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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냥이 Sep 05. 2024

맥脈, 衇, 霡 : 본 1부 황실의 꽃 4

본 제1부 황실의 꽃

 


제4장 영수전의 석교




 서적을 모아둔 전각인 숭경각 뒤편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언덕 위에 올라서면 영빈각의 전경이 훤히 보였다.


 있지도 아니한 병을 구실 삼아 연향을 거절하여 놓고서도 심사가 편치 않았던 승명은 결국 서책을 놓고 산책을 겸해 밖으로 나섰다. 발걸음이 하필 숭경각 뒤로 향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을 따름이다. 어수선하게 일어난 심사를 달래고자 밖으로 나섰고 발길이 닿는 대로 무심히 걷다 보니 어느덧 언덕 위였고, 위에 서 있다 보니 자연스레 아래에 위치한 영빈각으로 눈길이 향하는 것일 뿐이라고 승명은 고집스레 되뇌었다.


 그러다가 그는 때마침 전각을 나서는 연향을 보게 되었다. 황태자가 오지 않으리라는 전갈을 받고 떠나는 모양이었다. 거짓으로 만나지 아니할 구실을 지어낼 때에는 아무렇지도 아니하였는데, 축 처져서 돌아가는 모양새를 두 눈에 담으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승명은 공연한 짓을 하였노라고 스스로를 탓하였다. 차라리 보지 말 것을 그러하였다. 내성 밖 팔각정에서 만났을 때는 영롱한 구슬처럼 반짝반짝 빛나던 아이가 지금은 흡사 시든 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도저히 그대로 처소로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승명은 연향 앞으로 나서지 않으리라 하였던 다짐을 결국 꺾고 말았다.


 그가 타인의 심사를 헤아려 볼 경우에는 그로 인하여 얻고자 하는 바가 있을 때뿐이었다.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았기에 승명에게 다른 이들은 모두 같았다. 다를 것이 없으니 형평을 지키는 일 또한 과히 어렵지 아니하였다. 어떠한 일이 닥쳐도 침착하고 매사에 공평무사하며 만인에게 온화한 황태자 승명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감정에 사로잡혀 충동적이 되는 일 따위 일찍이 그의 삶에는 없었다. 고작 한 번 만났을 뿐인 자그마한 현주 때문에 자신답지 아니한 짓을 하는구나 싶으면서도 마음이 쓰여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갑자기 황태자가 눈앞에 나타나자 연향을 안내하던 여관은 몹시 놀란 듯 보였으나 승명이 가볍게 손짓을 하자 아무 말 없이 물러갔다. 황성에서 일하는 이들 가운데 승명이 따로 명하지 찾지 아니하는 한 궁인을 가까이 두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아랫사람에게 관대한 것과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별개였고, 승명은 시종은 물론이요 근위조차 번거로워하여 거리를 두고 따르게 할 만큼 좀처럼 타인에게 곁을 내주지 아니하는 성품이었다.


 “어찌 여기에 아무개가······.”


 승명은 난처한 듯 웃었다. 하필 여관이 있는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꼼짝없이 정체를 들켰다 싶어 스스로 신분을 밝히고 금일의 무례를 사과하려 하였을 차였다.


 “그대도 황태자 전하의 예동이었느냐?”


 뜻밖의 반문을 받고서야 승명은 비로소 자신의 허언을 상기해 낼 수 있었다. 연향은 황태자가 고뿔이 심하여 운신조차 어려울 지경이라 전해 들었을 터이니 그녀의 생각이 예동으로 번질 만도 하였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황성에서 일하는 여관이 어찌 조정에 출사 하지도 아니한 귀족 자제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구구절절 전후 사정을 설명하기도 애매하였던 승명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받았다.


 “현주께서도 전하의 환후에 관해 들으시고 돌아가시려던 참이었나 봅니다. 이 몸 또한 그러하나 궐 안 가득한 홍엽의 빛에 마음이 이끌려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아니하더이다. 하릴없이 궁 주위를 서성이다 보니 이리 인연이 닿기도 하는군요.”


 “그대의 처지가 나와 같구나.”


