가면 납작한 돌멩이를 귀에 대고 톡! 톡! 두들긴다. 돌 온기로 금세 물기가 마른다.

낮에는 아이들로, 날이 어둑해지면 어른들 차지로 한 여름엔 이만한 놀이터가 없다. 큰 장마 지는 날엔 불어난 물구경하러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든다. 격하게 흐르는 물길에 우렁우렁한 물소리가 무섭기도 했지만 마구 가슴이 다.


그 많던 물은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 

수량이 풍부할 때는 함께 이끌고 가는 것이 많다. 물놀이하다 놓친 신발짝부터 냄비, 바가지 등 이것저것 떠내려온 세간살이에 지저분한 부유물까지 말끔히 쓸어 간다. 가만히 물길 바라만 봐도 이것저것 복잡한 마음까지 씻겨가는 기분이. 그뿐인가 저녁 달맞이꽃 핀 둑방길 걸을 때는 어둠 속에 물은 보이지 않아도 흘러가는 물소리가 그윽하니 흐뭇하기도 했다.

지금은 바닥까지 훤히 드러날 정도로 수량이 빈약하다. 멱감거나 이불빨래하는 풍경은 찾아볼 수 없다. 아니, 그때 그 시절을 상상할 수나 있을까? 그냥 메마른 밑바닥이 치부처럼 듬성듬성 드러나 있다.


살아온 과정도 이 냇물 같지 않을까?

젊어 한때는 다 품어 낼 수 있었다. 어깨 걸고 힘차게 앞으로 내달 수 있었다. 한여름 가뭄에도 끄덕 없듯 웬만한 타격감에도 '그까짓 거쯤이야.' 굳건히 버틸 수 있었다.

나이 드니 물길 줄어들듯 힘이 부친다. 융숭하게 베풀기엔 이내 바닥이 드러난다. 넉넉히 품어주기엔 내 속이 너무 빈약하다. 욕심내서 다 끌어안고 가기엔 버겁기만 하다. 나이의 한계를 알고 덜어내는 수밖에…. 단출하니 덜어낼 것은 덜어낸 후에 그 빈자리에 채울 궁리를 해야지.




자, 하나씩 비우기부터 하자.      


가장 큰 비우기는 아이들 독립이다.

 결혼이 그 시작이다.

아이들 결혼을 앞두고 101가지 마음이 겹겹이 엎치락뒤치락한다. '아이들 쓰던 물건은 어쩌지?' 여기서부터 고민이다. 몇몇 지인들은 아이들이 언제든 집에 와도 옛날을 기억할 수 있도록 아이들 방과 집기까지 고스란히 놔둔단다. 그러나 우리는 냉정한 부모가 되기로 했다. 아파트 평수를 줄여 이사해야 했기에 그냥 놔둘 공간도 없다. 쓰던 책상, 침대는 물론 아이들이 용돈 모아 장만한 피아노도 처분했다.

성장 과정을 열심히 찍어둔 몇 권 분량의 앨범 사진도 모두 DB화 시켜 파일로 남겼다. 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은 한 장인데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줄 수도 없는 노릇인데 나름의 묘책이었다. 두 아이를 떠내 보내고, 아이들이 쓰던 물건까지 정리하니 우리 부부 2명 분으로 절반이 줄어든 셈이다.     

 

아이 결혼 앞두고 4식구 가족사진을 찍었다.

원가족 기념사진인 셈이다. 아들딸. 내가 낳아 내가 키운 내 아이들이지만 "우린 여기까지야." 이제 부모 자식이라는 관계로 남는 것이다. 며느리, 사위 새 식구가 들어오기 전에 원가족에서 ‘분리’가 먼저다. 그래야 독립할 수 있다. "너희 이새 가족을 꾸려야지." 그래서 남편과 나, 둘만 남게 되었다.


무주택자로 2년마다 집도 비워야 한다.

한 때는 44평 아파트에서 식구마다 방 하나씩 차지하고 떵떵거리며 살았다. 

10년 넘게 살다 보니 그 넓디넓던 집은 차츰 불어난 살림으로 비좁아지고 세간살이 속에 사람이 얹혀사는 기분이다. 아이들이 독립하면서 우리 두 사람에게 적합한 27평 아파트로 대폭 줄이기로 했다. 그러니 평수에 맞게 또 버려야 한다. 케케묵은 살림살이는 물론 안 쓰는 물건도 이참에 정리하자 했다. “어, 이것도 버린 거야?” 내가 아깝다고 미적거린 것은 남편이, 남편이 미련 두고 우물쭈물하는 것은 내가 몰래 버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리고 전세 만기 2년마다 이사해야 하니 집을 통째로 비워야 하는 것이다.

