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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영임 Nov 10. 2024

인연도 유통기한이 있다죠

#인연 #사람 #갈등 #행성 #관계 #만남 #냉정 #열정


‘일’과 ‘사람’ 뭐가 더 힘들까?     


당연히 사람이다. 

사람 상대하지 않는 일이 어디 있을까? 그래도 구분한다면 사람이 더 힘들다. 왜냐하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마음에 상처까지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이야 밤을 새워서 하면 된다지만 어디 사람이 내 마음대로 되나? 하기는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나는 평화주의자다. 말이 좋아 평화주의자이지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상대방은 신경도 안 쓸 텐데 나 혼자 전전긍긍하는, 한 마디로 쓸데없는 감정 소모전이다. 사람 때문에 힘들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내 탓 아닐까? 친절해 보이려고, 좋아 보이려고,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미지에 흠집 나지 않을까? 그런 나를 증명하기 위하여 너무 많은 마음과 시간을 낭비했다. 일명 '좋은 사람 증후군'이다.





교사야말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먼저 학생이 보인다. '저 아이는 왜 힘들어할까?' 원인을 찾다가 실타래처럼 '부모는 어떤 사람일까?' 따라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 보면 말썽꾸리기 '금쪽같은 내 새끼'가 아니라 '금쪽이 부모'가 보인다. "아이가 오죽하면 그랬을까?" 학생의 이면을 헤아리게 된다. 아이를 상대하는 것도 힘든데 막무가내인 부모까지 감당하기란 버겁기만 하다. 감정이입이 문제다. 교사로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감과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머리보다 가슴으로 일하는 감성적인 나 같은 사람은 맺고 끊는 게 분명하지 않다. 그러니 더 피곤할 수밖에….

한때는 학생, 학부모, 동료 등 사람을 이어주는 관계보이지 않는 거미줄처럼 목을 휘감아 조이는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사람에 치이기보다는 차라리 행정적인 일을 더 하자 싶어 교사에서 장학사로 전직을 생각하기도 했다.     


웬걸, 장학사가 되니 그 대상이 더 다양해졌을 뿐

교사에서 장학사로 전직하니 그야말로 층층시하다. A안을 만들어 장학관에게 가면 “이게 아니라…”로 시작해서 토씨 하나까지 빨간펜으로 쫙! 쫙! 그으며 B안으로 만들어오란다. 밤새워 고친 B안을 과장에게 올리면 “그게 아니지…” 본인의 온갖 지식과 경험을 예로 들며 폭풍 잔소리 끝에 C안을 가져오란다. 초를 다투듯 서둘러 만든 C안을 들고 국장실에 가면 “뭐 이리 복잡해. 군더더기 빼고….” 결국 맨 처음 내가 만든 A안을 요구한다.

장학관, 과장, 국장으로 돌고 돌아 제자리인 셈이다. 도돌이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동동동! 발만 구른 셈이다. '뭔 헛짓만 한 건가?' 자존심은 너덜너덜해지고 눈 밑 다크서클은 줄넘기하기 딱, 좋을 만큼 ~ 쳐져 있다. 지금은 다들 퇴직하여 현직에 없지만 한 동안 연락드리고 안부를 여쭈었다. 자신들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 싶은데 연락 주는 후배를 의아해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아름다운 복수(?)를 했다.      





20년 가까이 이어진 인연도 있다.

평교사 시절 같은 학교 교장선생님과는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얼굴 뵌 지 좀 지났다 싶으면 서로 마음 통한 듯 연락이 온다. 번갈아가며 밥을 사고, 차를 마시며 세상 사는 이야기 나눈다. 보통 어른들은 자기 살아온 과정을 바탕으로 인생 컨설팅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말이야~" 훈수 두지 않으신다. 한참 어린 나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으신다. 교육계 돌아가는 꼬락서니 좀 보세요. 이게 돼요?” 내가 흥분해서 말해도 묵묵히 들어주신다. 나보다 연세가 있으시몇 년 앞을 살아가고 계신 셈이다. 그 교장선생님처럼 늙고 싶다.

전근 가며 만나고 헤어진 몇 학교 선생님들과는 햇수로 10년, 2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나이 드니 학생 가르치는 고충에서 차츰 살아가는 이야기, 몸 아픈 이야기가 더 많아진다. 누구 하나가 말 꺼내면 뒤처질세라 “나도! 나도!” 한 마디씩 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위로받는다.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같이 갔으면 좋겠다.     


살붙이보다 더 끈끈한 만남도 있었는데…. 

한때는 죽고 못 살 정도로 가까이 지내던 만남도 있었다. 상업고등학교 근무하던 때 만난 여교사로 위아래 12년 나이 차이가 났다. 이러니 저러니 학교 돌아가는 이야기는 물론이고, 교장, 교감 뒷담화할 때도 죽이 척척 맞았다. 만났다 하면 아이들 키우는 일부터 시부모 흉까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보따리 펼치기 바빴다. 나는 꽉 막힌 범생이 스타일인데 마흔 살 넘어 노는 것을 배웠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 가끔은 문제 학생들처럼 빈 강의 시간에 학교 앞 매점 골방에 모여 라면 끓여 먹으며 웃고 떠들 때도 있다.   

