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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냥이 Sep 03. 2024

맥脈, 衇, 霡 서장 인동

서장 忍冬 , 겨울을 지새우는 방법


서장 忍冬 겨울을 지새우는 방법



 성벽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기주의 본성 북문과 통하는 성곽 끝 가장 높은 성루에는 단아한 차림새의 여인이 위태로이 서있었다. 저녁 해가 주저앉으며 길게 드리워진 어스름이 석양빛을 받아 붉게 물든 그녀의 뺨 위에서 너울거렸다. 


 소슬하게 불어오는 음풍에 성루 아래에 시립 한 채 그녀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는 시하인들의 면면이 점차 파리하게 질려가는 데도 여인은 결코 어깨를 움츠리고 떨거나 고개를 수그려 바람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풍상 속에서 자라나는 곧은 나무처럼 외려 바람이 거세어지면 거세어질수록 여인은 점점 더 차고 단단하여졌다. 부러질 듯 꼿꼿하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하늘을 바라고 있는 여인의 이름은 대연향이었다. 


 태예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이라 불리는 기주성의 번왕 대수협의 고명딸로 태어난 그녀는 열다섯의 나이에 선제인 혜종과 정혼하였고, 열일곱 살에 황귀비로 책봉되었으며,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황후로 책립 되었고, 지금은 현황제인 조현의 모후로 나라 안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여인이었다.

 

 연향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초들이 서있는 성벽을 쭉 둘러보았다. 이제 열흘 뒤면 경칩인데도 볕이 들지 않는 성벽의 구석구석에는 시릴 정도로 새하얀 눈이 소박하게 쌓여 그녀의 눈길을 잡아매었다. 


 유독 길었던 겨울 탓인지 올해는 유난히도 봄이 더디 오는 듯하였다. 어쩌면 추운 것은 날이 아니라 얼어붙은 그녀의 마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지긋지긋한 추위도, 지난했던 겨울도 이제 그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 꽃샘도 지나가고 마침내 날이 풀리면 제 살을 틔워 꽃을 피우는 나무처럼 연향이 그토록 바라온 봄도 그녀를 찢고 선연한 꽃망울을 터트리리라. 

 

 이친왕 조휼이 보내온 황군이 기주성 사방 오백여 리를 장악한 것도 벌써 달포 전의 일이다. 기주 공략에 동원된 황군의 수는 거의 십만에 육박하였다. 연향이 발을 딛고 있는 북문 앞에는 열아홉 살에 지휘권을 부여받아 출진한 이래 연전연승을 거두어 백성들로부터 불패의 장수라 숭앙받고 있는 흑령성 태수 진무헌이 이끄는 이만여 명의 군사가 포진하였고, 서문 앞에는 뛰어난 군공으로 고작 스물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왕작을 제수받은 바 있는 용강성의 수번왕 이지강이 부대 이만 칠천여 명을 데리고 진을 치고 있었다. 해안으로 이어지는 단애와 험준한 산세로 막힌 동문 아래의 바다에는 해성국에서 귀화한 수군 명장 민윤후가 이끄는 이만 육천의 군사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물 샐 틈 없는 방비를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남문 앞에는 철태궁의 대가로 이름 높은 백여준이 이끄는 만 이천여 명의 부대와, 지략이 뛰어난 노경학이 이끄는 만여 명의 예비군이 주둔해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전장에서 뼈가 굵은 이친왕이 손수 발탁하여 키워낸 젊은 용장들이었다. 


 이친왕이 형제처럼 아끼는 장수들에게 무려 십만에 이르는 대병력을 주어 기주를 포위하게 하였을 때부터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나버린 싸움이었다. 그러나 가문의 형제들도, 아들도 버릴 수 없었던 연향은 끝이 정해져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기어이 이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어쩌면 아비의 간곡한 충언에 따라 어린 조휼을 제거하여 금일과 같은 사태에 대비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연향은 젖먹이 시절부터 애지중지 길러온 양자를 제 손으로 죽일 수 없었다. 연향에게서 황실의 적통인 현이 태어나고 부군인 혜종이 붕하고 황태자인 현이 황위를 계승했어도 조휼은 여전히 그녀에게 소중한 아들이었다. 


 연향은 전혀 바뀌지 아니하였으나 그녀를 제외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조정의 신료들과 나라 안의 토호들은 연향과 휼 사이를 이간하지 못하여 안달이었다. 연향에게는 조휼이 어린 동생을 잡아먹고 황위를 찬탈할 것이라 겁박하였고, 조휼에게는 그의 친모인 신빈 도씨의 죽음이 대씨 문중의 탓이라 속닥였다. 조정신료들은 끊임없이 이친왕 조휼을 사지로 내몰 계략을 꾸며내어 선량한 황태후로 하여금 실행토록 그녀를 종용하였다.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휼을 전장에 보낼 교지에 어쩔 수 없이 옥새를 찍으면서도 연향은 그가 죽기를 바라는 조당의 뜻과 달리 양자의 무사귀환을 기도하곤 하였다. 


