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3학년 끝자락 기억만 남아있다.
지금은 초등학교이지만 내가 다닐 때는 국민학교였다.
그래서 제목에서 국민학교라고 표현을 했다.
이 글을 읽으면 내 나이를 대략 알 것 같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3학년쯤 됐을 때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엄마와 아빠가 강원도 태백에서 부산행을 결정하면서 많이 나름대로 다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빠와 엄마는 우리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거의 보여주시지 않았다.
정서적으로 안 좋을까 봐 그랬다고 한다.
없는 형편이지만 자식들에게는 나쁜 건 보여주기 싫은 부모마음 아닐까 한다.
아무튼 엄마는 부산을 가기 싫어했고, 아빠는 부산을 고집하셨다.
연고도 없는데 말이다.
승자는 결국 아빠이다. 아빠는 이때 매우 가부장 적이었던 기억이다.
엄마는 정말 현모양처의 표본이다.
아무튼 부산으로 가자고 한다.
아무것도 모를 때이기 때문에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따닥따닥 붙은 똑같이 생긴 모양의 주택들이 즐비해있다.
어느 집이 우리 집인지 모르겠다.
내 나이 9살.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학교에 갔다.
선생님이 내 소개를 시키신다. 아이들에게 강원도에서 전학 온 000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안녕 난 000이야." 이게 인사 끝이었던 것 같다.
애들이 쉬는 시간에 우르르 몰려온다. 그때만 해도 한 반에 학생이 50명 가까이 있을 때였다.
그만큼 아이들이 많은 시기였고 정부에서는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뭐 이런 포스트도 제작될 때였던 시기였다. 너무 많은 아이를 낳으니까 그런 정책을 한 것 같다. 아무튼 모르겠다.
아이들이 우르로 와서 나한테 하는 첫마디
"야. 너 강원도 사투리 잘 써?"
"너 한번 말해봐 봐"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말하지 않았는가. 난 세침하고 말괄량이였다고.
"말 시키지 마"라는 말로 모든 상황을 종료했다.
그 뒤로 아이들이 나에게 말을 정말 걸지 않았다. 거의 외톨이처럼 지냈다.
그건 괜찮았다. 그런데 같은 반에 있는 여학생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왜 나를 괴롭히지?"라고 속으로는 생각했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사투리가 나오면 놀림을 받을까 봐 이서다.
이름으로 보통 놀리는데, 나는 이름이 특이하지는 않아서 이름으로 별명을 누가 지어서 놀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줄곧 별명은 "싸가지"였다.
"쟤 싹수없다" 이 말은 엄청 많이 들었고 어느새 익숙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이웨이"이다.
괴롭힘의 정도가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전학 온 지도 얼마 안 되었고 무엇보다 선생님이 많이 챙겨주셨었다.
그리고 같은 학교에 언니가 다니고 있으니까 언니를 만나러 가면 된다.
비록 언니가 나를 반기지는 않았다. 또 사고 칠까 봐 그런가 보다.
아무튼 그래도 난 언니를 매일 찾아갔다. 언니반에서 어느 날에는 언니가 안 보인다.
아마도 학원을 간 모양이다. 나도 학원을 다니기는 했다. 근데 학원을 가서 뭘 배웠는지 기억은 하나도 안 난다. 아빠 엄마는 세명을 다 학원에 보내주셨다. 학비도 한 번도 밀린 적이 없다. 이때는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내가 가난하다고 아무도 생각 안 했던 것 같다.
3학년 중간 때쯤에 전학을 와서 좀 있으면 4학년이라고 한다.
학교에 친해진 친구는 단 한 명도 없다. 나 혼자다.
남자아이들이 와서 말을 걸기는 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친구가 된 아이들이 남자아이들이 많았다.
남자애들은 참으로 악동들이다. 여자애들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거나 말뚝박기를 하고 놀거나 과격한 운동들을 좋아하고 놀리기를 좋아한다. 비사치기 등 돌을 들고 던지는 놀이도 좋아한다.
