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또 한 번의 위기이다. 우리 이모가 시집을 간다고 한다.
나에게는 이모가 딱 한 명 있다.
정말 정말 이쁘고, 상냥하고 , 사랑스러운 이모 말이다.
엄마와는 완전히 다르다. 엄마는 목소리가 엄청 크다. 십리 밖에서도 들린다고 해도 되겠다.
이모는 목소리가 너무 작다 "소곤소곤" 그야말로 소머드가 되어야 한다.
이모 목소리는 모기소리만큼 작아서 "초집중"을 해서 들어야 한다.
지금생각해 보면, 그런 이모와 오래 지내다 보니 내 귀가 밝은가 보다.
자다가도 무슨 소리가 들리면 아주 작은 소리에도 반응을 한다.
귀가 트인 거다. 우리 이모의 영향인가 보다.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우리 이모를 닮았으니 만족한다.
어릴 때 이모가 나를 데리고 다니면 항상 "이모딸"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이모와 나는 많이 닮았었다.
이모는 조카 바보이다. 조카들을 위해서 헌신했고, 언니가 태어날 때도 내가 태어날 때도 동생이 태어날 때도 항상 같이 있었다. 같이 살기도 했었고 모든 월급을 조카들을 위해 썼다.
사랑스러운 우리 이모, 항상 이모가 오는 날엔 다들 세 형제가 두근대면서 기다렸던 기억이다.
강원도에 살 때도, 부산에서 살 때도, 이모는 영원히 우리만 바라볼 줄 알았다.
그렇지만 그건 나의 욕심이었을까. 아니다. 언니도 그랬었다 나와 마찬가지였나 보다.
엄마 때문이야
엄마 때문에 우리 이모는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 시작을 이제 이야기해보려 한다.
부산에서 살 때 그때 고2.. 나랑 언니는 같은 방을 썼고 동생은 따로 방을 썼다.
언니는 성인이 되었고 나는 고2였다. 남동생은 고1.
남동생 친구들이 놀러 오지 않았다. 남동생은 굉장히 외향적이라서 친구가 없다.
데리고 오면 내가 이뻐해 줄 텐데 말이다. 남동생은 나를 극도로 혐오하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 큰 고등학생인데, 한 살 차이 난다고 해서 누나라고 치고 홀딱홀딱 입던 옷을 서슴없이 남동생 앞에서 벗었다. 남동생이 기겁하면서 방문을 닫으면 그저 그게 너무 웃겨서 "깔깔깔' 댔던 기억이다.
남동생이 '제발 쫌!"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그때 난 남동생한테 "여성용품"을 사다 달라고 심부름도 시켰다. 싫다고 부끄럽다고 하면 남자가 돼가지고 나중에 다 여자 친구 생기면 해야 하는 거니깐 누나가 미리 연습시켜 주는 거야!라는 되지도 않는 말을 하면서 심부름을 시키고 거스름돈은 쿨하게 용돈으로 줬다.
남동생은 참 착한 편이다. 그때는 그랬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학교생활과 집의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당시 외할아버지가 중풍에 걸리셨다. 마산에서 사셨는데, 마산집이 거의 100평 되는 전원주택이다.
엄마집이 그때 당시 잘 살아서, 할아버지가 그 집을 지키고 계셨고, 거기서 살고 계셨다 혼자 말이다.
외할아버지는 인물이 엄청나다. 그래서 젊었을 때 여자들을 꽤나 울렸나 보다.
외할머니라는 분은 전혀 본 적이 없다.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다.
단, 외할아버지의 행동 때문에 두 분이 헤어지셨다는 말만 들었다.
난 그렇게 알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모는 오직 한 명뿐이다.
나에겐 이모는 한 명뿐이다. 그건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 진실이다.
세월이 흘러서..
그렇게 할아버지가 중풍에 걸리자 이모가 할아버지의 간병에 나섰다.
일을 하시면서 할아버지 병시중을 다 들었다. 우리 이모는 참 천사다.
물론 가끔 힘들다고 엄마에게 할아버지 욕을 같이 하곤 했지만 그건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엄마가 이모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너 시집을 가던지 아니면 아버지를 평생 모시던지 해"라고 말이다.
이모입장에서 두 가지 갈림길만 있도록 엄마가 말한 것이다.
