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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냥이 Sep 03. 2024

맥脈, 衇, 霡 : 본 1부 황실의 꽃 2

本 황실의 꽃 2장 누각 위의 악생, 아무개 


본장 제1부 황실의 꽃


제2장 누각 위의 악생, 아무개


          

 말을 달리면 고작 일다경 남짓인 거리였으나 연향은 거의 두 식경을 꼬박 걸어 만금성의 서문인 창의문에 닿을 수 있었다. 황도의 내성, 특히 황제께서 계신 전조에서는 국법에 따라 승마를 금하였기에 그녀는 말고삐를 쥐고 뒤따르는 호위와 궐에서 붙여준 내관과 더불어 넓디넓은 궁을 오래도록 걸어야 했다. 

 

 기주성에서 황도를 향해 출발할 때부터 조심성이 많은 모친으로부터 매사에 주의를 받으며 잔뜩 억눌러 지내던 연향은 아침 내도록 조르고 졸라 내성 밖에서 잠시 말을 타고 오는 것을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시원한 바람을 조금 쐬고자 하였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황성 구경까지 제대로 하는구나 싶어 조금 곤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운 연향이었다. 

 

 소소한 내기를 걸어 호위에게 이긴 연향은 근심스러운 색을 지우지 못하는 그를 창의문 문가에 멈추어 세우고는 모처럼 홀가분하게 말을 달렸다. 기주의 군왕인 대수협에게 직접 전수 받은 기마술이었다. 말을 다루는 솜씨만큼은 나라 안의 어떤 규수보다도 훌륭하다고 자부하는 그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들려왔다. 내성의 서문과 후문 사이에 흐른다는 보천인 모양이었다. 점점 커지는 강물 소리를 좇아 얼마나 달렸을까. 강폭이 넓어지더니 어여쁘게 조성된 버드나무 길 아래 저 멀리 이층짜리 팔모지붕 누각이 하나 보였다. 물가의 팔각정과 그 옆의 소나무 세 그루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운치 있었다. 근처 나무에 말고삐라도 묶어놓고 잠시 쉬어가고자 연향은 팔각정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이르러서야 정자 이층 난간에 기대어 앉은 사내의 존재를 깨달았지만 딱히 내외하는 성정도 아닌지라 연향은 잠자코 늑설을 나무기둥에 비끄러매었다.  

 

 “딱 봐도 귀한 소저 같은데 어찌 이런 곳까지 홀로 나온 거요?”

 

 연향은 고개를 들어 사내를 일견하였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질이 좋은 옷을 입었고, 갸름한 얼굴에 살결이 눈처럼 흰 사내였다. 조당에서 관직을 얻기에는 아직 면면이 어리니 외성 출입이 가능한 귀족 가문의 자제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곁에 따르는 수하가 없고, 외성에서도 내성에서도 제법 떨어져 있는 정자인데 주위에 타고 온 말 한 필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귀족이긴 하여도 개의치 않아도 될 신분이라 짐작한 연향은 차분히 답하였다. 

 

 “하늘이 높고 바람이 좋으니 말을 타기에 제격인 날이 아니냐. 물소리를 따르다 보니 예까지 오게 되었구나. 내 그대가 있는 위로 올라가도 되겠느냐.”

 

 스스럼없이 묻는 말에 사내가 다소 놀란 듯이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청명한 가을 하늘처럼 맑은 소리였다. 연향은 난생처음으로 사내가 웃는 양이 어여쁘다고 여겼다. 시원하게 웃고 난 사내는 곧 단정한 자세로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읍을 했다. 남에게 굽히는 몸짓마저도 춤을 추듯 우아하였다. 기주성에도 많은 이들이 있었으나 그간 연향이 보아온 자들 가운데 이러한 사내는 없었다. 

 

 “이 몸이야 영광이지요.”

 

 이층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연향의 눈에 띈 것은 길이가 칠 척이 넘는 커다란 슬이었다. 이곳은 황도였고, 황제께서 계신 내성만큼은 아니더라도 외성 역시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어 있었다. 황성 출입이 가능한 고관대작의 자제가 대낮부터 금을 타며 유희를 즐기다니 상당한 한량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기주성의 군주 호번왕 대수협의 딸, 현주 대연향이다. 그대는 어느 가문의 공자이냐.” 

 

 사내의 해사한 얼굴과 깊은 눈빛을 마주 대하고 있노라니 공연히 목덜미가 홧홧해져 연향은 서둘러 눈길을 피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소맷자락 아래로 길고 매끈하게 뻗은 사내의 손가락을 보았다. 고생을 모르는 고운 손이었다.

 

 “현주께서는 슬을 못 보셨습니까.” 

 “보았지.”

 “한데 어찌하여 아악서의 악생이라고는 아니 여기십니까.”

 

 연향은 오른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눈앞에서 펴보였다. 사내가 뜻을 헤아리듯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였다.  

 

 “그대의 손이 나의 손처럼 굳은 살 하나 없이 고운데 어찌 매일 금을 타는 악생이라 하겠느냐.”