이렇게 처음으로 마음을 연 친구들이 여학생들이 아니라 남학생 들이다.
그러다 보니 나도 거기에 더 익숙하고 편함을 느꼈다. 여자아이들은 시 셈하기 바쁘고 뒤에서 쏙닥 거리기 바쁘다. 하지만 남자아이들은 대놓고 직언을 한다. 오히려 그게 더 나았다.
그래서 난 3학년 끝자락을 남자아이들과 나름대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고, 어느새 나는 남자아이들의 무리에서 놀고 있었고 남자아이들의 무리에서도 내가 대장이 되어있었다.
참으로 특이하고 신기한 일이다.
거부감은 없었다. 하지만 여자아이들과도 친해지고 싶었다.
그러기엔 여자아이들이 날 너무 싫어한다. 그럼 나도 굳이 말 붙일 필요가 없다.
이때도 지금의 성격이 그대로 있었나 보다.
마지막 3학년 기말고사 시험을 쳤다. 이때는 시험지에 연필로 답을 써서 냈다.
한 남자아이가 말한다.
"야. 너 시험 잘 봤어?"
"아니 정말 망했어."
"야 너는 잘 봤어?"
"아니 난 못 봤어"
한 명 한 명 다 이야기하는데 하나같이 다 시험을 못 봤다고 한다.
나한테는 안 물어본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당연히 못 봤을 테니까. 노는 게 더 좋았다.
한 남자아이가 말한다. "시험 못 보면 엄마한테 혼날 텐데"
"우리 학교 밤에 몰래 갈래?" 꽤 위험한 제안이다.
한 남자아이가 말한다.
"야 저녁 되면 이순신 장군 동상이 움직인데 눈이 빨개진다고 하던데?"
"그럼 귀신 있는 거야? 귀신도 보고 시험지도 고치고 어때?"
우와... 부산 애들은 스케일이 남다른가 보다.
아이들이 계속 조른다.
"가자. 가자. 00아 너꼭 가야 돼" " 가자"
흠.... 생각을 했다. 어차피 내 시험지에는 죄다 비가 내릴 것이다.
30점? 20점? 수학은 0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만 고친다고 뭐 잘못되겠어?라고 생각했다.
이게 범죄라는 것을 알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 가자. 근데 경비아저씨 있는데 걸리면 누가 책임질 거야?"라고 물었다.
아무도 답을 주지 않았던 기억이다.
암묵적으로 걸리는 놈은 재수 없이 걸린 게 되는 거로 합의가 된 거 같다.
두근두근.....
담넘기는 1등이다.
난 운동, 음악, 미술 이런 예체능 쪽에 아주 발달해 있었다.
공부 빼곤 잘해요. 이거였다. 이때만큼은 말이다.
아무튼 제일 먼저 학교 담을 넘었고 뒤이어 남자아이들 4명이 같이 담을 넘었다.
학교는 낮과는 다르게 너무 어둡고 동상도 무서웠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앞으로 갔다. 뻔히 동상 눈을 쳐다봤다.
"야... 뭐야.. 무서워.. 그만 봐"
"야 뭐 해 얼른 교실로 가자"
난리통도 아니다.
"야 내가 동상 봤는데 동상눈이 빨갰어!"라고 겁을 줬다.
한 아이는 울기 일보직전이다. 시험지고 뭐고 집에 가자고 조른다.
나머지 아이들은 "뻥치지 마"라고 하면서 교실로 들어간다.
교실로 들어가니 선생님이 시험지를 서랍장 안에 넣어놓으셨다.
서랍장을 열 때 내가 열지 않았다. 그냥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시켰던 기억이다.
시험지에 이름들을 확인했다. 내 시험지도 내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우리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반장이나 부반장의 시험지가 필요하다.
커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쳐도 그 아이 들 거를 보고 고치는 게 하나라도 더 맞을 수 있다.
