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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Oct 28. 2024

첫 알바, 카사블랑카!

엄마의 용돈으로는 턱없다. 내가 벌어서 내가 써야 한다.

고2 때의 기억이 가장 많다. 그만큼 스펙터클 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었다.

고2. 아직은 나는 언니만큼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은 접은 지 오래.

일단 가장 급한 건 생활비이다.

거의 용돈이라는 개념이 없다. 엄마에게 수업에서 쓰는 재료비를 이런저런 핑계로 조금 뻥튀기해서 받아내는 방법 말고는 따로 내가 비상금을 모을 재간이 없다.


그렇다고 엄마 아빠 돈을 훔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빠는 매일매일 장부를 쓴다. 엄마도 매일매일 가계부를 쓴다.

이렇게 우리 집은 돈은 철저히 관리했다.

그래서 더 엄두도 안 냈다.

그래서 결심을 했다. 알바를 하자! 

고2한테 알바를 누가 시켜줄까?라고 하겠지만 그 시절에는 많이들 했었다.

내 친구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알바를 했고, 난 옷집에서 알바르 했다.


말했지만 나는 부산의 메카인 "남포동"에서는 눈감고도 다닐 정도로 많이 다녔다.

그래서 알바도 "남포동"을 선택했고, 그 남포동에는 지하철역과 연결된 지하상가들이 아주 많다.

난 거기서 알바를 처음으로 했다. 내 인생 첨이자 마지막 알바이다.

알바는 여기서만 2년을 했다.

가게이름이 참으로 특이하다.

"카사블랑카" ㅎㅎ

난 그때 이 뜻을 몰랐다. 그래서 주인 언니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저기.. 언니 카사블랑카라고 왜 이름을 지으신 거예요?"

주인 언니가 웃으면서 말한다. 주인언니는 항상 여유가 넘친다. 솔직히 가게에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알바를 구한 거고, 매일 책을 읽고 있는 가게주인 언니이다.

"카사블랑카?"내가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하고 또 "하얀 집"이라는 뜻도 있고 아무튼 내가 그렇게 짓고 싶어서 지었어.라고 말한다.

"아 ~ 그래요?"라고 말하고 그거로 나는 심플하게 "그렇구나"라는 정도로 만 생각하고 일했다.


이 가게는 참으로 특이하다.

청바지만 있다 그것도 외국인들만 맞을 그럴 사이즈 말이다.

옷을 사러 오는 손님의 99%는 외국인이다.

노란 머리의 외국인, 흑인, 갖가지다.

가게는 절대로 할인을 해주지 않는다. 떡하니 가게에 들어가면 쓰여있다.

"Cost sale not possible"이라고 말이다.

원가이니 세일해 달라고 하지 말라. 이 말이다.

참으로 이 가게 언니도 특이하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에 오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게 이거라고 한다.

1. 반말

2. 욕

3. 깎아달라

이게 가장 많다고 한다. 국제시장이 같이 있기도 한 남포동은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다.

그러면서 지하상가도 탐방하곤 한다. 지금은 좀 우리나라가 많이 알려졌지만 그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가게 주인 언니가 꼭 이거만 지켜라 하는 것이 "깎아주지 말고 깎아달라고 하면 그냥 안된다고 말해"

"안 팔아도 되니까 그것만 기억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부분은 철저히 했다.


언니가 아파 보인다. 가게 주인 언니는 항상 잿빛이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가게언니는 이 가게를 오래 유지할 생각이 없다.

큰 병에 걸려서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였다.

그렇기에 의욕도 없고 그러기에 자기 고집을 부리고 싶었나 보다.

나에게는 아주 고마운 언니다. 첫 알바자리이기도 하고, 나에게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00아 너는 참 앞으로 크게 될 아이 같아. 네가 부럽다. 나도 너만 할 때가 있었는데.... 널 보면 왠지 뭉클해

"난 네가 참 좋아" " 언니가 언젠가 없어지더라도 이모한테 말해놓을 테니 우리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할 만큼 해"라고 말이다. 언니의 이모님은 바로 윗 상가에서 피자가게를 운영하셨다. "피자헛"을 하셨는데 항상 피자쿠폰을 모아놓았다가 나한테 피자로 바꿔 오라고 시키고 내가 배고플까 봐 이모한테 항상 말해놓고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항상 "피자"를 내가 고르고 싶은 맛으로 골라서 먹으라고 하셨다.


너무 좋은 언니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첨으로 타인인 누군가를 위해 간절히 바랐던 기억이다.

아무튼 어느 날 언니가 오지 않았다. 언니에게 가게 전화로 그 언니의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했다.

"언니 오늘은 안 나오시는 거예요?" " 많이 아프세요?"라고 물었다.

"어 00아 미안. 언니가 오늘 좀 병원 갈 일이 있어서 며칠 못 나갈 거 같아" "가게 좀 잘 부탁해"라고 하셨다.

가게 문은 항상 내가 닫았다. 그래서 가게 열쇠가 2개였는데 언니하나, 나 하나 이렇게 가지고 있었다.

가게에서 한참 할 일 없어서 청소도 하고, 또 곧 있을 오디션에 참가하려고 음악을 듣고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가게에 손님들이 들어온다.

외국인! 그것도 3명! 건장한 체격들에 짖꿎은 얼굴들! 

그때만 해도 나는 왠지 모를 영어 자신감이 있었다. 영어시간에 배운 기초 영어를 써먹을 기회!