이모는 시집을 가고 싶지 않으셨었다고 한다. 하지만 솔직히 우리 외할아버지 성격이 장난이 아니다.
내가 경험 한 바로는 무척이나 이모가 힘들었을 것이다.
이모가 시집을 가면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모시겠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 집엔 이모가 시집가는데신 "외할아버지"가 부산집으로 오셨고 아빠가 엄마보다 더 외할아버지 간병을 열심히 하셨다.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 아빠를 난 존경 한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파편.
외할아버지는 매일 소주를 드신다. 알코올 중독이셨다.
인물은 좋으셨고 젊었을 때 집이 부잣집. 막내아들이었다.
그래서 매일 여색을 좋아했었고, 자식들도 돌보지 않으셨다고 한다. 예전에 아주 오래전에 6.25를 겪으셔서 군인 때 다리에 총상을 입으신 적이 있다고 맨날 술만 드시면 군대이야기를 하신다.
외할아버지의 "마산"애서의 (지역) 기억은 항상 술 취한 할아버지 모습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가면 쌈짓돈을 주시곤 했다.
부산에 오셨을 때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파편.
다른 사람들 이름은 다 까먹어도 내 이름은 어찌 안 까먹으시는지 모르겠다.
내 이름은 외할아버지가 지어주셨다. 원래 여자이름에 바다 "해" 자가 잘 안 들어간다고 한다.
남자 이름에 넣는 한자인데 내 이름에 넣으셨다. 그렇게 내 이름의 중간 자인 "해"가 은혜"혜" 자가 아닌 바다 "해" 자로 된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직접 지어준 이름 때문일까? 외할아버지가 치매와 중풍을 앓으시면서도 맨날 맨날 3층 창문을 열어 째기고는 동네가 떠내려 가듯이 외친다.
"00아! 00아! " 내 이름이다.
아오.... 미칠 노릇이다. 동네사람들한테 쪽팔려서 후다닥 올라가면 나한테 맨날 "환타"를 사다 달라고 하신다.
외할아버지는 술을 끊는 대신 "환타를 좋아하셨다" 환타가 만병통치약인 모양이다.
그렇게 내 이름만 불러 대셨다.
본론으로 들어가려 한다.
이모는 아주 소중한 존재이다. 우리 이모는 우리가 어릴 때 써서 보낸 편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가지고 계신다. 언제 한 번은 그 편지들을 하나하나 다 컴퓨터로 타이핑해서 책을 만들어 제본하여 오셨다.
"이모와 너희들의 추억이야"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너무 소녀 같은 우리 이모, 이쁜 우리 이모다.
이런 이모를 누구한테 준단 말인가!!!! 너무 화가 나서 미칠 노릇이다.
언니와 맘이 맞았다. 첨으로 말이다.
"언니! 이모 시집간다는 거 알아?"
"응" " 들었어"라고 언니가 답했다.
"어쩔 거야? 이대로 이모 뺏기는 거야?"라고 물으니 "몰라 짜증 나. 우리 이모 누구한테 주기 싫어"
라고 둘이 합심을 했다.
그렇게 입이 툭 튀어나와서는 한참을 둘이서 씩씩 거렸던 기억이다.
이모가 우리에게 묻는다 "이모 시집 안 갔으면 좋겠어?"라고 말이다.
우리는 단 1초의 망설임이 없었다. " 응 이모 가지 마"라고 말했다.
엄마가 화를 냈다
"아이고 이것들아 너희 이모도 시집가서 애 낳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언제까지 너네들 뒷바라지를 해주냐"
라고 말이다.
그때 "뒷바라지"라는 말은 이해가 안 갔고, 무조건 "뺏긴다"에 초점을 뒀었다.
"아 몰라. 가지 마"라고 한참 때를 썼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이모부의 등장!
잠시 마산집에 휴향을 하고 있을 때였나 보다.
저 멀리서 키가 엄청 크고 얼굴은 밀가루 마냥 허여멀건 사람이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으로 하늘하늘 거리는 고무풍선처럼 걸어온다.
이모와 결혼할 사람이라고 한다.
그때 언니랑 내가 둘이서 속삭였다. " 아니 뭐가 저렇게 커?" " 우리 이모가 훨씬 아깝잖아!"