반장 거는 위험하다 거의매일 만점을 받으니까.
그래서 맨날 2등 하는 부반장 거를 선택했다.
하지만 결국은 아뮤도 시험지를 고치지 않았다. 아까 잔뜩 겁을 먹은 녀석이 교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난리부르스를 쳐서이다. 다들 사색이 돼서 후다닥 나갔다.
그렇게 다시 시험지들을 넣어 두고 나서 학교에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갔다.
맘은 콩딱 거리지만 침착하려고 했었던 거 같다 그런데 선생님 눈을 못 쳐다봤다.
애들이 몇 명 교무실로 불려 간다. 이상하다. 나랑 어제 같이 간 애들만 불려 간다.
"엥? 어떻게 된 거지?" 속으로만 생각한다.
"나중에 학교 마치고 나서 물어봐야지"라고 생각했다.
학교종이 치고 집에 갈 시간.
"운동장 나무 앞에서 보자"라고 쪽지로 남기고 애들을 기다린다.
애들이 나왔고 무용담을 들려준다.
"선생님이 불러서 너네들 어제 학교 왔었어?"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애들이 하나같이 처음에는 아니라고 했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왔었다고 이야기했고, 시험지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 했다고 했다. 시험지는 고치지 않았으니까 굳이 말 안 한 거 같기는 하다.
솔직히 밤늦게 학교에 간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기는 할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다.
그때는 cctv도 없을 때인데, 선생님은 어떻게 아셨을까? 아마도 시험지를 단순한 꼬맹이들이 하나도 안 고치고 차곡차곡 다섯 명 거가 위에 올라가 있어서 물어보신 것 같다. 그중 여자는 나뿐이라 나는 안 부르신 것 같다는 생각이 지금 내 생각이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뭐래?"라고 물어보니 아주 간단하게 " 알았으니까 가봐"라고 말씀했다고 한다.
시험성적이 나왔다.
운명에 맡겨야 한다. 고치지도 않았고 난 30점이면 충분하다.
"하.. 애초에 내가 공부 안 해서 뭐 됐어" " 엄마한테 또 혼나겠네"라고 속으로 말한다.
집에 갔다. 언니, 동생도 시험지를 가지고 왔다.
언니는 100점 동생은 98점이다. 엄마는 내 거는 보지도 않는다.
난 그때 45점을 받았다. 나름대로 선방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잔소리를 한다.
"언니랑 동생 좀 봐라. 너는 학원도 다니는데 이게 뭐냐"라고 하면서 나한테 화를 내신다.
이때 내가 한 한마디가 있다. 이 이후로 엄마가 성적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 계기가 되었다.
엄청 자신 있게 말했다.
"엄마! 언니랑 동생이랑 비교하지 마. 그거 나쁜 거야"
" 그리고 나 45점 받았는데 꼴등은 아니야. 내 밑에 4명이나 더 있어!"라고 말이다.
어이가 없었나 보다. 아빠는 한참을 웃으신다.
엄마는 "그래 너 잘 낫다. 아이고 쪽팔려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겠네"라고 하신다.
익숙하다. 괜찮다. 그렇게 나는 당당한 45점을 받은 3학년 꼬마였다.
솔직히 시험지를 고치러 몰래 잠입한 거는 나쁜 거다. 커서 알았지만::다행히 범죄가 미수에 그쳐서 그나마 이런 말을 하고 있지만 행위자체가 나빴다는 건 커가면서 충분히 알았다.
내 3학년은 그 기억만 남아있다.
한만큼 점수를 받는 건 당연한 결과이다. 노력해서 당당하게 점수를 받은 친구들의 기쁨을 가로채려 했다.
지금생각하면 있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열심히 한 사람들의 노력, 그에 따른 대가.
45점이라는 점수를 받았지만 내 실력이 그랬던 거다. 그렇게 부족하고 천방지축인 3학년 여자꼬마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