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너 역시도 예쁨 받으며 잘 살고 있기를
To. Y에게
안녕.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한참을 고민해 봤는데 이 흔한 안부인사가 그래도 제일 평범한 것 같아.
지금 내가 이렇게 편지 아닌 편지를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리고 그 편지의 주인공이 너라는 걸 알게 된다면 너는 어떤 얼굴을 할까 잠시 생각해 봤어.
내가 알고 있는 너는 아마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야.
그리고 내가 옆에 있었다면 아마도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진 나를 놀리고 싶어 입꼬리를 당기고 있겠지.
그 생각을 하니 과거 어린 날의 나와 네 모습이 겹쳐 보이면서 참 순수하고도 즐거웠단 생각에 웃음이 나네.
사실 지금 이런 글을 남기고 있는 것도 굉장히 의외고 언제 자다가 하이킥을 하며 이 글을 삭제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있어 다시는 널 만날 일이 없다는 전제하에 남기는 글이라고 생각하면 묘한 안도감과 함께 용기가 샘솟아서
오늘을 마지막으로 네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해.
그래야 나도 언젠가 또 다른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 또 누군가를 만날 마음의 여유 공간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아.
너도 잘 알겠지만 내 성격이 원래 그렇잖아.
누구에게도 살가운 말 잘 못하고 애교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라는 거.
씩씩하고 용감하고 싶지만 두려움도 많고 겁도 많고 걱정도 많은 스물한 살의 나에게 너는 참 용감하게도 다가왔었어.
대뜸 내가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부터 확인하던 너를 보면서 참 겁도 없이 당돌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나에게 고백도 하기 전, 네가 내 친구들과 내 지인들을 만나면 나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고 다닌 덕분에 나는 본의 아니게 주변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도 했었어.
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가, 장난치는 건가 싶었던 생각도 사실했었는데 그건 오래가지 않았어.
나를 대하는 너의 진심 어린 태도와 나만 보면 짓던 너의 얼굴 표정에서 알 수 있었어.
그런 너를 보면서 나는 혼자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
얘가 오늘 고백하면 어떡하지, 진짜 나를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말하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김칫국 아닌 김칫국을 마시기를 반복한 지 2주쯤이 지났을까.
밥을 먹자고 연락해 온 너에게 알겠다고 대답하며 어떤 옷을 입어야 예쁘게 보일까를 고민한 채 한참을 거울 앞에 서있었던 것 같아.
그렇게까지 신경 쓰며 옷을 차려입고 나갔던 그날의 내 모습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데, 약속장소에서 너를 만나고 밥을 먹고, 카페에 가서 음료를 주문하고 앉아있는 동안의 네 얼굴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넌 계속 나를 보고 있었어. 그것도 긴장한 티가 역력한 모습으로 내 눈치를 계속 봤었지.
주문한 음료가 나오고 내가 커피를 시켰었는지 에이드를 시켰었는지조차 모를 만큼 나 역시도 긴장했었는데 너도 이런 나를 눈치챘었는지 모르겠다.
실없는 대화를 이어가며 고개를 끄덕이기를 몇 번, 넌 마치 결심한 듯이 옆자리에 놔두었던 검은색 백팩 안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나에게 건넸어.
난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몰라. 그 안에 든 게 어떤 물건이고, 또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포장지를 뜯은 박스 안에는 예쁘게 담긴 초콜릿과 사탕이 가득했어.
그러고 보니 그날이 화이트데이였더라.
만날 때까지만 해도 머뭇거리던 우리 둘은 카페를 나올 땐 두 손을 마주 잡고 있었어.
아직은 쌀쌀한 3월의 봄이었지만 추위 따위는 오히려 우리 둘을 더 꼭 붙어있게 만들었어.
이 말을 쓰다 보니 내 손을 잡고 안절부절못하던 네가 떠오른다.
한참을 그렇게 손 붙잡고 거리를 걷고 있는데 꼼지락거리는 너의 손가락이 신경 쓰이더라.
하긴 오래 잡고 있긴 했지. 그럼 이제 슬슬 손을 떼볼까 싶어서 잡힌 손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빼내려고 하는데 너와 눈이 마주쳤어.
어색하게 웃는 나에게 오히려 너는 손에 땀이 많아서 누나 불편할까 봐라며 말을 흐렸어.
그때 넌 네 얼굴 못 봐서 다행이야.
완전 울상을 해서는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잡은 손을 놓겠어.
그 쌀쌀한 초봄의 저녁, 손에 땀이 배 축축하던 네 손을 다시 꽉 고쳐 잡으며 말했었지.
괜찮다고.
사람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화이트데이로 더욱 붐비는 번화가를 걸으면서도 실실 웃음이 났던 건 모두 다 너 때문이었어.
위험하다고 항상 인도로 날 밀어 넣고 차도 쪽에 서서 걷던 너 때문에,
봄날이 이렇게 쌀쌀할 줄 모르고 얇은 원피스를 입고 나갔다가 오들오들 떠는 나에게 고민도 없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준 너 때문에
부끄럽고 어색해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잘 모르는 나에게 매번 보고 싶다 예쁘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해줬던 너 때문에
내 스물한 살의 화이트데이는 정말이지 나에게 최고로 괜찮은 날이었어.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했다면 좋았을 텐데 나의 미성숙함으로 너를 아프게 해서 미안했어.
보고 싶다고 말하는 너에게 나도 보고 싶어라고 말해주면 좋았을 텐데 그때의 난 뭐가 그렇게 부끄럽고 두려워서 너에게 그 한마디 못하고 얼버무렸을까.
예쁘다고 말해주면 고맙다는 말은커녕 장난치지 말라며 너의 진심 어린 말에 상처 줘서 미안해.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그걸 알면서도 괜찮다고 나를 다독이던 너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해줘서 미안해.
표현에 서투르고 감정에 서툴렀던 나를 더 잘 알아주고 괜찮다며 이해하고 감싸줬던 너에게 성숙하지 못한 내가 이별을 먼저 이야기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했어.
나를 많이 좋아해 주고 예뻐해 줬던 너에게 나는 그만큼의 사랑을 돌려주지 못했던 것 같아 미안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가며, 부족하고 모자라고 서투른 나 자신을 알아가며 최근에 너를 더 자주 떠올려보게 됐어.
지금보다 날 것의 나, 성숙하지 못했던 나, 조금 더 겁이 많았고 두려운 게 많았던 나를 진심으로 예뻐해 주고 좋아해 줘서 정말 정말 고마웠어.
살아가며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만, 어쩌면 너는 나를 이미 기억에서 지웠을지도 모르고 떠올리기 싫은 지나간 사람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너를 응원할게.
아주 오래전 네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비록 늦었지만 멀리 떨어진 여기에서 지금의 내가 있는 그대로의 널 응원할게.
부디 네가 내가 모르는 어디선가에서도 예쁨 받고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
나의 어린 날, 아프고 힘들었던 청춘이라는 한 페이지에 사랑스럽고 예쁜 이야기를 남겨줘서 고마웠어.
나보다 훨씬 사랑스럽고 성숙한 어른이었던 너에게.
혼자서 간직하던 마음을 꺼내어 너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며 이만 마침.
2024.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