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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냥이 Sep 10. 2024

맥脈, 衇, 霡 : 본 1부 황실의 꽃 5

본 제1부 황실의 꽃 제5장 뱃놀이

本 제1부 황실의 꽃 


제5장 뱃놀이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청명하였고 살갗을 스치는 미풍은 선선하였다. 주인을 잃은 한적한 궁 안에 조성된 화원은 고즈넉한 풍취가 있었다. 정오를 조금 지난 가을햇살은 다사하게 내리쪼였고, 고요한 연당의 옥빛 물 사이를 유유히 노니는 금빛 잉어는 더없이 평화롭게 보였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오후였다. 


 연향은 나룻배에 올라앉은 채 눈부신 햇살 아래 한없이 푸르러 보이는 연잎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시진이 넘게 노를 잡고 씨름하고 있는 아무개의 노고를 애써 외면하려는 양. 이마에 땀이 날 정도로 애를 쓰고 있는데도 배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있었다. 


 작일 그가 나룻배를 타자고 하였을 적만 하여도 연향은 다음 날 자신이 문자 그대로 정말로 배를 타고만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였다. 안타까울 정도로 열심인지라 자신의 손등을 꼬집으면서까지 필사적으로 눌러 참고자 하였으나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몸을 쓰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하였지만 그와 같은 몸치는 처음이었다. 치맛단을 휘어잡고 뛰는 저보다도 달음박질이 느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노를 잡는 어설픈 모양새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연향은 그를 탓할 마음이 없었다. 팔각정에서 보았을 때는 언행이 모두 그린 듯 아름다워 마치 신화 속의 천인처럼 근사하면서도 어딘지 아득하게 느껴졌었는데, 겪을수록 허술한 구석이 많은 사내라 도리어 정이 갔다. 잘 못하는 일에 매달려 어설픈 몸짓으로 애를 쓰는 모양새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우스워 가끔 체신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아무개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근래에 연향이 얻은 가장 커다란 행복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 웃지 마십시오. 보기보다 쉽지 않습니다.” 

 “아무렴. 그대의 노고가 큰 것은 내가 가장 잘 안다. 한 자리에서 조금도 아니 움직이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필시 배의 일부분이 바위 사이에 끼였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오래도록 공연히 애를 쓰게 하여 내가 외려 미안하구나.”     

 

 물속에 놓고 저어야 하는 노를 허공에 대고 열심히 젓는 모양새를 버젓이 보아놓고서도 연향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었다.    

 

“볕이 한창 뜨거울 때인데 굳이 연지 가운데로 가서 무엇 하겠느냐? 마침 배 위로 나뭇가지가 무성하여 앉은 자리에 그늘이 지는 것이 외려 운치가 있으니 나는 예 있는 것이 더 좋다.” 


 연향은 방긋 웃으며 수파를 꺼내어 땀이 밴 아무개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닿아오는 손길에 그의 몸이 조금 굳는 듯도 하였으나 끝내 그녀의 손길을 피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연향은 어른스럽게 저의 마음을 헤아리고 자상하게 감싸오다가도 어느 순간 어린아이처럼 서툰 모습을 보이는 아무개가 점점 더 좋아졌다. 

   

 “이대로 있기 뭐하니 비파라도 뜯어야겠습니다.” 