하나도 떨지 않았다. 그저 외국인이 신기했고, 나한테 말을 걸어주기를 원했다.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외국인들이 이것저것 상품을 살펴본다.

"어쩌고 저쩌고 샬라 샬라 ~~~" 자기들끼리 키키덕 거리며 웃는다.

그중에서 뽀얗고 노란 머리의 외국인 남자가 청바지 하나를 들고 나에게 말을 건다.

"피팅 오케이?"라고 말이다.

"오케이"라고 말하며 장소를 가르치고 " 히얼"이라고 말했다.

휴... 아는 단어 두 개는 써먹었다.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 외국인은 옷을 갈아입고는 앞뒤로 자기 핏을 보고 꽤나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친구들도 하나같이 "그레잇"을 연신 남발하면서 엄지를 척 세워주었다.

"아. 사려나 보다" "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언니와 처음으로 떨어져서 나 혼자 판 실적이다.


한 외국인이 말한다. " 디스카운트!"라고 말이다.

"노 디스카운트" "룩 히얼"이라고 하면서 언니가 적어놓은 절대 세일 불가 글자를 보여주었다.

외국인은 " 오~ 플리즈~"라고 말했다. 내가 보니 돈이 없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도 말했다.

"이프 유... 겟어 디스카운트? 유 해브 투 페이~위드 유얼 원 머니" 

뭔지 몰라도 대충 나는 "너한테 디스카운트해 주면 낸가 돈을 메꿔야 해"라는 뜻으로 읍소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나 보다. " 오~마이갓! 리얼리??"라고 한다.

"예쓰!"라고 말했다.

그런 내가 귀여워 보였나 보다. 

"유 베리 큐티! 엔드 유어 굿 엣 비즈니스"라고 말해주었다.

아무튼 그렇게 짧은 영어가 오갔고, 외국인은 바지를 3개나 사갔다.

친구들에게 하나씩 다 선물한다고 한다. 

"마이 프렌드~ 기프트! 토털 쓰리 피스!"라고 말한다.

"오 ~ 땡큐 땡큐! 헤헷" " 유어 베리 핸썸"이라고 말했다.

외국인이 깔깔대며 웃으면서 "땡큐""아이 필 굿!"이라고 말이다.

뭐 대충 기분 좋다 이거겠지라고 생각하고 "유아 웰컴"이라고 크게 말했다.

한참을 나를 쳐다보면서 낄낄 대며 웃는다. 뭐  그리 기분 나쁘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렇게 그날 옷을 팔았고, 옷이 꽤나 비쌌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카드를 하는 곳이 별로 없어 무조건 현금이다. 그래서 현금을 받고 거스름돈을 거슬러 준 기억이다.


이렇게 외국인들과 한마디 한 단어 하다 보니 어느덧 외국인들과 하는 대화가 재미있었다.

맞고 틀리고는 중요치 않다. 내가 꿀 먹은 벙어리는 아니라는 증거를 찾았다. 그래서 마구마구 영어를 남발했다. 거의 외국인들을 위한 옷가게였기 때문에 영어는 필수였다. 


언닌가 나를 채용할 때, 자기소개 좀 해봐,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영어로 해봐라고 말이다.

"마이네임 이즈 00리" "마이 드림 이즈 싱어" " 쏘~ 아임 액티브" "아이 윌 워크 하드" "엔드.. 플리즈 렛 미 워크"라고 하고 "땡큐 베리 마치"라고 했던 기억이다. 

그때 언니가 귀여워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날 바로 낼부터 일해도 돼 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다.

아무튼 그렇게 난 이 가게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주변 지하상가 사장님들이 이뻐해 주셨다.


첫 알바직장의 월급도 현금으로 흰 봉투에 담아 받았다.

왜 그랬는지 지금은 후회막급하나, 그때는 돈이 생기면 바로 엄마한테 갖다 주었다.

딱 내가 필요한 만큼만 제외하고 말이다.

엄마가 난생처음 칭찬해 주었던 기억도 있다. "아고, 아르바이트한 거 엄마 다 주는 거야?"라고 말이다.

사실은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거의 다 주는 거는 맞다.

"응 엄마 아빠 맛있는 거 사 먹어"라고 무심히 건넨 말에 엄마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맨날 돈돈돈 하는 엄마가 돈이 생겨서 좋나 보다라고만 생각했다.

그저 그렇게 무심코 주고 무심히 생각했던 나였다.

다 큰 성인이 되었을 때 엄마가 말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 넉넉하게 해 줄 거 못해줬는데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엄마한테 다 갖다 주는 내가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 했다고 말이다.

엄마의 무게는 그런가 보다. 난 아직 모르지만 그때 우리 엄마는 그랬나 보다.


그렇게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꽤나 자신감을 가졌고, 언니는 간혹 가다가 나왔다.

마지막으로 알바를 끝내려는 시기쯤. 언니도 가게를 폐업했다.

마지막 폐업하는 순간 재고정리를 도왔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내 기억 속에 "카사블랑카"는 존재한다.


그때 그 가게의 언니는 살아 계실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후 성인이 되어서 피자가게 이모님 집에 갔을 때 "아이고 많이 컸네"라고 웃으시면서 

"너 보니까 조카 생각난다"라고 하시면서 울으신 기억이다.

그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언니가 되었다는 것을.....

지금은 이 세상에 없을 언니에게 "나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셔서 감사하다"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행복하시길 바란다"라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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