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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뚱냥이 Sep 12. 2024

맥脈, 衇,霡 : 본 1부 황실의 꽃 6

본 제1부 황실의 꽃 6장 그림에 깃든 마음

1부 황실의 꽃


제6장. 그림에 깃든 마음




 

 황태자는 금일도 오반을 마치고 잠시 자리를 비우는가 싶더니 일과가 끝난 뒤로는 계속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작일과 한 치도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다. 


 간혹 따르지 말라며 금이나 피리를 들고 잠시 산책을 겸해서 외출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책임감이 강한 승명의 성정 상 이틀 연속으로 그러한 일이 반복되는 경우는 흔치 아니하였다. 


 그러나 외성 밖 팔각정에 다녀온 것까지 헤아린다면 직속 시종인 왕오조차 모르는 승명의 외출이 벌써 사흘째였다. 


 황제의 유일한 아들이며 차기 보위 계승자의 안위에 무심할 수는 없는 법인지라 그를 지키는 시위 부대는 기척을 지우고 따라다닐 뿐 문자 그대로 승명이 혼자 있는 것은 아니라서 그의 말 없는 외출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왕오는 시위를 불러 물어볼 참이었다. 


 주인의 의지를 존중하여 그간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척을 하고 있었을 뿐, 왕오로서도 눈 뜬 봉사요, 귀가 밝은 농아 노릇을 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평소 향이 좋다며 즐겨 마시던 차를 바로 앞에 내려놓아도 거들떠보지도 아니한 채 그림에 집중해 있는 황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왕오는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저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작일처럼 축시가 넘도록 그림에만 매달려 있을 것 같아 도저히 말없이 물러갈 수가 없어진 까닭이다. 


 “화공을 불러 명하시면 될 것을 어찌 자시가 가까운 이슥한 밤까지 아니 주무시고 손수 그리십니까?” 


 작은 병풍처럼 세 번 접어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한 자 남짓한 길이의 족자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짐작건대 소일은 아닌 듯하고 누군가를 위한 선물로 보이나, 아무리 되짚어보아도 황태자가 손수 그림을 그려줄 만큼 가까운 친족 가운데 근시일 안에 생신을 맞이할 황족은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에게 주려고 일국의 황태자가 이틀을 거의 꼬박 새우다시피 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단 말인가. 


 “선물은 마음이 먼저라 하지 않느냐.”


 “대체 누구에게 보내시려고 그리 정성을 들이신단 말입니까. 소인, 간밤에도 전하께서 축시가 넘어 침전에 드시는 것을 뵈었습니다. 계속 이러시면 건강을 해치십니다.”


 황태자는 아무 말 없이 그림 마무리에만 매진했다. 왕오는 착잡한 얼굴을 하고서 족자 위에 그려진 세 점의 그림으로 눈길을 옮겼다. 


한참 동안 유심히 그림을 쳐다보던 왕오는 세 점의 그림 속에 있는 여인이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성 팔각정 앞에서 말고삐를 묶고 있는 여인도, 영수전의 연지를 가로지르는 석교에 기대어 잉어를 바라보는 여인도, 나룻배에 앉아 미소 짓고 있는 여인도 모두 한 사람처럼 보였다. 화폭 속에 여인과 같이 있는 사내의 차림새 또한 묘하게 눈에 익다 싶어 곰곰이 생각을 곱씹다가 그는 그것이 지난 며칠간 제 주인의 차림새와 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승명의 말 없는 세 번의 외출에 대한 답이 화폭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저를 비롯한 내관들에게 뒤따르지 말라 명하시고는 그림 속의 여인을 만나고 다니셨다는 말인가. 자리에 어울리는 진중함을 지닌 승명이 그답지 않게 와병을 칭하면서까지 현주 대씨와의 만남을 한사코 거부하였을 때부터 마음을 썼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돌이켜 보니 자신이 영빈각에 다녀온 직후에도 황태자는 자리를 비웠었다. 그것이 모두 저 여인과 함께하기 위함이었다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간의 일들을 찬찬히 헤아려보던 왕오의 안색이 차츰 파리하게 질려갔다. 탁자 앞에 굳어진 듯 선 왕오의 속 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 번째 그림을 매듭지은 승명은 차분하기 이를 데 없는 어조로 운을 떼었다. 


 “그리 지켜보고 서 있지 아니하여도 거의 다 끝났으니 그만 좀 보채거라.” 