 겸연쩍은 마음에 승명은 나룻배 한편에 놓아두었던 비파를 끌어왔다. 배가 망가지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기실 연향이 오기 전에 시위를 불러 노를 젓는 법을 배워둔 승명이었다. 양 손을 같은 방향으로 속도를 맞추어 저어야 한다고 한탄하듯 알려주던 시위는 결국 말로는 아니 되겠다 싶었는지 승명에게서 노를 받아 몇 번이고 시범을 보여 주었다. 머리로는 알아들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아니하는 것을 그라고 어찌하겠는가. 승명은 어릴 적부터 힘으로 하는 일에 도통 소질도 흥미도 없었다. 서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거나 악기를 타는 것은 온종일도 할 수 있었으나, 활을 잡거나 검을 쥐면 일각도 견디기 힘들었다. 궁도는 몸을 닦는 것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부황의 엄한 훈계가 아니었다면 사장 근처는 얼씬도 아니하였으리라. 연무장으로 나가 무예를 익혀야 할 때면 도망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였다. 승마도 궁술도 검술도 그렇게 십 수 년을 배워 간신히 부끄럽지 아니할 만큼의 실력을 쌓았다. 그러한 그가 고작 몇 번의 시범과 몇 마디 말로 노를 젓는 법을 익힐 수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연향 역시 자신이 하는 짓이 어설퍼서 웃음이 났으리라. 그러나 착한 연향은 그의 서투름을 비난하지도 놀리지도 아니하였다. 어리지만 사려 깊고 다정한 아이였다. 


 노를 붙들고 한 시진 넘게 진을 빼서 정신이 다 혼미하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손에 익혀온  비파를 잡으니 다시 마음이 평연해졌다. 승명은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결에 맞춰 천천히 줄을 고르기 시작하였다. 첫 소리는 아주 맑았다. 울림이 깨끗한 음율이 고요한 연당 위로 흘렀다. 좁은 소리는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넓은 소리는 연지의 물속으로 스미어 들었다. 소리가 일어나고 스러지며 그의 손길을 따라 높고 낮은 소리들이 한데 어우러졌다. 슬을 탈 때에는 어딘가 슬프고도 애처로운 가락이었는데, 비파의 곡조는 그저 맑고 즐거웠다. 그녀의 마음 속 깊이 깃든 설렘을 담아낸 듯한 곡조였다. 연향은 홀린 듯이 소리에 심취하였다. 그의 곡조는 귀 기울여 듣고 싶게 만드는 깊은 멋이 있었다.   


 “그대는 확실히 금이나 비파를 잡는 것이 노를 잡는 것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


 이래서 사람은 어울리는 일을 하여야 하나 보았다. 못하는 일을 억지로 권한 것 같아 연향은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악에 능통한 그대를 벗으로 두었으니, 황태자 전하께서도 필시 악을 즐기시겠구나.”

 “예. 듣는 것도 연주하는 것도 기꺼워하십니다. 금과 비파, 피리까지 다루시지 못하는 것이 없지요.” 

 “나를 안내하여 주었던 여관이 이르기를 영빈각 현판의 글씨도 황태자 전하께서 새로 쓰셨다 하더구나.”

 “보시니 어떠하더이까.”

 “서체가 물 흐르듯 유려하고 단아하여 한참을 눈여겨보게 되더구나.”

 “그렇습니까.”

 “어찌 그대가 흐뭇해 보이는가?” 

 “벗이니까요. 태자 전하께서는 그림도 잘 그리십니다. 황후궁에는 전하께서 몇 해 전에 모후의 탄연을 기념하여 병풍에 그린 산수화가 전시되어 있다합니다.” 

 “그도 황태자 전하께 들었느냐.”

 “궐 안 모두가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일화인데 여관이 그러한 이야기는 아니 하더이까.” 


 겉으로 드러내어 내색하지 아니하여도 노를 젓는 일과 관련하여 은근히 의기소침하여 하는 것 같아서 그의 심사를 달래어주고자 아무렇게나 꺼내본 이야기에 그가 이렇게 희색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다. 아무개는 아무래도 황태자를 몹시도 흠모하는 모양이었다. 무덤덤하였던 얼굴이 황태자의 글씨를 칭찬하자마자 바로 밝아졌다. 그와 황태자와의 교유관계가 무척이나 돈독한 듯 보여 연향은 조금 시샘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과 혼담이 오가는 황태자의 총애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시기가 아니라는 것만은 어렴풋하게나마 자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좋은 것이 좋은 거라고 그녀는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아무개를 통하여 황태자에 대하여 아는 바가 늘어난다면 그를 대면하는 자리가 조금 더 편해질 터였다. 그러므로 연향으로서도 이 화두를 꺼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대는 전하와 아주 가까워 보이는데, 전하께서는 어떠한 분이시냐? 내 두 분 공주님은 뵈었으나 아직 황태자 전하를 뵌 적이 없어 궁금하구나. 문명 공주께서는 음전하신 분이었고, 혜명 공주께서는 쾌활하신 분이었다. 전하께서는 어느 공주님을 닮았는가?” 