 

 기껏해야 저와 두어 살 차이가 날 법한 연치에 황궁 아악서에 악공으로 선발될 정도라면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연습도 무던히 해야 한다. 수많은 발현악기중에서도 유난히 다루기 어렵다는 슬을 가지고 악생이 되기란 아무리 재능이 있다손 치더라도 저 손으로는 무리였다. 그러나 연향은 눈에 보이는 이유보다도 저를 대하는 상대의 태도에서 그가 귀한 태생임을 확신했다. 사내의 말대로 그가 정녕 황실의 악공이었다면, 자신이 현주라는 소리를 듣고도 그리 반듯한 자세로 저와 똑바로 눈을 마주하지는 못했을 터였다. 태생이 비천한 자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굴종이 몸에 배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읍을 하고 정중한 말씨를 써도 고고해 보였다. 연향은 예의 바르되 결코 스스로를 낮추지 않는 사내의 독특한 화법과 무심히 서있는 듯 보여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일직선을 그리고 있는 그의 곧은 자세에 주목했다. 무심결에도 자세를 바로 유지하는 것은 일견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보이나 결코 절로 터득할 수 있는 습관이 아니었다.  

 

 “참으로 명민하십니다. 한데 현주께서는 어이하여 신분도 모르는 상대에게 초면부터 예사로이 하대를 하십니까.”   

 “나는 그대에게 예를 갖추라 하지 않았다. 내게 먼저 읍을 하고 존대를 한 것은 그대가 아니냐. 정 억울하다면 그대도 신분을 밝히고 내게 말을 놓으려무나.”

 “그도 그렇군요. 과연 현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부러 심화를 돋울 만한 언사를 해보아도 사내의 웃는 낯은 그대로였다. 눈에 보이는 도발을 물처럼 흘려보내다니, 이 또한 예사 도량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고된 일을 해본 적 없어 보이는 외양과 너그럽고 담대한 품성, 단아한 언행까지 눈앞에 있는 이가 제 짐작보다 훨씬 더 지체 높은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 듯 연향의 뇌리를 스쳤다.   

 

 “소일 없이 노는 한량의 이름 따위를 어찌 귀하신 현주께서 담아두시겠습니까. 허니 이대로 아무개라 부르시고 하대하시지요.”

 

 설마하니 참말로 아무개라 부르게 하리라고는 예기치 못한 연향은 당황해 버렸다. 개구지게 반짝이는 눈빛에서 뒤늦게 놀림을 당한 것을 깨달은 그녀는 얼굴을 확 붉혔다. 앵돌아져 고개를 돌려보아도 그는 순순히 진명을 가르쳐 줄 마음이 없는 듯하였다. 아무개가 슬을 가져와 자리에 앉았다.

 

 “부끄러운 솜씨이나 이 아무개가 한 곡 올리리까?”

 

 나직한 목소리는 정중하기 이를 데 없었고, 단정한 몸가짐 역시 깍듯하기 그지없었으나 놀리는 투만은 여전하였다. 골이 난 연향은 애꿎은 치맛단만 꽉 움켜쥔 채 아무개를 노려보았다. 아무개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어린 누이를 희롱하는 것 같은 표정에 더 뿔이 나, 연향은 부러 얄미운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러려무나. 곱상한 손을 보아하니 그대가 타는 곡이 내 귀에 과히 즐거울 것 같지 아니 하다만 아무개의 성의를 보아 내 들어 보겠다.”

 “참으로 광영이오이다.”  

 

 그가 눈을 감고 현 위에 손을 얹었다. 마디가 길고 고운 손이 아랫줄을 튕기고 윗줄을 누르며 푸른 가을 하늘 위로 어여쁜 소리를 띄워 보내기 시작하였다. 스물다섯 개의 줄 위에서 그의 손이 때로는 새가 되어 날고 또 때로는 물고기가 되어 튀었다. 현 위에서 자유로이 노니는 손길을 따라 소리가 가파르게 솟아오르고 또 완만하게 가라앉았다. 음색은 맑았으나 슬펐고, 가락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했다. 개구지게 밀어내는가 하면 또 애틋하게 사로잡아오는 소리에 취하여 한참을 앉아있었더니 어느 새 곡조가 끝이 났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내가 다시 연향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다 자란 사내의 눈이 어찌 저리 순하고 맑을 수 있을까, 연향은 참으로 의아하였다. 

 

 “이제 일어나셔야겠습니다. 너무 지체하시면 심려하실 분이 많지 않겠습니까.”

 

 서문을 빠져나올 때에 비하여 확실히 해가 많이 기울어 있었다. 그의 말대로 석양이 지기 전에 내성으로 돌아가려면 지금 일어서야 했다. 

 

“이 몸이 말이 없어 내성까지 데려다 드리는 것이 외려 폐가 될 것 같으니, 부디 현주께서는 조심히 가십시오.” 


 말도 없고 금까지 가진 그가 따라나선다면 필시 시간을 더욱 지체하게 될 것이니, 옳은 소리인데도 괜히 서운해져 연향은 인사도 없이 휙 돌아섰다. 거친 걸음걸이로 계단을 다 내려온 연향은 공연히 분심이 일어 다시 확 돌아섰다. 아무개가 말간 얼굴을 하고서 누대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대로 하고픈 말을 못하고 돌아간다면 오늘 밤 잠을 이루지 못할 터였다. 연향은 누각 위의 아무개를 향해 소리쳤다.  


 “훗날 다시 연이 닿는다면 그 때에는 아무개 아닌 진명을 밝힐 것이냐.”

 “그 때에도 현주께서 이 몸의 이름을 물으시면 기꺼이 그리하지요.”  

 “내 그럼 반드시 다음을 기약할 것이야. 그대야 말로 금일의 약속을 잊지 마라.”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확답을 받아낸 연향은 활짝 웃으며 말 위에 올랐다. 가슴 안에서 두둥실 부푼 기대로 인하여 돌아가는 발길이 깃털처럼 가벼울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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