 승명이 워낙 관대한 주인이기도 했거니와 왕오 역시 귀찮다고 거듭 물리쳐도 조금도 굴하는 기색 없이 졸졸 따라다니며 묻지도 아니한 소리를 잘도 늘어놓을 만큼 천연덕스러운 성정인지라, 주종 간이라기보다는 형제처럼 지내온 그들이었다. 상전을 과히 어려워하지 아니하는 왕오의 되바라진 성격상 세 번 접을 수 있는 모양새의 족자이니 필시 그 옆에 한 점 더 그릴 것이 자명하거늘 저를 우부로 아심이냐며 투덜거릴 법도 하건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 도리어 의외였던 듯 승명이 고개를 들어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곳에는 그림을 그리지 아니할 것이다.” 


 왕오의 눈길이 족자 위의 비어 있는 공간에 붙들려있음을 깨달은 승명은 탁자 한 편에서 벼루를 끌어와 먹을 갈면서 친절히 일러주었다. 


 하지만 왕오는 이제 승명이 빈 공간에 그림을 그리든 글씨를 쓰든 알 바 아니었다. 화폭 속의 여인은 그 차림새로 보아 결코 황궁의 여관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체신을 잃고 황궁에서 일하는 여관을 건드려도 문제지만, 상대가 황성에 출입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가문의 소저라면 이는 더 큰 사달이었다. 


 이 일이 주위에 알려지면 결코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관례를 목전에 둔 승명의 혼사 이상으로 나라 안의 세력가들이 집중하고 있는 사안은 흔치 않았다. 황태자와 염문이 퍼지면 그 상대가 누가 되었든 황성과 조정 전체가 발칵 뒤집힐 터였다.


 권력자의 총애란 본디 그러한 것이었다. 하물며 승명은 차기 보위 계승자였다. 그의 총비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허울뿐인 황태자비가 되는 것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한 기회를 어찌 그 탐욕스러운 무리가 가만히 두고 볼 것인가. 


 그와 같은 일을 경계하여 황제인 영덕제는 제위에 오른 후 후궁은커녕 황후 이외의 여인은 가까이 두지도 아니하였다. 이제 고작 열네 살의 어린 현주를 승명의 곁붙이로 일찌감치 낙점한 것도 이와 같은 사태를 방지하고자 함이었을 것인데, 얼마 전만 하여도 여색에 관심조차 없던 제 주인이 대체 어떠한 경로로 화폭 속의 소저를 만나 손수 그림까지 그려줄 만큼 급격히 가까워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채였다면 좋았으리라.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께 이 난감한 사태에 대하여 대체 어찌 고하여야 한단 말인가. 왕오는 눈을 뜬 채로 악몽을 꾸는 듯싶었다. 한참을 주저하다가, 그는 주위에서 들을세라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여쭈었다. 


 “전하, 화폭 속에 있는 여인이 대체 뉘신지요. 그간 소인에게 뒤따르지 말라 이르신 것이 모다 그 때문이옵니까.”


 고작 저 여인 때문에 어명을 거역하고 기주의 현주를 돌려보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매양 예와 악만 즐기시는 양 꾸미시어 저를 방심케 하시고 어찌 이러실 수가 있느냐고 주인을 탓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였으나, 차마 그토록 불경한 언사는 입에 올리지 못하고 왕오는 애꿎은 제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주인이 구구절절 해명을 해주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여도, 저리 천연덕스레 시치미를 뗄 것이라고도 생각지 못하였던 왕오는 그저 기가 막혔다. 가타부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승명이 손에 들었던 붓을 벼루에 내려놓으며 뜻밖이라는 듯이 물었다.


 “네 정녕 누군지 몰라 묻는 것이냐?”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일전에 영빈각에서 보지 않았더냐? 기주의 현주이다.” 


 “예에?” 


 승명은 그가 놀라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붓을 들어 비어 있는 곳에 유려한 필체로 법화경의 문구를 쓰기 시작하였다. 


 왕오는 억울하였다. 승명의 지적대로 주인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왕오가 영빈각에서 기다리는 대연향 현주를 찾아간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귀천의 구분이란 것이 있으며, 황궁에는 법도란 것이 존재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신분이 낮은 제가 어찌 황태자비가 될 것이 자명한 소저를 바로 올려다보랴. 그때에도 열린 문 너머에서 깊이 허리를 숙인 채 여쭈었다. 