“우리 중에 누구 하나는 교장도 해 봐야 하는 것 아녀?” 부산 가던 밤기차 안에서 누군가 한마디 했다. "난 그냥 자유롭게 살래.", "난 공부하기 싫어. 공부는 노언니지.", "그래? 그럼 노영임. 네가 교장 해라.” 내가 지목되었고 미리 축하 건배까지 나누었다. 농담으로 꺼낸 한 마디가 발단이 되어  장학사 시험에 도전하고 내 인생 또 한 번 바뀌게 되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평생 헤어질 일은 없을 테고 곗돈을 모았다가 맨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사람에게 몰아주자고 했다. 죽음으로 한 사람씩 떠나보낼 때마다 그 슬픔을 다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랬던 우리였는데 차츰 격조해지다가 몇 년 전부터 왕래가 끊겼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동안 마음 불편했다. 나를 제외한 3명은 여전히 가까이 지내는 눈치다. 나만 왕따 당한 기분도 들고, '내가 그들을 서운하게 했나?' 되짚어 보기도 한다. 참, 많이 아쉽다.





인연도 유통기한이 있다잖아

아나운서 이금희 씨가 쓴 수필 중에서 답을 얻었다. 우리들은 교차로에서 만난 것뿐이다. 나는 위에서 아래로, 누구는 아래에서 위로 걸어가다 어느 한 지점에서 마주친다. 그렇게 지나쳐 나는 내 갈 길로, 너는 네 갈 길로 각자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거겠지. 발목에 묶여 있던 실을 풀어버린 느낌이랄까? “그래, 여기까지야. 그동안 고마웠어. 안녕.

더 이상 인연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어쩜, 우린 제각각의 행성인지 몰라. 자전이나 공전 주기가 비슷해서 한 시기에 가까워졌다가 내 별이 또는 그 별이 자리를 옮겨 점점 멀어졌는지도 모르지. 또 언젠가 주기가 비슷해지는 순간에 다시 가까워질지도…. 한편으로는 완전한 끝이 아니라는 게 안심이 된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이 영화 하면 먼저 '두우모 성당'이 떠오른다. 또 여러 미술 작품들을 보는 눈요기도 좋다. 남자 주인공 쥰세이와 여자 주인공 아오이.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데 자꾸만 엇갈린다. 왜 그렇까? 누군가에게는 냉정이, 누군가에게는 열정이 필요한 그 시간대가 다르기 때문 아닐까. 상대가 외롭다면 한 걸음 다가서고, 괴롭다면 한 걸음 물러서면 될 것을…. 샤워기 물온도 조절하듯 조금 더 차갑게, 조금 더 따뜻하게 적당히 관계 온도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단다. 그런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목욕탕 욕조에 들어설 때 "아. 조타~" 이 말이 탄식처럼 절로 나오듯 서로 너무 애쓰지 않아도 편안한 사람과 같이 있고 싶다.     





무엇보다 힘든 게 사람 정리다. 

학교, 교육청, 연수원으로 근무처를 옮길 때마다 모임 하나씩 만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핸드폰 연락처가 차고 넘친다. 케케묵은 살림살이가 쌓이는 모양새다. 누구는 얼굴조차 기억 못 하거나 ‘영숙, 명숙, 정희’ 같이 많은 이름은 누가 누구인지 구분조차 어렵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구태의연한 이 말이 목구멍에 걸리지만 인연도 유통기한이 있다잖아.

추석 연휴를 기점으로 실행에 옮겼다. 제1단계: 기억이 긴가민가한 이름을 지운다. 제2단계: 3년 이내 연락 한번 없는 이름을 삭제시킨다.

제3단계: 카톡으로 추석 덕담 인사 보내고 연휴 동안 읽고도 답글 없는 사람 연락처를 싹, 지웠다. 

내 핸드폰 속에서 몇백 명이 죽어 나간 셈이다. 허탈하지 않을까? 웬걸, 이렇게 후련할 수가….

어디 좋은 인연만 있을까? 얽히고설킨 인연의 실타래를 끊어낸 기분이다. 팝페라 가수 임태경이 부른 노래 ‘사랑이 사랑을 버리다’가 떠오른다.

내가 너를 버린 거야.






좋아 보이는 것과 좋은 것은 별개다. 

좋은 게 아니라 좋아 보이기 위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해 보이기 위해서 애쓰지 않기로 했다. 내가 얼마나 친절하고, 괜찮은 사람인가를 입증하려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기로 했다. '똑, 부러지는 여자'로 능력을 인정받으려 아등바등하지 않기로 했다. 나에 대한 타인의 판단과 평가에 전전긍긍하지 않으려 한다. 아니,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요즘 조금 덜 애쓰니 훨씬 편안하다. 하지만 아직이다. 퇴직하고 나면 품이 넉넉한 한복을 입은 듯 자연스레 편해지겠지.



  친절한 영임 씨! 이제 그만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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