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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냥이 Sep 03. 2024

맥脈, 衇, 霡 : 본 1부 황실의 꽃 1

本 황실의 꽃 : 1장 번왕의 딸, 대연향

本 제1부 황실의 꽃 


제1장 번왕의 딸, 대연향 


                                     

  영덕 12년, 태예국의 수도인 복경의 만금성 안에는 가을빛이 만연하였다. 후궁 앞의 내원으로 통하는 도보를 따라 관상용으로 심어놓은 신나무, 국수나무, 붉나무, 오동나무, 오각풍이 황성의 오후를 노랗고 붉은 빛으로 아리답게 수놓았다. 


  돌길을 따라 무심히 걸음을 옮기던 장신의 사내가 아름드리 커다란 감나무 아래서 멈추어 섰다. 바람은 선선하였고 햇살은 잎사귀들 사이로 다사하게 내리쪼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불그스름하게 변해버린 감나무의 기다란 이파리를 올려다보았다. 높다란 가지마다 주먹만큼 커다란 감이 두어 개씩 탐스럽게 달려 있었다. 무르익어가는 과실 앞에서 고요히 세월의 흐름을 헤아리는 주인을 위하여 뒤따르던 내관의 무리도 몇 걸음 뒤에 조용히 시립했다.  


  머리는 서리가 내려 허옇게 세었고 용안에는 병색이 완연하였으나 굵은 눈썹과 꽉 다물린 입매에서는 강한 기질이 절로 묻어났다. 사내의 이름은 조순으로, 훗날의 묘호는 경종, 예 황실의 서른두 번째 군주였다.  


  기척을 느끼고 돌아서자 황후 윤씨와 기주성의 번왕비 소씨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어가가 황후전으로 향하고 있다는 언질을 미리 받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내원을 가로질러와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황후의 인사를 받은 황제는 무심히 번왕비를 돌아보았다. 아랫사람에게 후덕하고 천성이 다감한 황후는 본디 내외명부의 부인들과 두루 어울렸으나, 여느 때처럼 가벼이 흘려 넘기기에는 시기도, 그 상대도 심상치 않았던 까닭이다. 


  기주는 수도인 복경만큼이나 넓고 풍요로운 땅이었고, 삼년 전에 새로이 왕작을 제수 받아 호번왕이 된 대수협은 아직 젊지만 야심만만한 사내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러한 자의 정실이 황후와 함께 있다. 이는 확실히 쉬 보아 넘길 일이 아니었다. 내년으로 다가온 황태자 승명의 관례를 앞두고 한창 국혼으로 말이 많은 작금이다. 황제의 성심이 불현 듯 대수협의 고명딸의 존재에까지 미친 것은 부복한 무리 가운데서 유난히 작고 통통한 손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황제의 시선을 따라가던 황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제위 원력에 세운 연호에 따라 영덕제라 불리는 황제는 선제인 진종의 네 번째 아들로 무희 출신의 귀인 안씨 소생이었다. 첫째 황자는 젖먹이 때 요절하였고 둘째이자 황후 소생의 황태자 역시 길고 길었던 선제의 재위 기간을 다 채우기도 전에 병사했으며, 셋째 황자 역시 전장에서 명을 달리하였다. 선제가 붕어하였을 때 성년이었던 황자는 현황제인 조순뿐이었다. 나이로 보나 식견으로 보나 조순이 황통을 잇는 것이 당연하였으나 생모의 출신이 미천하였기에 황귀비 소생의 막내 황자가 공주 몇 명과 손을 잡고 영덕제의 등극에 반발하였다. 형제자매와의 치열한 다툼 끝에 보위에 오른 영덕제는 즉위 후에도 후궁을 맞이하지 않아 훗날의 황위다툼을 방지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탓에 황제의 슬하에는 오직 공주 두 명과 황태자가 전부였다. 반란을 일으켰던 황제의 막내아우 외에도 현황제보다 고귀한 출신을 가진 선제의 혈손은 적잖았으며 개중 몇몇은 아직도 보위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점을 익히 아는 황후는 황태자에게 종친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뒷배를 만들어주고 싶었고, 그것이 호번왕의 정실과 그 영애를 초청한 그녀의 진정이었다. 이심전심이라고 저의 뜻이 부군에게 전해졌음을 깨달은 황후는 은근히 운을 떼었다. 연향은 열네 살 어린 나이에도 자색이 뛰어나고 언행이 담대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재녀였고, 영덕제는 재주 있는 자를 아끼는 어진 군주였다.  


  “호번왕의 딸 연향이라 하옵니다.”   


 황제는 황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향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현주는 고개를 들어 보거라.” 


 지존을 처음으로 대면하는 어린 계집아이의 고충을 헤아리듯 황제가 음성을 조금 더 낮추었다. 


 “아가, 짐이 두려운 것이냐?” 


 잠시 머뭇하는 양 하던 소녀가 마침내 허리를 꼿꼿이 펴고 고개를 들었다. 도화처럼 부푼 볼과 동그스름한 어깨, 포동포동한 귓불 모두가 영락없이 젖내가 빠지지 않은 어린 아이의 생김이다. 이리 어린 것을 두고 황후는 정략혼을 논하고 있었던가 싶어 절로 개탄이 나오려 했다. 


 “우매한 군주는 진노를 다스림의 근본으로 삼으나 현명한 군주는 관용으로 그 근간을 세운다고 배웠습니다. 인자하신 폐하의 선정으로 나라 안팎이 평안한데 소녀가 어찌 폐하를 무서워하겠나이까.”


 앳된 음성은 바람에 울리는 풍경의 소리를 닮아 있었다. 투명하리만큼 맑은 목소리, 허나 그 내용은 황제를 품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당돌하기 그지없는 딸의 언사에 번왕비는 대번에 핏기가 가셨으나 소녀의 천진난만한 양은 그대로였다. 어린 것이 보통 배포가 아니다 싶어 황제는 호탕하게 웃었다. 


 “네 아직 어린 연치에도 이토록 도량이 넓고 영특하니 장차 나라의 큰 기둥이 되겠구나. 황성에 오래도록 머물며 태자와 공주들의 귀한 벗이 되어 주거라.”


 황제의 윤음이 떨어졌다. 이는 곧 연향을 황태자비로 내정하겠다는 어지나 진배 없었다. 번왕비를 포함하여 부복해있던 모든 이들이 황송함에 고개를 조아리는 가운데, 소녀가 화색을 띠고 나붓이 예를 올렸다.  


 “성심을 다하여 분부 받잡겠나이다.”


 기다란 눈매를 접으며 부드럽게 웃는 연향은 서리에도 굴하지 않고 피어나 가을 화원에 그윽한 향을 더하는 한 송이의 국화처럼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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