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脈, 衇, 霡 : 본 1부 황실의 꽃 7
본 제1부 황실의 꽃 7장 회자정리 거자필반
1부 황실의 꽃
제7장 회자정리 거자필반
1부 황실의 꽃
7장 상. 회자정리會者定離(만남에는 반드시 헤어짐이 있다)
이튿날은 이른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렸다. 저를 감싸 안았던 아무개의 따스한 체온과 거친 숨결이 지워지지 아니하여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시다시피 한 연향은 조반도 물린 채 오전 내도록 창가에 앉아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무개가 저에게 꼭 하여야 한다던 이야기가 몹시도 궁금하였으나,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차츰 굳어가더니 종국에는 어떤 결심을 담아낸 양 차고 단단하게 변하여버린 그의 얼굴을 떠올라 두렵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리석은 마음은 한 가닥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놓아 달라는 말도 무시한 채 꽉 끌어안던 몸짓과 정작 물속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던 자신보다도 더 격하게 뛰놀던 그의 가슴과 손을 붙들 때의 절박한 표정을 떠올려보면, 그의 감정이 저의 것과 완전히 다를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설령 그와 저의 마음이 비슷하다 한들 어찌할 것인가. 연향은 냉정하게 자문하였다.
이곳은 황성이었다. 자신은 황후 마마께서 친히 선정하시고 황제 폐하께서 눈여겨보신 황태자비 후보였다. 평범한 예동이 아니었다. 황제의 눈에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황태자비 후보가 되었으니 연향의 연모는 오로지 황태자인 승명만을 향해야 했다. 그녀에게 그 외의 다른 사랑은 허락되지 아니하였다. 이는 연향 개인의 사사로운 문제가 아니었다. 황실과 인연이 생겼을 때부터 연향의 연심과 그녀의 혼사는 대씨 가문 및 기주성 전체와 운명을 함께 하고 있었다.
비록 고작 열네 살 어린 나이였으나 연향은 일평생을 기주의 현주로 자라왔다. 그녀의 아비인 호번왕 대수협은 연향에게 그녀가 누리고 있는 풍요는 곧 그녀가 지켜야 할 책임의 대가라고 누누이 훈계하였다. 아무개는 연향이란 사람을 오롯이 이해하여 준 유일한 사람이며, 그를 놓치고 싶지 아니한 욕망이 연향에게 난생처음으로 생겨난 여인으로서의 마음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국혼령이 내려지면 연향은 결국 가문과 기주를 위한 선택을 할 자신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선택 하나하나에 수천수만의 기주성 백성들의 명운이 걸려있다고 배워온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아마도 이 연모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터였다. 그러니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갈 수 없었다. 그녀로서도, 그리고 이름조차 모르는 그를 위하여도 가지 아니하는 것이 맞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이라고, 금일 영수전으로 가지 아니하면 영영 그이를 보지 못하리라고. 가면 아니 되는데, 가고 싶었다. 아무개를 만나 그에게서 완고한 거절의 말을 듣고 싶었다, 언제나 어여쁜 소리만을 해주었던 그의 입에서 냉혹한 거부의 말이 흘러나온다면 차라리 포기도, 체념도 쉬울 듯하였다. 그가 차가운 얼굴로 저를 밀쳐낸다면, 훗날 그 사람과 어린 시절의 순수한 연정이 그리워져도 그를 원망하며 버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향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허락 없이 그를 담기 시작한 것도, 숨길 수 있었던 제 마음을 그에게 들켜버린 것도 모두 자신이었다. 저의 죄를 무고한 그에게 전가할 수는 없었다. 시작이 그녀로부터 비롯하였으니, 마무리도 그녀가 짓는 것이 옳았다. 연향은 입술을 사려 물었다.
더 늦기 전에 이 어리석은 마음이 더 자라나지 아니하도록 도려내기로 다짐한 그녀는 무거운 몸을 추슬러 서안에 앉았다. 그리고 붓을 들었다. 평소 하던 대로 하대를 하였다가 이 서한이 그에게 남는 저의 마지막 흔적이 되리라는 생각에 글을 고쳤다. 아무개와 자신은 처음부터 이어질 수 없는 인연이었다. 미련하게 그를 품은 것은 연향이었으나, 그를 잘라내는 것은 기주성의 현주여야 했다. 그녀는 부러 예의 바르지만 차갑고 의례적으로 느껴질 만한 문구를 골랐다.
