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풍요롭게 하는 길 - 네번째 이야기
첫 직장인 L사에 입사할 때만 해도 나는 이 직장에서 뼈를 묻으리라 마음먹었고 또 그렇게 예상했다.
1990년대 그시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많은 이를 통해 검증된 확실하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대다수가 추구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닥쳐왔다.
입사후 약 7년째 되던 해에, 당시 전 직원이 꼭 읽어야할 책으로 잭 웰치의 경영 지침서인 ‘위대한 승리’가 선정되고 나서, 우리 회사도 점진적으로 잭웰치의 경영 방식을 실제로 도입하고자 했다. 잭웰치의 유명한 경영 방식 중 하나가, 아무리 훌륭한 인재가 모인 집단이더라도 그 안에서 상대적으로 상위/하위 성과자가 반드시 생긴다는 이론에 근거하여, 매년 상위 20%의 직원에게는 파격적인 보상을, 대신 하위 10%의 직원에게는 해고를 단행한 일이다. 한국 기업들도 대부분 상대 평가를 해왔기에, 매년 상위 및 하위 O%의 직원을 지정하는 것 자체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급기야 우리 조직도, 잭웰치가 시행했던 무서운 강제 해고 시행까지는 아니더라도, 2년 연속 하위 O%에 포함된 인원은 평가만으로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는 없었던 매우 강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해야 했다.
솔직히 초반에는 나도 이 시도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사실 내가 맡고 있던 파트 안에서도 조직에 기여하기 보다는 네거티브한 영향을 주는 골치 아픈 하위 성과자가 실제로 있었으니까. 문제는 한 사이클의 시행이 이루어진 이후였다. 더이상 내 주변에는 뭔가 실질적인 조치를 취해야만 할 문제 직원이 전혀 없는데도, 매년 하위 O%에 해당하는 누군가를 지정해야 했고, 그들은 어떤 조치의 대상자가 되어야만 했다. 나 뿐 아니라 대부분 모든 조직이 같은 고민에 빠지다 보니, 급기야 2년 연속 하위 O%에 해당하는 직원이 나오지 않도록 인위적으로 평가를 분배 조정하는 의도치 않은 일들까지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몇년간 이 과정을 거치고 나니, 나는 조금씩 회사로부터 마음이 떠나기 시작했다.
(나중에 따로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나는 직원을 나열하는 방식의 상대평가를 비효과적인 평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이 때부터 그러한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했는 지도 모르겠다.)
그 즈음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일본 IT리더로 불리우던 우메다 모치오가 쓴 ‘웹진화론’이라는 책을 접하고는, 난 나름 새로운 충격에 빠졌고 내 커리어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했다.
웹진화론은 구글이 시작한 인터넷 혁명을 주로 다루면서, 당시 제조업 중심의 한국으로서는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아마존을 중심으로 하는 롱테일 경제, 블로그라는 새로운 컨텐츠 교류 채널, 그리고 오픈소스라는 SW 업계의 이해되지 않는 새로운 현상을 논리적으로 다루었다. 당시 이미 한국에서는 심마니, 야후, 라이코스 등의 검색 엔진 서비스들이 잠시 거처가고, 네이버와 다음이 검색엔진이자 포털로서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한 터였다. 그렇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그런 네이버가 지금의 네이버와 같이 국내 대표 대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룰만큼 성장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네이버 (당시 네이버의 기업 명은 'NHN'이었다. 2013년 분사 이후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현재의 NHN과 혼동의 여지가 있기에, 이후에는 계속 네이버라는 기업명을 사용하겠다)라는 회사 자체를 모르는 어른들도 많았다. 하지만 웹진화론은, 과연 SW와 AI를 전공한 내가 계속 제조업을 영위하는 현 직장에 머무르는 것이 맞는가라는 물음을 매일 던졌고, 왜 그런지 몰라도 이러한 질문과 고민은 한동안 가라 앉아 있던 나의 가슴을 조금씩 벅차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첫직장에 입사한지 만 10년만에 첫 이직을 결심했다.
사람은 누구나 예상치 못한 계기로 인해서, 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익숙함이 만드는 무료함으로 인해서와 같은 여러가지 이유로 이직을 고려할 순간이 온다. 나 역시 회사가 시행한 새로운 인사 제도에 대한 부담감과 이로 인한 실망감이 처음으로 이직을 고려하게 만들었고, 때마침 인터넷 세상이 가져온 변화에 동참하라는 한권의 책으로 인해 내 마음의 흔들림은 확신으로 변했다.
사실 그 전에도, 몸담고 있던 직장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순간들은 있어 왔다. 그룹사에서 처음으로 통신업을 시작하고 초기 몇년 간, 전 직원들이 매년 의무적으로 내가 소속되지도 않은 다른 계열사의 통신 서비스 가입자를 일정 규모 이상 모집해야만 했었을 때도 그러했다.
그 뿐인가. 한 때는 R&D SW 개발인력들의 생산성을 투입된 프로그래밍 시간 대비 생산된 소스코드의 라인수로 측정하려 시도한 적도 있었다. 참고로 잘 프로그래밍 된 SW일 수록 소스 코드의 라인수는 적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참 아이러니한 시행이었다. 아마도 SW의 생산성을 공장에서 부품 찍어내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도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설마 저런 일이 정말로 있었을까 싶은 크고 작은 일들이 그 당시에는 실제로 일어났고, 이들은 현 직장에 대해 고민을 하게 만드는 위기의 순간들을 불러 일으켰다. 아마도 내가 몸담았던 기업 뿐 아니라, 당시의 많은 대형 기업들은 대부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때 그시절, 운 좋게 잘나가는 대기업에 입사한 사람에게 이직을 결심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그 당시의 이러한 “보편적인 생각”들이 흔들리는 나를 다시 제자리에 반복적으로 잡아두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이직을 결심하도록 만든 것은, 현 직장에 대한 반복적인 흔들림이 아니라, 우연히 접한 앞으로의 미래 모습에 대한 기대였다.
아마도 지금의 직장인들은 더 다양한 이유로, 과거보다는 좀 더 쉽게 이직을 고민하는 순간들을 맞이하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무엇이 더 옳고 그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직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일 지, 나쁜 선택일지를 판단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직하게 된다면 기꺼이 그 새로운 도전을 후회없이 받아들이고 즐기겠다는 마음가짐과 확신이 있느냐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이직 후 환경은 이전 직장보다 좋은 점도 있고 안좋은 점도 있을 것이다. 보통은 나름 현 직장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으로 인해 이직을 결심했을 테니, 이직한 초기에는 그 부분에 대한 해소로 인해 만족도가 올라가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전 직장에서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단점이 보이면서, 나의 지난 결정이 과연 옳은 것이었을 지 의미없는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이는 사람이 가진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이다. 그렇더라도 사실 이러한 생각은 쓸모없는 생각이다. 이미 이직한 이후의 시간은 흘러간 터라, 해당 시점에는 전 직장도 그 때와는 달라져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전 직장에 머물렀다면 지금까지 무슨 일이 어떻게 전개되었을 지 알수가 없기 때문에, '만일 전직장에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하는 일어날 수 없는 경우와의 비교 자체가 모순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불만족한 환경으로부터 도피하기 보다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가슴 벅참이 있을 때 이직을 결정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일단 이직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그 새로움 자체를 즐기고 동기로 삼으라.
즉 내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직을 하는 것이고, 이직과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는 일어날 것이므로, 기대한 대로 나는 그 변화를 즐기게 될 거라고 생각하라. 그 변화가 즐거움 보다는 두려움이 될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라면, 아직 당신은 이직을 결심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