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안 갔다. 언니 때문이다.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아침부터 때를 썼다.
일곱 살 어느 겨울이었다.
학교에서 탬버린을 가지고 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음악 수업할 때 쓰는 탬버린 말이다.
말했지만 모든 물건은 언니 거다.
언니 거를 물려받아서 쓴다.
그날 언니의 탬버린이 집에 있었다. 내 스타일이 아니다.
다른 애들 거는 엄청 이쁜 공주 캐릭터가 있는데 언니 거는 그냥 아무것도 없는 일반 탬버린이다.
억울하다. 짜증 난다. 또 언니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엄청 울었다.
아빠도 엄마도 출근을 해야 한다.
나 때문에 못 가는 거 같다. 뭐 상관없다. 난 지금 학교에 가기 싫고 탬버린을 얻어내야 한다.
이번만은 언니 거를 안 가져가고 내 거가 필요했다.
그렇게도 내 거에 집착을 했다. 사줄 만도 한데 안 사준다.
엄마는 "아이고 징글징글하다 진짜" 하면서 가버리셨다.
아빠는 "학교 데려다줄게 탬버린 일단 언니 거 가지고 가자"라고 나를 계속 달랜다.
이런! 아빠는 사줄지 알았는데 예상에서 벗어난 결과이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학교에는 가기 싫었다.
어릴 때부터 아파도 무조건 학교 가야 하는 집의 룰이 있다.
"엄마 나 배 아파서 학교 못 가"라고 하면 "아파도 학교 가서 죽어"라는 말을 했다.
냉정하고 무서운 말이다. 그만큼 엄마는 배움에 대한 부분을 심하게 강요했다.
하지만 난 언니나 동생보다는 그런 강요를 좀 덜 받고 자라기는 했다.
일찌감치 나는 공부와는 거리가 머다란 것을 몸소 실천했다.
하지만 불변은 있다. "넌 졸업장이라도 타와" "언니는 맨날 상 타는데 너는 졸업장이라도 있어야지" 이거다.
아주 어린 일곱 살 때도 마찬가지다. 엄마는 내가 학교를 빼먹고 가는 것을 용납지 않는다.
하지만 이날은 예외였던 모양이다. 엄마는 잔뜩 짜증이 나서 가버리고 아빠가 나를 달랜다.
아빠가 계속 우는 내 눈물을 닦아주면서 달랜다. 절대로 안 갈 거야.라고 생각했다.
아빠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나를 등쳐 업고 다리를 건너서 계단을 내려가서 버스를 탔다.
아빠가 경황이 없었던 모양인지 아니면 아빠가 어떻게든 얘를 학교에 보내야겠다는 맘이 앞서서인지 모르겠지만 정확히 기억한다.
아빠가 버스비를 주머니에 넣어두신 걸로 착각하고 무작정 버스를 탄 거다.
당연한 결과다 울고 불고 발버둥 치는데 데리고 가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버스를 타서 주머니를 뒤지니 돈이 없다. 그때 버스비가 얼마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십 원짜리 동전이 쓰일 때였을거다.
기사아저씨에게 아빠가 말한다. "저기 기사 양반 내가 버스비를 놓고 왔는데 버스회사 전화번호 주고 기사아저씨 이름 말해주면 내가 꼭 가서 갚을 테니 좀 타면 안 되겠습니까..."
기사아저씨 너무 못된 사람. 지금도 그렇게 기억한다.
아빠한테 기사아저씨가 말한다.
"돈도 없으면서 뭔 버스를 탄다고 그러세요? 아 바쁘니까 내려요!" "나중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까 내리라고 이 양반아"라고 매몰차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준다.
이 와중에 아빠가 말한다 " 애 학교를 보내야 하는데 깜빡하고 집에 두고 와서 그러니 한 번만 태워 주시죠 기사님 부탁드립니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린가보다.
"아. 이 아저씨 말 못 알아듣네! 내리라고 이 사람아!" 화를 낸다.