 그녀의 바람이 통하여 휼은 매번 죽을 자리에서 살아 돌아왔고, 그때마다 그를 따르는 이들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연향과 조휼, 모자 모두에게 잔혹했던 십여 년의 세월 끝에 이친왕은 어느덧 나라 안의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세력이 되었다. 죽일 수 없게 되었다면 차라리 이친왕과 화합할 길을 도모하였어도 좋았으리라. 


 그러나 그녀의 어리석은 오라비 대성운은 시류를 읽지 못하고 황제의 탄연에서 이친왕을 제거하기 위한 군사를 부렸다. 실패로 돌아갈 것이 자명하였던 음모를 사전에 막고, 좋은 날에 조휼에게 선위를 해주었다면 연향과 조현 모두 황도에서 떨어진 호젓한 행궁에서 평안히 여생을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연향은 미처 성운을 막지 못하였고, 성운의 모략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하필 황제의 탄연에서 군사를 부린 대씨 문중은 하루아침에 역적이 되었다. 궁이 부서지고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에 심약한 황제인 조현은 울먹이며 모후에게 매달렸으나 연향은 냉혹하게 황제를 황성에 내치고 형제들을 따라 기주로 들어왔다. 


 이친왕을 죽이기 위한 모의가 무산된 시점에 조현이 대씨 일가와 함께 있으면 그의 죽음은 필연적이었다. 연향은 피눈물을 흘리며 현을 궐 안에 두고 나옴으로써 황제가 이 일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휼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승산 없는 싸움 끝에 자신은 꽃처럼 스러질지언정 어린 아들에게만큼은 살 길을 도모하여 주고 싶었던 연향의 애끓는 모정이었다. 이심전심이라고 연향의 의중을 읽은 이친왕 역시 황제를 보호하고 반란의 수괴인 기주의 토호 대성운을 토벌하고자 한다는 뜻을 명백히 하고서 공성을 위한 부대를 기주성 밖에 둘렀다. 연향은 어스름 속에서 성 아래서 만장처럼 휘날리는 황군의 깃발을 참담한 심경으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반대편 성루 쪽으로 군졸들이 바쁘게 오가는가 싶더니 이내 성곽의 보초들이 한데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높은 성루 위에 홀로 서있는 연향에게는 그저 웅성거리는 소리 이상으로는 들리지 아니하였다. 그녀는 성루 아래에 있는 위사장을 돌아봤지만 당황한 듯 보이는 그의 얼굴 어디서에서도 군병들의 소요에 대한 답은 발견할 수 없었다. 연향이 알아보고 오겠다는 위사장의 제안을 물리친 것은 때마침 서문과 연결된 계단 쪽에서 성의 수비를 맡고 있는 이복아우 대형운이 모습을 드러낸 까닭이었다. 

 

“치신 사납게 뭐하는 짓들이냐. 전시에 보초가 자리를 이탈하다니, 군법에 따라 엄히 문책받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성곽 위에 올라오자마자 한데 모여 수런대던 보초들을 호통 쳐서 제자리에 돌려놓은 형운은  주저 없는 걸음으로 연향에게 다가왔다. 


 “황태후 폐하께 보고드릴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간단히 예를 표한 대형운은 바로 용건을 꺼내었다. 무뚝뚝한 얼굴은 평소 그대로였으나 눈빛에 감도는 긴장의 빛을 연향은 놓치지 아니하였다. 


 “무슨 일인가?” 

 “서문 아래 망루가 섰습니다.”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던지니 어두워져 가는 하늘 아래 분명 간밤에만 하여도 보이지 않았던 망루가 줄을 지어 서있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녀는 탄식처럼 읊조렸다.


 “과연 보초들이 동요할 만하구나. 성주인 오라버님도 이를 아는가?” 

 “예, 이리 올라오기 전에 전갈을 보냈사옵니다.”

 “그러한가. 그러면 곧 오겠구나.”

 “다소 늦어질 것입니다. 남문 아래 해자 쪽으로 적의 병사들이 몰려들더니 난데없이 그물을 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곳으로 먼저 갔다 들었습니다.”

 “해자에 그물을 치고 있다?”


 연향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대장군이 깊게 고개를 수그리며 고하였다. 


 “신의 미욱한 생각으로는 그 위에 강벌을 띄워 부교로 삼아 성을 오르려 하는 것이 아닌가 싶사옵니다.”