 “어차피 황태자 전하는 뵐 수 없게 되었으니 함께 궐 안 단풍 구경이라도 하시겠습니까.”


 “규문의 처자로서는 사양함이 옳을 것이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재미난 일에 삼가는 법을 모른다. 허니 아무개는 얼른 앞장서라.”


 승명의 청유에 언제 침울한 기색을 하였는가 싶게 연향의 얼굴이 대뜸 밝아졌다. 햇살처럼 환한 얼굴 가득 희색이 만연하여 승명이 공연한 근심을 하였다 싶어질 정도였다.


 승명은 연향을 데리고 황태자궁을 빙글 돌아 태상황궁 쪽으로 향하였다. 상황궁인 영수전은 승명의 증조부인 원종 황제께서 당시 황태자였던 진종 황제께 보위를 물려주신 뒤 기거하시던 황성 내 별궁이었다. 원종 황제께서 승하하신 뒤로는 궐을 관리하는 궁인들만이 소제를 위해 이따금 오갈 뿐 인적이 드물어 승명이 드넓은 황성 안에서 유독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황궁 안에 이러한 곳이 있는지 미처 몰랐다.”  


 “황제 폐하의 조부이신 원종 황제께서 태상황으로 계실 때 지내시던 궁입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것은 대전 옆의 어화원이고, 꽃이 많아 화사한 것은 후궁전 앞의 자화원이라 하지만 이곳 영수전의 어원이 가장 고요하고 운치 있습니다.”


 “아무개는 황성에 대해 잘 아는구나.”


 십여 년을 이곳에서 살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던 승명은 연향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를 붙여 두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일러주셨습니다.”


 “전하의 예동으로 지낸 지 오래되었나 보구나.”


 “적어도 현주보다는 오래되었겠지요. 조금 더 안으로 가시겠습니까. 연지를 가로지르는 석교 위에 가만히 서 있노라면 연당의 잉어들이 아래에 모여들어 구경하기에 좋습니다.”   

 “잉어가 사람을 따르다니 신기한 일이로구나. 그도 전하께서 일러주셨느냐?”


 “그건 궁인들 몰래 이곳에 올 때마다 잉어에게 먹이를 주어 버릇하여 그렇습니다.”


 그의 천연한 대답에 연향이 맑게 웃었다. 연향은 이름 그대로 활짝 피어난 연꽃처럼 곱고 선한 생김을 하고 있었다. 세상사 번뇌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얼굴인지라 그녀가 웃는 양을 하면 그 모습을 두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간질간질하니 따스해질 정도였다.


 “얼른 가보고 싶구나. 뛰어가자.”


 연향이 돌다리를 향해 먼저 뛰었다. 황제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황태자다운 언행을 부지중에 강요당하여 온 승명은 황성 안에서 뛰어본 적이 없었다. 승명은 내심 당황하였지만 이내 그녀를 따라 뛰었다. 먼저 출발했다 하여도 치맛자락을 휘어잡고 뜀박질하는 어린아이 하나 못 이길까 싶었으나, 연향의 발이 생각보다 빨랐으므로 어느덧 승명도 최선을 다하여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석교에 먼저 닿은 것은 연향 쪽이었다. 한참이나 뒤처져서 헐떡이며 도착한 승명은 돌다리의 난간을 부여잡고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그 모습을 보고 연향이 깔깔 웃으며 놀려댔다.


 “허우대만 멀쩡하였지 궐공이 따로 없구나. 일각도 아니 뛰었는데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지 않느냐.”


 “그는, 내, 몸을 쓰는 일에 익숙지 아니하여······.”


 “되었다. 앉아서 숨이나 고르고 말하려무나.”


 그녀의 말대로 난간에 기대어 앉은 승명은 상기된 얼굴로 놀라움을 표했다.


 “한데 현주는 어찌 그리 잘 뛰십니까. 여인이 그리 잘 달리는 건 처음 봅니다.”


 “내게는 오라비만 넷이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저기 보이는 나무도 오를 수 있다.”


