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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냥이 Sep 05. 2024

맥脈, 衇, 霡 : 본 1부 황실의 꽃 3

本 황실의 꽃 제3장 승명 황태자 조효


본장 제1부 황실의 꽃



제3장 승명 황태자 조효


     

 “대연향 현주라.”


 승명 황태자 조효는 읽고 서책을 덮으며 조용히 되뇌었다. 태자의 전속 시종인 왕오는 주인이 여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에 신이 난 모양인지 연향에 대하여 들은 바를 줄줄 읊어댔다. 아직 어린 나이에도 미모로는 기주성에서 따를 자가 없다느니, 자태가 곱고 영특하여 호번왕이 보화처럼 아낀다느니, 할 말을 가리지 않는 맹랑한 성정은 황제 폐하마저 감탄하실 정도라느니, 가문이 고귀하고 재주가 많아 황후 마마께서 일찍부터 의중에 두었던 규수라느니, 가만히 듣자하니 끝이 없을 듯 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어대던 왕오는, 제가 이렇게 지체하고 있는 동안에도 연향이 하염없이 태자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점에 생각이 미쳤는지 엿가락처럼 늘어지던 말을 멈추고 수선을 피웠다. 


 “이놈이 또 법석을 피우느라 현주께 실례를 범하지 않았습니까. 얼른 현주께서 기다리시는 영빈각으로 행차하실 준비를 하겠나이다.”

 “되었다.”


 예기치 못한 대답에 놀란 듯이 왕오가 눈을 크게 떴다. 황제가 연향에게 황태자와  잘 지내라는 당부를 남긴 것이 바로 그제의 일이다. 언뜻 우연한 자리에서 만나 가볍게 나눈 인사말 같으나, 말을 꺼낸 이가 나라의 지존이었다. 황제의 언사는 듣는 이에게는 어명이 된다. 본디 제왕의 말이란 그러하였다. 황제가 보내어 온 규수를 아무 이유 없이 만나지 않고 돌려보내다니, 이는 자칫 황명에 도전하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왕오가 채 무어라 반문하기도 전에 태자가 종전과 같은 뜻을 표했다.  


 “아니 만나겠다는 뜻이다.”

 “하오나 폐하께옵서…….”


 항명에는 태자도 예외는 아니다. 황가의 혈통치고는 분방하고 활달한 편인 승명이라 할지라도 그 정도조차 모를 정도로 분별이 없지는 않다. 벌써부터 사색이 되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왕오를 일견하고는 승명이 입을 열었다. 


 “너도 알 것이다. 내 어제 금을 타러 내성 밖에 있는 팔각정에 다녀오지 않았느냐. 옷차림을 가벼이 하고 돌아다닌 탓인지 궁에 오고 나서도 오한이 조금 나더구나. 허나 크게 개의치 않아 태의감에 소식을 넣지 않았지. 석반에 기름진 음식이 많았는지 속이 갑갑하여 침수 들기 전에 창을 열었는데 하필 그대로 잠들어 버리지 않았느냐. 고뿔이 심해져 하필 현주가 찾아온 날에 이리 열이 오르고 기침이 멈추지 않으니 너는 이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천연덕스레 묻는 황태자 앞에서 왕오는 울상을 지었다. 황태자비가 될 것이 자명한 현주에게 거짓을 고하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주인이 황명을 거역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가 잠저 시절에 낳은 아들이어서인지 승명을 대하는 영덕제의 태도는 자애로운 편이었다. 승명이 한 나라의 태자이며 관례를 목전에 두고 있는 연치에도 묘하게 천진한 면면을 간직한 채 성장한 것은 타고난 밝은 성정 탓도 있겠으나 그를 대하는 황제의 관대한 태도에서 기인하는 바가 컸다. 너그럽게 대하여도 태자로서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의 경계를 넘은 적은 없었고, 사람을 가리는 경우도 없었던 지라 오늘은 어쩐 일일까 싶었으나, 어차피 왕오가 할 수 있는 대답이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태자 전하께서 고뿔이 심하여 운신이 불편하신 탓에 현주를 마주 할 수 없음을 몹시도 안타까이 여기시노라 전하겠습니다.” 


 황태자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어서 다녀오라는 무언의 재촉으로 받아들인 왕오는 울픈 얼굴을 하고서 물러갔다. 


 왕오가 나간 문가를 잠시 바라보던 승명은 덮었던 서책을 다시 펼쳤으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반쯤 열린 격자무늬 창으로 눈길을 돌렸다. 창 너머 얇은 나뭇가지 위에 아랫배가 통통한 이름 모를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새의 귀여운 모습에서 무심결에 연향을 떠올린 승명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나가서 거짓을 고하러 간 왕오를 멈추어 세우고 직접 연향을 만나러 갈까 싶었으나 그는 이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략혼에 사사로운 기대를 품는 것도, 상대로 하여금 기대를 품게 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거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짙은 자조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어차피 황실의 혼사에서 당사자의 의중이나 마음 따위는 중요한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정치적인 입지를 굳히기 위하여, 혹은 경제적인 실리를 누리기 위하여 누구와도 맺어지고 찢어진다. 그 치열한 셈속에 연모란 애당초 깃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승명 역시 마음을 비웠다. 모후가 염두에 두는 규수가 누구인지, 가문이 어떠하며, 언제쯤 식을 올리게 될지 알아보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으나 부러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부황은 그에게 관대한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정해주는 혼사를 거절하는 것을 용납할 만한 성정도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문제라면 딱히 궁금해 할 필요도, 관심을 둘 이유도 없었다. 상대가 누가 되든 적당한 때에 만나 물처럼 같이 흐르다 보면 어느덧 아이들이 태어날 것이고, 그들을 키우면서 저 역시 부황과 모후처럼 살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렇기에 어제 내성 밖 팔각정에서 연향과 조우한 것은 그로서도 당혹스러운 우연일 수밖에 없었다. 


 한눈에도 귀한 가문의 금지옥엽, 순진무구한 어린애 같은 그녀가 유목민족처럼 혼자서 말을 타고 내성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이야기를 붙여보였다. 연향은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사내가 말을 붙이는데도 거리낌 없이 응대하고 신분과 진명을 밝히는 데에 스스럼이 없었다. 모두에게 둘러싸여 귀히 받들리며 자라온 까닭에 의심과 경계를 모르는구나 싶어 그 물정모르는 순진함이 신기하고도 애틋하였다. 황제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자신에게 말을 놓지 못하는 이 황궁에서 저를 보고 태연히 하대하는 연향이 어이없으면서도 귀여워 신분을 감춘 채 읍을 해보였다. 시작은 장난이었으나 연향과 한 마디 두 마디 주고받으면서 그는 난생처음으로 기묘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이름을 묻는 연향의 말에 선뜻 답이 나가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한순간이나마 조효라는 진명과 승명이라는 봉작에 담긴 무게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그녀에게 황태자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연향을 상대로 물색없는 농을 많이 하였다 하더라도 단 하루 만에 정체를 들킬 수는 없지 않느냐고 뇌까리면서도, 승명은 그것이 그가 처음으로 가진 사사로운 욕심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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