 드디어 개전인 모양이었다. 연향은 입을 다문 채 저 멀리, 적이 반나절도 안 되어 쌓아 올린 망루들을 바라보았다. 높다랗게 쌓아 올린 뾰족한 첨탑이 위협적인 인상으로 그녀의 두 눈에 선연히 맺혔다. 은밀히 각오해 온 죽음이 뚜렷한 형체를 가지고 서늘하게 그녀의 가슴을 가로질렀다. 


 연향은 남문 아래서 첫 싸움이 있었던 날을 떠올렸다. 의기양양하게 기마대를 이끌고 출병하였던 대성운은 겨우 두 시진의 전투 끝에 사백여명의 군사를 거의 다 잃고 대패하여 물러났다. 어른과 어린아이의 대결처럼 전세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일방적인 싸움이 끝난 후에 적은 황제의 사절을 연향에게 보내왔다. 그러나 황명을 받잡고 왔노라 하는 사신이 건네어 준 전한은 휼의 것이었다. 태예국 황실과 조정이 모두 이친왕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는 일례였다.  


 ‘어마마마께서는 정녕 소자로 하여금 모후를 폐하게 하는 대죄를 짓게 하시렵니까. 소자가 기주에 닿으면 사태는 돌이킬 수 없나이다. 소자 이 일이 어마마마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한 치도 의심하여 본 바 없사오니 더는 무고한 피를 흘리지 마소서. 성안의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이까. 부디 이 점을 깊이 혜량 하시어 반군의 수괴를 설득하여 무장을 해제하고 성문을 열어 우매한 저들을 지엄하신 황상 폐하의 은덕 아래 엎드리게 하소서. 어마마마께서 그리해 주시면 불민한 소자, 조당과 반군 사이에 묵은 오해를 풀기 위한 말길을 트고자 성심을 다할 것이옵니다.’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전서 앞에서 연향은 소리 없이 울었다. 어쩌다가 휼과 자신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 배 아파 낳은 아이가 아니었어도 연향은 진정으로 휼을 사랑하였다. 허무하게 잃은 첫아이를 대신하여 하늘이 저에게 내려준 인연이라 여기고 귀히 아끼었다. 휼도 친모인 도씨보다는 연향을 더 잘 따랐다. 어미라는 말도 연향이 먼저 들었다. 지금도 눈을 감고 있노라면 휼이의 자그마한 손이 저의 옷깃을 잡고 떨어지지 싫다며 떼를 쓰던 모습과 아기작 아기작 젖내 풍기는 살을 그녀에게 맞대어오던 것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현이 태어난 이래 그녀 주변의 모두가 휼이 그 아이가 훗날의 흉수가 될 것이라고 그녀에게 속살거렸으나 연향은 품 안의 어린것을 경계하여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소생이 아니라 엇나갈까 두려워 친자인 현이보다 양자인 휼이에게 더 많이 마음을 기울였다. 그렇게 성심을 다하여 키워냈거늘, 어느덧 다 자란 아들이 저를 상대로 폐모를 운운하고 있었다. 대성운과 성안의 장수들은 이친왕의 포만무례한 언사에 격분하여 사신의 목을 쳐 돌려보냈으나 휼은 그 뒤로도 기주를 포위하고만 있을 뿐 제대로 된 공격을 하려 하지 않았다. 


 동서남북으로 포위하였으니 일시에 공격해 들어온다면 성안의 군사들이 수적 열세를 어찌 감당하랴 만은 한쪽으로 군사를 밀면 다른 쪽으로는 부대를 물렸다. 출병 시 황명을 받잡아 반군을 정벌하겠다고 천명한 것과는 상반된 행동이었다. 암우하기 짝이 없는 태수 대성운은 모순된 명령을 내리고 있는 이친왕의 진의를 파악하려 들지 아니한 채 소극적인 그의 태도만을 비웃었다. 전장의 효장으로 드높은 휼의 명망도 그저 항간의 낭설에 불과하다며 외려 기세등등하였다. 


 첫 전투의 뼈아픈 패배 따위 그의 뇌리 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인 모양이었다. 이후로도 휼은 수차례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첫 전투 이래 제대로 된 싸움을 겪은 바 없는 대성운과 예하 장수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성 안에서 기주의 패배를 예감한 자는 오직 연향 밖에 없는 듯 보였다. 연향은 오라비를 설득하는데 실패하였고, 성안에서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이친왕이 몸소 지원군을 이끌고 작일 기주에 닿았다. 그리고 휼의 도착을 기하여 황군은 본격적으로 공성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하루아침에 망루들이 줄지어 서고 군사를 보내어 해자를 막았으며 성문을 부수기 위한 공성차와 투석기가 부대의 전면으로 이동했다. 진즉부터 이럴 수 있었던 휼이 이제야 움직였다는 것은 그동안 그가 기주의 사정을 봐주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와 동시에 차후로는 더 이상 상대를 봐주는 싸움을 하지 않겠다는 선포이기도 하였다. 