 “윗분들에게는 예의바르고 품행이 단정하니 첫째 공주와 가깝기도 하고, 아랫사람에게는 관후하여 전하를 마음으로부터 따르는 이가 많다 하니 사람이 주변에 많은 것은 둘째 공주와 비슷하기도 하나이다. 하나 황실 내관들의 말에 따르면 언행이 반듯하고 희비가 명확하지 않은 차분한 성정은 폐하를 탁하였다 하고, 후덕하고 자상한 성품은 황후 마마를 닮았다 하더이다.”


 “자애로우시고 침착하셔서 주위에 그대처럼 전하를 흠모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냐?”

 “뿐만 아니라 예와 악에 능하고 학문 또한 뛰어나 서연을 맡은 관료들의 칭송도 자자하다 합니다.”

 “여러 분야에 두루 통할 만큼 재주가 많으실 뿐더러 성품 또한 어질고 온화하시니 도무지 흠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완벽하신 분이라는 소리가 아니냐.”


 틀린 구석이 없는 소리였고 타고나기를 그다지 겸손한 성정도 아니었으나 차마 본인의 입으로 그렇다 맞장구치기는 민망하였다. 승명이 답을 주저하는 사이에 연향이 뜻밖의 평가를 입에 담았다.  


 “내 보기에 황태자 전하께서는 조금, 아니 많이 밉상이시구나.”


 승명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무어라 하셨습니까?”

 “밉상이라 하였다.”


 그러나 연향의 입에서는 재차 같은 소리가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밉상이라니, 그러한 소리는 난생처음이었다. 


 “현주께서 하고픈 말을 고르지 아니하는 성정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와 같이 불경한 언사를 어찌 그리도 태연히 하신다는 말입니까. 혹여 금일의 언사가 태자 전하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이 몸이 태자 전하와 친분이 있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염두에 아니 두십니까?” 

 “하여 아무개는 내가 전하께 밉상이라 하였다고 이를 참이더냐?”

 “그는 아니지만…….”

 “상관없다. 내 말이 알려진들 성정이 어질고 아랫사람에게 관후하시다는 그 태자전하께서 설마하니 나를 죽이시기야 하겠느냐. 기껏해야 혼담이 엎어지는 정도겠지.”

 “허면 그와 같은 언사를 전하 앞에서도 하실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할 수는 있으나, 아니할 것이다. 그대가 그러하였듯 나 역시 전하를 뵙게 되면 전하께 칭송만 늘어놓을 심산이다.” 

 “방금 알려져도 개의치 않는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대도 태자전하께서 무결하신 분이라 하지 않았더냐. 그렇다면 높은 자리에서 모두에게 귀히 받들리며 성장하셨을 터인데 모든 것이 완벽해서 외려 밉상이라는 소리를 들으시게 되면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느냐. 내 그를 근심하여 피하겠다는 소리다. 내 비록 어리지만 이토록 생각이 깊다.”


 연향이 천연하게 늘어놓은 터무니없는 소리가 기가 차서 화는커녕 웃음만 새어나왔다. 황실의 혼사는 정략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고작 정혼녀에게 밉상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여 엎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으나 연향이 생각하는 바가 참으로 귀여웠다.   


 “본디 물이 너무 깨끗하면 고기가 살지 못한다 하였다. 그대가 평하였듯 전하처럼 뭐든 잘하시는 분께서 이 나라의 황태자이기까지 하면 다른 이들은 전하를 볼 때 어떤 기분이겠느냐? 억울하고 속이 상하고 스스로가 싫어지지 않겠느냐. 사람이 어딘가 좀 허술한 구석도 있어야 정이 가고, 편도 생기는 법이다. 굳이 따지자면 아무개 정도가 크게 모자라지 않으니 딱 좋다.”