‘아무개. 끝까지 이어지지 못할 인연에 함자를 알아서 무엇하리오 만은 마지막 인사를 대신하는 글월에서조차 아무개라 적게 되어 송구한 마음 거둘 길 없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귀공을 달리 부를 방명이 없음을 소녀 감사히 여기고 있기도 합니다. 기억할 수 있는 말이 없으니 더 빨리 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바람 때문입니다. 공자께서 작일 소녀에게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 하였으나 소녀, 오랜 고민 끝에 부족한 글월로 작별의 인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소녀가 짐작하고 있는 바가 어쩌면 맞을 수도, 또 어쩌면 틀릴 수도 있겠으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소녀가 그간 공자께 참으로 많은 결례를 범하였다는 점이겠지요. 하룻밤이 지났으나 소녀의 이야기가 끝났을 적에 딱딱하게 굳어지던 공자의 얼굴이 방금 일처럼 눈에 선합니다. 소녀, 공자의 어두운 낯빛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공연한 언사로 부담을 드려 송구합니다. 사려가 모자라 사람의 마음이 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나중에야 깨달은 소녀의 우매함을 부디 용서하십시오. 귀공과의 첫 만남도, 그 이후의 짧은 인연도 모두 소녀의 경박한 행실과 되바라진 성정으로 비롯한 것이었으니 공자께선 아무것도 개의치 마십시오. 그리고 다시 보자는 약조를 나눈 신의를 저버리고 이렇듯 글로 인사를 대신하는 소녀의 무도함을 부디 용서하지 마십시오.’
서신을 봉한 연향은 기주에서부터 따라온 하인에게 약속장소를 일러준 뒤에 그곳에 계신 공자께 전하고 오라고 일렀다. 하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연향은 빗속에 그대로 서 있었다. 소슬하게 내리는 가을비 속에서 연향은 어린 연모와의 이별은 이제부터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예감하였다. 홀로 온전히 감내해야 할 열병은 길고도 고될 터였다.
7장 하. 거자필반去者必返(떠남이 있다면 반드시 돌아옴이 있다)
승명은 정자에 서서 점점 더 굵어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쩐지 이대로 연향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견 천진난만해 보여도 연향도 어쩔 수 없는 귀족의 영애였다. 덜컥 마음 가는 대로 고백을 하고 나서 지금쯤 경솔하였던 본인의 행실을 자책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연향이 지난 일을 후회하고 있다면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연향은 끝내 오지 않으리란 예감이 확신처럼 그 안에 번져갔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미시가 되자 폭우 속에서 연향과는 확연히 다른 체구의 인영이 나타났다. 연향의 지시를 받고 온 듯 사내는 주저 없는 걸음으로 정자로 다가왔다. 승명이 만나기로 한 상대가 아닌 다른 자가 나타나자 기척을 지우고 있던 시위 둘이 정자의 종마루에서 소리도 없이 뛰어내렸다. 승명은 가벼운 손짓으로 함부로 나서지 말라 명하고는 가까이 다가온 사내가 정자 아래서 깊이 고개 숙이는 것을 보았다.
“현주가 보내어 왔느냐.”
“예, 공자님. 서한을 전해 올리라는 현주 자가의 분부를 받잡고 온 호번왕 전하의 고공이옵니다.”
그가 빗속에서 주섬주섬 품을 헤쳐 전서를 꺼내려하는 것을 본 승명은 나직하게 명했다.
“빗속에 있지 말고 위로 올라오너라.”
사내는 놀란 듯 고개를 조금 들었다가 다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천한 몸이 어찌 감히, 말씀만으로도 송구하옵니다.”
“찬비를 맞으면 춥고 떨리는 것은 누구나 같지 않으냐. 사양 말고 올라서거라.”
승명이 어조를 좀 더 낮추어 타이르자 사내는 연신 송구하다 읊조리며 겨우 정자에 올라섰다. 그리고 꿇어 엎드려 추위로 곱은 손으로 연향의 전서를 전했다. 푹 젖은 사내의 어깨에서 더운 김이 연신 피어오르는데도 그가 건넨 전서는 물방울 하나 묻지 않은 채 깨끗했다. 행여나 빗물에 젖어 글씨가 지워질까 조바심을 치며 소중히 품고 온 것이 자명했다. 신분은 미천하나 언행이 바르고 조심스러운 것이 호번왕 일가의 가풍을 읽을 수 있었다.
승명은 조용히 연향의 서한을 펼쳐 들었다. 전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었으나 저의 답신을 기다리고 섰을 것이 분명한 저 사내를 위해서라도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날 때마다 매양 친근한 말씨를 써서 그러함인지, 한껏 예를 갖춘 정중한 글귀가 눈에 설었다.
요약된 내용은 예상대로였으나 승명의 단정한 얼굴에서는 한점 동요도 엿보이지 않았다. 연향이 다른 이를 보내는 일조차 없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뜨렸어도 그는 전혀 놀라지 않았으리라. 기다리면서도 내심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진심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족자에 그림을 그린 것도, 마지막 공간에 하고많은 경구 가운데 굳이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는 법화경의 문구를 쓴 것도 어쩌면 그녀를 만나 해명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무개로서의 만남은 여기서 끝이어도 황태자 승명으로서 곧 그녀를 찾아가리라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더는 신분을 가릴 생각이 없었기에 글과 그림 밑에 낙관도 찍었다. 황실의 법도대로 몇 개의 획을 다 쓰지 않는 방식으로 피휘를 하였으나, 피휘법은 대대로 내려온 오랜 관습이고, 어차피 승명이 그린 그림이나 그가 쓴 글에는 같은 모양새의 낙관이 찍혀 있었기에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본다면 알아보기 불가능하지도 않을 터였다.