 연향이 벌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룻밤뿐이었다. 이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 휼이 군사를 움직여 성을 깨고 들어오면 그가 경고했던 대로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터였다. 그렇게 되면 반군과 함께 있는 연향의 목숨은 물론이요, 그저 목숨만 부지하기 바라며 황궁 안에 억지로 떨어뜨리고 온 황제 조현의 안위도 장담할 수 없었다. 연향은 다급하게 전서를 품은 전령을 이친왕에게 보내었다.

 

‘종내 이친왕이 기주에 닿았다는 전갈을 받고서야 이리 답을 하는 못난 어미를 부디 너그럽게 용서하길 바랍니다. 이번 사태와 이 어미를 나누어 생각하고자 한 그대에게 내 깊이 감사하고 있답니다. 그러나 어찌 한 배에서 나고 자란 동기를 버리고 이 어미만이 홀로 살아남기를 도모하겠습니까. 그대의 권유에 따라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면 이 일을 주도하였던 내 오라비들과 그 가솔, 기주의 죄 없는 백성의 상당수가 역모의 죄를 지고 참형을 당할 터인데 내가 후에라도 그 많은 피를 어찌 다 갚겠습니까. 하여 이 어리석은 어미는 이 사태를 통감하며 못난 오라비들과 함께 죽음으로써 이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합니다. 이 나라를 가꾸고 지키고 아끼어 온 대승상과 나를 보아 부디 성안의 백성들과 그대의 어린 아우만은 긍휼히 여겨 목숨만은 보전케 하여 준다면 이 어미 여한 없이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다. 휼이, 태령 황자, 소중한 내 아드님이시어, 일이 이리되었어도 하늘에 맹세코 이 어미는 단 한 번도 그대를 탓하여 본 적이 없습니다. 결심은 단호하나 내 오래도록 우려하여 온 바가 있어 실행이 늦어졌으니 나는 다만 그 점이 미안할 뿐입니다. 이 어미의 부덕한 대처로 인하여 무고한 그대가 세간의 그릇된 오명을 쓰지 아니하기를. 그리고 유약한 황상 곁에 삿된 무리가 깃들어 그들의 터무니없는 간계로 혈육 간의 더한 오해가 생기지 아니하기를. 내 저 하늘에서도 그대를 향한 기도를 그치지 아니할 것이니 부디 앞으로도 바른 정치로 이 땅의 사람들을 잘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휼이 보낸 서한 속의 의례적인 문구를 믿어서가 아니었다. 공격을 선포하고도 모순된 행동으로 스스로 사태를 바로잡을 시간을 주었던 그의 배려를 믿은 까닭이었다. 마지막 해름을 끝까지 다 지켜본 연향은 해가 지고 어두워진 하늘에 별빛이 돋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돌아섰다. 


 “바람이 삽삽하니 따스한 차를 마시고 싶구나.” 


 연향은 잔잔하게 웃는 낯으로 아우인 형운에게도 오라버니인 성운과 함께 올 것을 권하였다. 황태후 아닌 누이로서 청하는 말에 형운의 무뚝뚝한 얼굴도 조금은 풀리는 듯하였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위사대를 이끌고 먼저 내당으로 향하였다. 


 시녀들이 하겠다고 하는 것을 조용히 물리친 연향은 손수 찻물을 끓였다. 이것은 가족들과 나누는 마지막 차일 터였다. 옅은 연기가 내실 안에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녀는 찻물에 미리 준비해 놓았던 마전자 씨앗가루를 섞었다. 독성은 치명적이나 한약재로도 쓰이는지라 마련하는 과정이 크게 고되지는 아니하였다. 그녀는 씨앗가루를 탄 물을 천천히 들이켰다. 입 안 가득 쓴 맛이 퍼졌으나 부왕인 대수협도 생전에 쓴 차를 즐겼기에 성운도, 형운도 크게 의심치 않고 받아 마실 터였다. 찻물이 체내에 들어가면 한 시진 후 근육이 굳고 정신이 혼탁해지며 숨이 가빠지다가 결국 숨이 멎는다고 들었다. 연향은 엷게 웃었다. 황위를 나눌 수도, 아들을 이길 수도, 가문을 지킬 수도 없으니 동기들과 더불어 나고 자란 이 땅 위에서 이렇듯 생을 마감하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아니하였다. 연향은 미미한 어지럼증을 느끼고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 지난 나날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시야를 가린 담연 속에서 아스라이 섞여들었다. 그녀의 꿈과 사랑, 슬픔과 미움이 기억 속에서 찰나의 꿈으로 화하였다. 그 혼곤하고도 아름다운 꿈속에서 지친 몸을 누이고 쉬고 싶다고 느끼며 연향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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