전세살이라 이삿짐 꾸리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차라리 집을 장만할까?' 생각지만 이 나이에 있는 집도 정리할 판인데 굳이? 어쩜 이번 생에 내 집이란 없을지 모겠다.  번의 과정을 거치다 보니 이사하는 것에도 나름 요령과 노하우가  짐 싸기 전에  버리는 것이 우선순위라는 것이다. 또한 버리는 것도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낡아 손때 묻은 것일지라도 버림 당하는 자(?)의 아픔고스란히 느껴지기에 헤어질 때는 “미안해, 그동안 고마웠어.” 인사를 나눈다. 이삿짐 트럭에 실려간 짐보다 쓰레기로 끌려나간 짐이 더 많다. 집안 살림이 반으로 줄어들자 홀가분하다. 집안에 숨통이 트인다.


보물단지가, 애물단지인가.

학생들에게 받은 손 편지 묶음을 어쩐다?

전근 가는 날, 학생들에게 받은 종이꽃, '사랑해요' 눈물진 손 편지 등을 A4박스에 담아 가슴에 끌어안고 떠나는 게 보통의 풍경이다. "그걸 어떻게 버려?" 무슨 꿀단지라도 되는 것처럼 보관하고 있었다. 초임 시절 가르쳤던 아이들은 지금쯤 50살이 훌쩍 넘어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같이 늙어가는 처지일지도 모른다. 그 아이들이 한때 중학교선생님이었던 나를 기억이나 해줄까? 엄청난 착각이다. 교사라면 아이들을 향한 마음이 혼자만의 짝사랑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놓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은 그랬다. 그래, 오락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닐 거야. 되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게 놔줘야지. 빛바랜 첫사랑 연애편지처럼 고이고이 추억만 남기고 정리하는 이별식을 했다.

해마다 쌓이는 것이 졸업생 앨범이다.

교직 경력 30년이 넘으니 적어도 30권 이상의 앨범이 남다. 남편은 나보다 오래 교직생활을 했으니  숫자가 더 많다. 충주에서 진천으로, 진천에서 청주로 지역을 옮기고 이사 다닐 때마다 라면 몇 박스 분량을 끌고 다녔다. “혹시, 찾아올 제자가 있을지 몰라. 녀석들 얼굴은 찾아봐야지.” 남편은 염려했지만 “에이~ 무슨 소리?” 무 자르듯 내치고 버리기로 했다.

휴우~ 이제 살겠다.


다음은 집안의 대소사다.

시부모 두 분 모두 돌아가시자 자연스레 친척들 모이는 자리가 뚝, 끊겼다. 거기에는 코로나19의 지대한 공로를 인정해줘야 한다. 거의 3년 동안 나라에서 앞장서서 "명절 제발 모이지 말아 달라." 사정하니 "얼씨구나~" 대한민국 며느리들이 자유선언한 셈이다. 우리 집도 그 덕을 톡톡히 본 경우다. 한자리 모여 지지고 볶고 음식 장만하던 풍경은 사라지고 두 분 모신 공원묘지로 직접 찾아뵙는 식이다.

시집가서 몇십 년 동안 챙기던 집안 대소사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건만 그 지긋지긋하다던 명절 풍경이 또 이리 애틋한 건 뭘까? 추석이면 소꿉장난하듯 송편을 빚고, 설날엔 김치만두를 빚으며 ‘라떼’ 타령을 는 부작용(?)도 있기는 하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

우리 사는 것은 1+1=2로 계속 늘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1-1=0을 해놓고 그다음으로 채우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퇴직 이후 위한 확실한 나의 기준은 새로운 것으로 '채우기’하려면 일단  ‘비우기’가 먼저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지 버리지 않고 다른 것을 더 얹는다면 또 숨통이 조여드는 기분을 맛봐야 할 것이다.

퇴직한 다음 정장 차려입고 핸드백 구두 신고  곳이 어디 있을까. 그 차림으로 뒷산을 오르고, 어슬렁어슬렁 동네 산책하고, 서관책 보러 가고, 커피 마시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벌써 지인을 통해서 입을만한 옷들을 추려 5박스 정도 베트남으로 보냈다. 이제 퇴직하면 남은 정장 차림 옷들이 처분대상 1호 그에 따른 가방, 구두 등이 옵션처럼 버려질 대상 품목이  것이다.

어디 옷일까. 낡아서 손이 안 가거나, 안 쓰는 것을 버리듯 내 안에 관습, 관행, 규범 등도 함께 훌훌 벗어던질 것이다. 그동안 목에 힘주었던 근엄함도, 어깨를 짓누르던 삶의 무게도 내려놔야지.                     


채우기는 (     )로 비워둔다. 다음에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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