승명이 길지도 아니한 연향의 전서를 오래도록 곱씹은 까닭은 짐작하고 있던 바대로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건강하고 영리한 후사를 위해서라도 상대가 상황판단이 빠르고 영악한 편이 좋았다. 부황과 모후께서 연향을 저의 비로 내정한 이상 그녀는 추후 이 나라의 국모의 위에 오르게 될 터였다. 국모란 감정에 휩쓸려 신분에 걸맞은 행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우매한 여인이 감당해 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연향의 판단이 옳았고, 그러한 그녀이기에 승명은 연향과의 앞날은 기꺼운 마음으로 꿈꿀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서한 속의 글은, 아니 행간과 자간에 숨겨진 그녀의 진심은 조금 다른 소리를 하고 있었다. 차갑게 잘라내겠노라 예를 갖춘 정중한 어조를 써놓으면 무엇하랴. 글귀 사이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선하고도 다정한 성품이 흘러넘칠 듯이 묻어나는 것을. 그러하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승명의 눈길을 잡아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글자가 아니라, 여백 속에 깃든 연향의 절절한 마음이었다.
기억할 것이 없으니 빨리 잊을 수 있으리라는 소리는 결코 잊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읽혔고, 진심을 드러내어 짐이 되어 미안타는 말은 저의 진심을 부디 알아달라는 소청처럼 보였다. 연향은 만남도 헤어짐도 모두 저의 탓이니 개의치 말라하였으나 어찌 개의치 아니할 수가 있으랴. 진실을 밝힐 수 있었던 모든 순간에 저를 숨기고 그녀를 희롱한 것은 승명 자신이었거늘, 전부 저의 죄라 하는 연향이 참으로 애잔하였다. 그녀의 글이, 그 글에 차마 실어내지 못한 절절한 심사가 어리석고 가여워 승명은 도리어 가슴이 아팠다.
오랜 주저와 고심 끝에 한 글자 한 글자 힘겹게 써 내려갔을 그 선한 아이의 마음에도 저 그치지 않은 빗줄기처럼 쉬 그치지 않을 비가 내렸으리라. 승명은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나 또한 현주에게 전할 것이 있으니 잠시 기다려라.”
“예, 공자님.”
승명은 서안에 앉아 짧게 글을 썼다. 시원스러운 필체로 답신을 쭉 써 내려간 그는 서한을 연향의 전서와 함께 접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주려 하였던 족자를 넣은 함을 열고 그 안에 두 개의 서한을 모두 올려놓은 뒤 다시 봉하였다.
“이것을 현주에게 전하거라.”
공손히 함을 받아 드는 사내의 입술은 파리하게 굳어있었다. 행여나 방정하지 못한 태도를 보여 주인의 명성에 누가 될세라 잔뜩 긴장하여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기다리는 동안 비에 맞아 젖은 몸에 한기가 깃든 모양이었다. 승명은 자신의 우장을 집어 사내에게 내밀었다.
“무거운 함까지 품고 이 빗길을 뚫고 돌아가려면 배로 고될 것이니 이것이라도 입고 가거라. 빗줄기가 세차 모두 다 막아줄 수는 없을 것이나 그대로 가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어찌 소인처럼 미천한 것에게 귀하신 분께서······!”
곁에 지키고 선 승명의 시위보다도 연향의 고공이 더 먼저 마다했다. 해쓱해진 낯으로 두 손까지 내저어 가며 한사코 사양했으나 승명도 물러서지 않았다. 거창하게 애민 정신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풍족하게 자라 물욕이 없는 승명에게 저보다 못한, 특히 가난하고 주린 자들에게 제 것을 나누고 베푸는 일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천하다는 것이냐. 태초에 사람이 있었고 그 이후에 신분과 계급이 생겨난 것이다. 마음으로 품어 돌보아야 할 어린 백성을 돌아볼 줄 모르는 자가 어찌 네가 말하는 그 귀한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있으리. 더 사양한다면 이 손이 무안해지리라.”
황송하다며 거듭 고개를 조아리고 나서야 사내는 덜덜 떠는 손으로 승명의 우장을 받아 들었다. 강경한 태도에 밀려 받기는 받아쓰되 덜컥 입을 용기는 없었는지 안절부절못하며 주저하던 사내는 한참 후에야 거의 울 것 같은 기색을 하고서 주섬주섬 우장을 걸치고는 다시금 몸을 웅숭그려 승명에게 절을 올렸다. 세찬 빗발 속에서 사내가 점이 되어 사라진 이후에도 오래도록 승명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정자에 기대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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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脈, 衇, 霡 : 본 1부 황실의 꽃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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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脈, 衇,霡 : 본 1부 황실의 꽃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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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脈, 衇, 霡 : 본 1부 황실의 꽃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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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脈, 衇, 霡 : 본 1부 황실의 꽃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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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脈, 衇, 霡 : 본 1부 황실의 꽃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