 연향에 대하여 시종인 왕오가 들려준 수많은 찬사 가운데 그녀가 나무를 탈 수 있다거나 달음질을 잘한다는 말은 없었다. 내성 밖으로 홀로 말을 타고 나온 것이나 종아리가 보일 만큼 치맛단을 높이 휘어잡고 신나게 달리는 것을 보면 연향은 보통 아닌 왈가닥인 것이 분명하였다. 궁에 사는 여인들은 모두 화원에 피어난 꽃처럼 고요하고 어여쁘지만 생기라고는 조금도 없어서 승명은 도리어 눈이 부실 만큼 활달한 연향이 그저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참으로 대범하십니다. 높은 곳에 올라서면 시야가 탁 트여서 시원하겠군요. 허나 저리 높은 나무인데 내려올 때 무섭지 않겠습니까?”


 “그대는 다른 이들과 많이 다르구나.”


 “다르다니 무엇이 그러하다는 말씀이신지요?”


 “나는 저자를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백성들이 무얼 사고파는지 그들이 평소 즐겨 먹는 것이 무엇이고 즐겨하는 놀이가 무엇인지 항시 궁금하기 때문이다. 또 말을 타는 것을 즐긴다. 평소의 나는 규문에 갇혀 살지만, 말을 달릴 때만은 내가 이 너른 땅 전부를 품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무에 오르는 것도 좋아하지. 높은 곳에 오름으로써 눈앞의 일에만 급급하여 멀리 보지 못하게 됨을 경계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금처럼 달리기도 자주 한다. 약한 몸에는 강한 뜻이 깃들기 어려우므로 건강할 때 심신을 가꾸고자 함이다. 하지만 모두가 내게 이유조차 묻지 아니하고 나는 여인이기에 그리하면 아니 된다고들 하였다. 무턱대고 아니 된다고 말하지 않은 이는 그대가 처음이다.”


 승명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일상에 제약을 받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보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그조차도 필연적인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을 따름이다. 승명은 고작 한 번 만났을 뿐인 연향에게 유독 마음이 쓰인 연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아주 다른 듯 보이는 그녀가 기실은 그와 지독히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와 다른 일면에 눈길이 가고, 비슷한 면에 마음이 가는 것은 승명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연향이 열네 살 소녀이기 이전에 기주성의 현주이듯, 그는 조효라는 한 사내이기 이전에 현 황제의 하나뿐인 후계자였다. 그가 떠올릴 수 있는 최초의 기억 속에서조차 그의 아비는 황제였으며 그의 어미는 황후였다. 조효라는 개인보다 황태자 승명으로 살아온 시간이 길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에 그는 그 누구에게도 온전한 자신을 이해시키기를 포기해 버렸다.


 철이 들기도 전에 황태자가 되어 그 지위에 어울리는 언행을 익혀야 했던 그가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었던 최선의 배려는 그저 이따금씩 홀로 된 자리에서 숨통을 틔워 보는 것뿐이었다. 그러한 자신의 애처로운 그림자가 한순간 연향에게 덧씌워져 보였다.


 승명은 저를 황태자 아닌 조효라는 사내로 대해준 연향을 그 순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었고, 누구보다도 그녀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분이었다. 찰나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나마 남들과 다르기에 외로워했을 연향에게, 타인으로부터 오롯이 받아들여지는 기쁨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승명은 자신의 진심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신중히 말을 골랐다.


 “세상에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구분이 있을 따름이지 남녀가 할 일이 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있는데 어찌 남녀라는 두 가지 잣대로 딱 자를 수 있겠습니까. 좋아하는 바를 당당히 밝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습니다.”


 연향은 맑은 눈으로 한참 동안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그대는 누이가 있는가?”


 “두 명 있지요. 어찌 물어보십니까?”


 “그대의 누이들이 부러워서 물어보았다. 나의 오라버니들은 한심하고 유치한 장난만 일삼는 어린애들이다. 세 살 터울의 아우 형운이가 제일 의젓하니 더 말해 무엇하겠느냐.”


 모후와 부황께 조석으로 문안을 여쭐 때 잠시 얼굴을 보는 것이 전부일뿐 최근 몇 해 동안 공주들과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다과 한 번 나눈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승명은 미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무심도 이런 무심이 없었다.