 승명은 처음 밉상이라는 평을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할 말을 잃었다. 만일 이 자리에서 자신이 황태자라고 밝힌다면 연향이 과연 어떠한 얼굴을 할지, 지금으로서는 다만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는 훗날의 즐거움을 위하여 그는 장난기 섞인 충동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연향은 아마도 금일의 언사를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리라. 신분을 밝혀야 할 때가 찾아와서 일이 그리되면 이 일을 두고 연향을 많이 골려 주겠다고 승명은 생각하였다. 


 “그대는 금도, 비파도 잘 타고, 음성도 외양도 모두 아름다우나, 달음질을 못하여 고작 몇 리도 되지 아니한 거리에 헐떡이며 주저앉고, 겉으로는 평연한 척하나 심사가 면면에 그대로 드러나니 태자 전하에 비하면 이 얼마나 사람다우냐.”

 “제 심사가 겉으로 다 드러난단 말입니까?” 

 “그러하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몇 번 가까이 대하여 보니 알겠다. 그대는 호기심이 일면 커다란 눈동자가 더 커지며 흡사 구슬처럼 반짝인다. 유쾌하거나 흥이 일어나면 오른손 검지를 작게 까닥이며, 웃음을 참을 적에는 표정을 굳히기 위하여 입매에 힘이 들어가 아랫입술의 주름이 사라지고, 민망하여 지면 왼쪽 귓불부터 붉어진다. 그리고 심사가 틀어지면 반드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아무리 말간 얼굴을 하고 평정을 가장하면 무엇 하느냐. 사소한 버릇 속에 심경이 잘 닦인 거울처럼 명징하게 드러나는 것을. 그리 싫은 얼굴을 하지 마라. 칭찬이다.”  


 팔각정에서 보았을 적부터 연향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라고 여기긴 하였으나 생전에 누군가를 이토록 주의 깊게 바라본 적이 없었던 승명에게 연향의 말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대체 어떠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고작 세 번의 만남에 그조차 인지하지 못하였던 사소한 몸짓까지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승명은 그녀의 언사와 그 속에 깃든 마음의 무게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하여 그는 실없는 소리로 그녀의 진심을 가볍게 흘리고자 하였다. 


 “전혀 그리 들리지 아니하는데, 정녕 칭찬이 맞긴 하나이까?” 

 “물론이다. 어제 그대는 내게 몸을 쓰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하였지. 허나 그대는 내가 뛰자 하였을 때 숨을 헐떡이면서도 끝까지 함께 달려주었다. 싫어하는 일이면 응당 폄하하기 마련이거늘, 그대는 내가 나무에 오르고 뜀박질을 하는 것을 비난하지 아니하였으며, 내 이야기를 듣고 깊게 공감하여 주었다. 석교에 있을 때에도 내 시선이 이 나룻배에 머무는 것을 보고 내게 먼저 배를 타자 권하여 주었고, 금일도 동궁에 허락을 청하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나를 결국 이 배에 태워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노를 저어보려고 움직이지 않는 배 위에서 한 시진이 넘게 무던히도 애를 썼지. 그대 또한 황태자 전하의 예동이 될 수 있을 만큼 지체 높은 가문의 공자일진대 자신의 기호를 접고 다른 이를 배려하는 것이 어디 쉬웠겠는가. 미숙하여 꺼리기 쉬운 일조차 마다하는 법이 없이 성심을 다하여 임하니, 그 성실한 태도를 나는 그대의 수려한 외양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 비록 오늘의 그대는 완벽하지 않았으나 내게는 모든 것이 완벽하였던 팔각정에서보다 곱절은 더 아름답게 보였다. 이는 그대가 겉으로 드러나는 재주나 단아한 외모 이상으로 내심이 고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이어지는 연향의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었다. 그것은 연심의 다른 표현이었다. 긴가민가하였던 연향의 감정이 또렷한 색채를 드리운 채 승명의 눈앞에 펼쳐졌다. 팔각정에서의 만남은 우연이었고, 영빈각 앞에서의 조우는 충동이었으며, 이곳 영수전에서의 두 번의 만남은 호감에서 비롯되었으나, 그녀의 진심을 깨달은 이상 더는 이와 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만날 수 없었다. 승명의 얼굴이 절로 굳었다. 비할 데 없이 영특하지만 아직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에 불과한 연향이 스스로의 감정의 색이 며칠 전과 달라졌음을 자각했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의 감정이 분명하여진 이상 아무개와 연향의 인연은 끝이었다. 이제는 싫어도 황태자 승명으로 돌아와야 할 때였다. 진실을 밝힐 적당한 시기를 놓쳐 뜻하지 않은 자리에서 원하지 아니한 방식으로 자신이 신분을 숨겨온 것이 드러난다면, 신의와 예로 맺어져야 할 부부의 연이 거짓으로 얼룩진 채 시작부터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고백을 받고나서 떠밀리듯이 바로 자신이 황태자라 밝힐 수도 없었다. 그녀에게도, 그리고 승명 자신에게도 마음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내일 한 번만 더 같은 시간에 이곳으로 나와 주실 수 있겠나이까.” 