아빠랑 엄마는 엄청 일찍 결혼을 했다. 이때 엄마 아빠가 20대 후반이었을 거다. 그 아저씨한테는 아빠가 매우 어려 보였을까? 아님 원래 성격이 지랄 맞은 나쁜 아저씨인가?
아무튼 힘없이 아빠가 나를 다시 앉고는 버스에서 내렸다.
결국 이날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
터덜터덜 아빠가 걸어간다. 온 힘이 다 빠진 모양이다. 아무래도 그것만이 아닌 것 같다.
버스 안에서 당한 모욕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항상 커 보이던 아빠의 어깨가 작아 보였다.
너무 미안했던 모양이다. " 아빠 미안해"라고 조심스럽게 눈치 보면서 말했다.
아빠가 말했다 "아니야. 담부터는 준비물 그런 거 있으면 아빠한테 와서 몰래 이야기해"
"아빠가 미리 사다 놓을게"라고 말한다.
눈물보가 터졌다. 왜 그런지 모른다. 아빠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강원도에 오기 전 아빠는 서울에서 사업을 크게 하셨다. 농산물 중 과일 쪽으로 크게 하셔서 가락시장에 큰 과일상점을 몇 개나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엄청 많은 돈을 버셨고 그 돈으로 땅을 사셨다.
수박밭을 사신 거다. 엄청난 규모의 수박밭을 샀는데 알고 보니 물수박이었다. 사기를 당하신 거다.
엄마가 말렸었다고 한다. 이 돈이면 아파트 한 채는 사고도 남는다고 아파트를 사자고 그때 그랬었다고 한다.
엄마의 촉은 참으로 뛰어나다. 지금도 저기 집값 오르겠다.라고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집값이 오르거나 도시개발이 된다. 이때도 그랬었다.
그런데 아빠는 엄마의 말을 뒤로하고 밭을 산거고 사기를 당해서 새벽에 야반도주하듯이 강원도 산골로 이사를 오게 된 거다.
아빠가 인생을 잘 못 살지는 않았을까? 한참 동안 이사장이 떼돈 벌어서 외상값도 안값고 사기치고 튀었다. 이렇게 소문이 나서 강원도 태백에 아빠를 잡으러 온 동종업계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실상 알고 보니 너무나도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는 걸 보고는 거꾸로 쌀이나 과일 이것저것을 줬다고 한다.
이건 커서 들은 이야기이다. 이때 아빠는 강원도 탄광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여기서 크게 허리를 다치시기도 했었다. 내 새끼들은 굶기지 않고 학교 보내려고.. 나는 굶더라도 내 자식들은 굶으면 안 되니까..
나의 일곱 살 탬버린 사건하나로 이날 아빠의 심정을 이해해 보려 한다.
아빠는 삶이 피곤하고 지쳐있었고 자존감도 바닥이었을 거다. 그런데 버스비가 없던 것도 아니고 실수로 안 가지고 왔는데 버스를 못 타게 된 것이 충격이 아니라, 막말을 했던 버스기사에게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충격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아마도 그날의 아빠는 매우도 외로웠을 거 같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끝났고 탬버린은 내 거가 하나 생겼다.
갖고 싶었던 탬버린. 그런데 어릴 적 기억으로는 기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린 나에게 이렇게 깊이 남을 만큼 그날의 아빠의 뒷모습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어릴 때 마음이 아프다는 표현을 쓰지는 못했지만 그때 내 맘을 지금 어른이 되어서 대변하자면 외로워 보였다가 정확할 것 같다.
그날 이후 난 준비성이 철저해졌다. 어디 가서 실수 안 하려고 어디 가기 전에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지금도 그 버릇은 그대로이다. 혹시라도 뭐가 없으면 불안해서 오랫동안 밖에 있지 못한다. 이날의 추억은 나에게 버릇을 만들어 줬고 약간의 트라우마로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