 “저 또한 누이들에게 과히 좋은 오라비는 아닙니다. 장난이 잦은 것은 모다 공자들께서 현주를 아끼시기 때문이겠지요. 마음이 없었다면 농도 걸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모로 모자란 오라비들이지만 나 역시 그들을 몹시도 아낀다. 그렇지 아니하였다면 그 무수한 장난을 어찌 다 받아주었겠느냐.”


 승명과 연향은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범상치 않은 성정의 연향답게 받아치는 재간이 여간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다음에 보면 진명을 묻겠다고 하시지 않았나이까. 어찌하여 여태 아무것도 묻지 아니하십니까?”


 “마음이 바뀌었다. 그대가 나와 마찬가지로 황태자 전하의 예동임이 자명한데 굳이 이름을 물어 무엇하겠느냐? 신분을 알게 되면 서로 예를 갖추어야 할 터인데, 그대야 줄곧 내게 존대를 해왔으니 잃을 것이 없으나 나는 하대를 할 수 없게 되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것이니 이름을 알게 되면 나만 손해가 아니냐.”


 연향의 두 눈이 짓궂게 빛났다. 그녀는 씩 웃으면서 승명 앞에 주저앉아 그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숨결이 얽힐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어여쁘게 물든 단풍잎보다 더 붉은 입술이 승명의 눈앞에서 조물조물 움직이며 짓궂은 언사를 빚어냈다.


 “방금 조금 당황하였지? 그대가 날 놀린 것에 대한 복수이다. 기주의 현주 대연향은 은혜도 원한도 잊지 않고 돌려주어야 직성이 풀리거든.”


 볕 아래서 너무 오래 있었던 모양이었다. 묘하게 목이 타는 기분이라 승명은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시선을 피하여도 달음박질을 했을 때처럼 빠르게 뛰는 가슴은 여전하였다.


 “그렇군요. 지금으로서는 잃을 게 없으니 현주께서는 굳이 불리한 위치를 자처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이로군요.”


 “내 이름을 안 물어 서운하더냐?”


 “서운할 게 무에 있겠나이까. 잊으셨습니까. 시작은 제가 먼저 했습니다.”


 “한데 내 눈에는 심사가 틀어진 듯 보인다.”


 “잘못 보신 듯합니다.”


 “그대가 착각이라 하니 그 말이 맞는 것이겠지.”


 선선히 답한 연향은 석교 아래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무개의 장담대로 다리 아래에 노랗고 붉은 빛깔의 커다란 잉어들이 잔뜩 몰려들어 있었다. 그녀는 잉어들을 가리키며 승명을 돌아봤다.


 “정말로 잉어들이 모여들었다. 황실 연지에 사는 잉어는 크기도 범상치 않게 크고 비늘색도 아름답구나. 오늘은 밥을 아니 가져왔느냐? 이리 잔뜩 모인 것을 보니 허기가 많이 진 모양이다.”


 “급히 나오느라 오늘은 두고 왔습니다. 내일 다시 와서 먹이를 주어야겠군요.”


 “먹이 주는 것을 나도 구경 와도 되겠느냐?”


 짧은 만남이 아쉬웠던 것은 승명도 마찬가지였던지라 그는 순순하게 허락했다. 그는 연향의 눈길이 머문 자리에서 묶여있는 나룻배를 발견하고 엷게 웃었다.


 “허면 오반을 드시고 미시까지 이리 오시겠습니까? 내일은 잉어에게 먹이를 주고 저 아래 묶여있는 배라도 타지요.”


 “예 있는 것은 모두가 황실의 재산인데 멋대로 올라타도 되겠느냐?”


 “그러면 제가 가는 길에 동궁에 청을 넣어 황태자 전하나, 여의치 않으면 동궁 내관장의 허가라도 받아두겠습니다. 오늘은 몰래 들어와 짧게 머물다 가지만 미리 출입허가를 받아두면 여유 있게 지내다 가도 될 것입니다.”


 연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승명과 함께 석교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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