‘태자 전하께서 심한 고뿔로 운신이 편치 아니하신 까닭에 예를 다하지 못하게 되어 몹시 유감이라 전하라 하셨나이다.’ 


그날 그가 본 것이라고는 하다못해 연향의 것도 아닌, 그녀를 모시던 여관의 치맛단과 발뿐이었다.


 ‘내 미욱하여 전하께서 강녕하지 못하심을 모르고 경망스레 찾아와 도리어 폐가 되었으니 어찌 그 죄를 이루 다 논할 수 있겠소. 물러갔다가 쾌차하시거든 다시 문후 여쭈울 것이니 그대가 한 번 더 수고하여 주시오. 나로 인하여 그대를 번거롭게 하여 참으로 미안하기 그지없소.’ 


 이러한 답변조차 연향의 말을 듣고 나온 여관을 통해 전해 들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나 황태자비라는 지체 높은 자리에 어울릴 만큼 현숙하고 음전하다고 감탄하며 물러 나왔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야 백번 만나도 얼굴을 알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황실의 법도대로 문밖에서 여쭈어서 직접 뵙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알아보지 못할 수밖에 없지 않나이까.”


 “그러냐.” 


 승명은 붓을 내려놓았다. 왕오는 어쩐지 자신이 현주를 못 보았다는 말에 제 주인의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고 느꼈다. 차분한 존안은 그대로였으나 주위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아, 왕오는 조금 짓궂은 물음을 입에 담아보았다. 


 “제게는 아니 보겠다 하시고는 다시 찾아가신 것이옵니까.”


 “음. 현주는 내가 태자라는 사실을 모른다. 감출 생각은 없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아직 밝히지 못하였지.” 


 모든 궁금증이 일시에 풀리는 듯하였다. 만일 첫 번째 그림대로 팔각정에서의 만남이 그들의 첫 번째 인연이라면 그건 필시 우연의 소산이었으리라. 성 밖에서 만났을 적에는 별 뜻 없이 신분을 숨겼을 것이고, 그 점이 바로 알려지는 것이 싫어 승명은 이튿날 찾아온 연향을 거부하였을 터다. 그리고 모르는 척 외면하기에는 그예 마음이 쓰여 바로 보러 나갔던 모양이었다. 가려져 있던 앞뒤 맥락을 훤히 꿰뚫어 보며 왕오는 슬며시 웃음 지었다. 


 “하여 현주에게 선물을 주시려 하는 것이옵니까?”


 매사에 무던하다 못해 인사에 무심하기까지 한 승명이 여인을 짓궂게 놀릴 수 있으리라 여긴 적도 없지만, 골린 것이 미안하다고 며칠 밤을 새워 어여쁜 그림까지 그려주며 기분을 풀어주려 할 것이라고는 그야말로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 왕오는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부부의 연으로 묶일 두 사람이었다. 후사를 생각해서라도 사이가 소원한 것보다는 돈독한 것이 바람직했다. 제가 언제 안절부절못했냐는 듯이 왕오는 한껏 흐뭇해졌다. 


 “보기와 달리 감추어진 성정이 만만하지가 않거든.”


 그리 말하는 승명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승명의 눈에는 현주가 어지간히 어여쁜 모양이었다. 왕오는 피식피식 스미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눌러 참고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내일도 만나실 요량이면 다과상이라도 마련하리까.” 


 잠시 생각하는 양하던 승명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되었다. 아직 사실을 밝히지도 못하였는데 다과상을 차려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면, 이 그림과 함께 전하려는 내 진의조차 가벼워 보일까 저어 되는구나.” 


 왕오는 저도 모르게 침음 했다. 그저 어린 누이를 놀리듯이 농을 걸고, 골을 내는 모양새조차 사랑옵게 여겨 귀한 선물을 주려나 하였다. 하지만 승명의 한 마디는 그가 그 어린 현주를 참으로 중히 여기고 있음을 천 마디 이상으로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하기는 사내에게 있어 첫정이란 각별하게 마련이라 들었다. 왕오는 송구한 마음을 담아 깊이 고개를 수그렸다. 


 “부디 소인의 단견을 용서하시옵소서.” 


 “달리 필요한 바가 생기면 따로 이를 것이니 내일은 그저 지필묵만 준비해 두어라.”


 “예, 전하. 이곳은 소인이 치울 것이오니, 전하께서는 이만 침수 드옵소서. 이미 밤이 깊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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