 마지막 운운에 연향의 눈빛이 흔들렸다. 승명은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현주께 반드시 하여야 이야기가 있으니 꼭 나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연향의 대답을 듣지 아니한 채 비파를 들고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배에 내버려둔 채 승명은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굳어진 채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던 연향이 잠시 후 아무개를 부르며 일어났다. 돌아보는 그를 급하게 따르려다가 연향은 치맛자락을 밟고 휘청거렸다. 승명은 조모의 유품이라 어린 시절부터 제 몸 같이 여겨온 비파를 내던지고 연향을 향해 뛰었다. 간발의 차로 승명은 연지의 물속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던 연향의 팔을 간신히 붙들 수 있었다. 거친 숨이 지척에서 뒤섞였다. 끌어안긴 품 안에서 맞닿은 가슴이 가쁘게 뛰었다. 이대로 연당에 처박히는 줄 알았던 그녀보다 그가 더 놀란 모양이었다.  


 “이제 괜찮으니…….”


 놓아달라고 하려 하였으나 끌어안은 두 팔에 실린 힘은 조금도 풀어지지 아니하였다. 선이 고운 생김에 호소력 깊은 미성으로 언제나 다정하고 부드러운 언사만을 하여 미처 느끼지 못하였던 사내의 체취가 짙게 느껴졌다. 그는 연향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한 번 더 꽉 끌어안은 후 천천히 두 팔을 풀었다. 


 “어찌 그리 조심성이 없으십니까. 가슴이 다 내려앉는 줄 알았습니다.” 


 혼을 내는 엄한 음성이 잊고 지내었던 나이차를 상기시켰다. 상대가 강하게 나오면 그러할수록 더욱 튕겨져 나가는 당돌한 성품의 연향이었지만 저를 근심하는 말 앞에서는 수굿해질 수밖에 없었다. 연향은 순순히 사과하였다. 저를 감싸고 있는 그의 체온과 끌어 안겼을 때의 감촉이 살갗에 그대로 맺힌 것 같아 차마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꾸벅 숙여 구해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나로 인하여 소중히 여겨온 비파가 상하였으니 어찌하여야 좋을지 모르겠다.” 


 승명은 바닥에 내팽개쳐진 비파를 쓱 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보였다. 손에서 비파가 떨어지는지도 깨닫지 못하였다. 조모의 하나 뿐인 유품이 망가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되어도 동일하게 행동을 하였으리라는 것을 잘 아는 승명은 자신의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현주께서 다치지 않았으니 되었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는 조용히 비파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부끄러운 양 저에게 비껴서 있는 연향을 부드럽게 다독이고는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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