"너 인사할 거야?" "아니 안 할 거야" " 언니 인사 할 거야? " " 아니 나 바빠 안 할 거야" 서로 입을 맞췄다.
아무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전부 다 외면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화장실이 급해도 나오지 않았다.
일종의 "대모" 였을 것이다. 시집을 보내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
하지만 우리 맘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 이후로도 결혼하기 전에 우리와 친해지고 싶었는지 몇 번 더 오셨다.
하지만 맘에 들지 않는다. 그냥 싫다. 키 큰 것도 싫고 얼굴 하얀 것도 싫고 경상도 사투리 쓰는 것도 싫고 다 싫다. 일명 "무조건 싫다 연발"이다. 우리가 안된다고 결혼을 안 할 건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 이모와 이모부가 될 사람은 결혼을 했다.
이후 이모를 보는 날이 줄어들었고 그 원망은 고스란히 이모부한테 갔다.
이모부가 결혼 후에 오셨어도 한동안은 전혀 인사를 하지 않았다. 내가 20살이 넘어 24살이 될 때까지 거의 말을 안 했던 기억이다. 이모를 지키는 미션은 그렇게 아쉽게도 "엔딩"으로 "세드엔딩"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우리 이모를 이모부는 누구보다 사랑해 주셨다. 그건 확실하다.
당연히 난 우리 이모부를 엄청 좋아한다. 하지만 이때는 아니었다. 그걸 이모부도 아신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셨고 난 이모부가 돌아가셨을 때 실신할 정도로 울어댔다. 추억도 많았다, 난 이모부를 너무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계시지 않는다. 이모부가 살아 계셨을 때 나에게 항상 이야기하셨다.
"너 내가 너네 이모 데리고 갔을 때 그렇게 싫어하는 거 나 아주 섭섭했다?"라고 말이다.
"이모부. 그땐 그랬죠! 우리 이모가 얼마나 이쁜데! 이모부 행운인 거예요!"라고 말했고
이모부는 또 재치가 넘치셔서 "에고 야. 내가 더 멋있지! 너네 이모랑 말하려면 내가 얼마나 긴장을 하는 줄 알아?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초 집중을 해야 돼!" "어떨 때는 듣다가 너무 힘들어서 기절할 때도 있어!"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이모부는 누구의 캐릭터를 잘 잡는다.
그 사람의 특징을 잘 잡아내고, 흉내도 잘 내신다. 이모부랑 5분만 이야기를 해도 그 매력에 흠뻑 빠진다.
너무 재밌는 분이시다. 그래서 난 이모부와 대화하는 걸 꽤 즐거워했다.
어릴 적 이야기만 하면 항상 웃으시면서 그때의 심정을 이야기하셨다. 나 또한 그랬었고 그렇게 이모부와 많은 가족의 정을 나누면서 이모의 짝꿍인 이모부가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이모부 이야기를 많이 적고 싶은데, 너무 가슴이 먹먹해서 차마 많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이모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난 그때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이모부는 급성 백혈병으로 돌아가셨다.
이모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참으로 건강하고 멀쩡 하셨다.
이모부는 항상 씩씩하셨고 늠름하셨으며 정의를 위하셨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시는 성격이다.
한번 전체 가족 모임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난 했다.
그래서 가족을 전체 다 집합시켜 "제주도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었다.
제주도에 가서 이모부랑 이모 그리고 욱적 북적 시끄러운 우리 가족들 노래방도 가고 회도 먹고 낄낄대면서
우리 전체 가족의 "첫 번째 제주여행"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전에 "가족 일본 여행"도 이모부와 같이 같았다. 이모부와는 여행을 "가족 일본 료칸 여행"을 다녀왔고
이후 "제주가족 여행"을 갔다.
제주도 가족여행을 가기 전에 딱한 명 "우리 아빠"의 스케줄이 안 맞았다.
다들 다음에 가자고 했지만 "아빠 그럼 빠져" 우리는 갔다 올게 이렇게 하면 다 못가.라고 해버리고서는 다 같이 아빠만 빼고 갔다 왔다.
그렇게 제주도 여행을 끝내고 2주도 안되어서 이모부가 급성 백혈병으로 쓰러지시고 항암치료를 몇 년 하시다가 힘들게 돌아가셨다.
가족들은 그런다 "그때 마지막에 제주도에 가서 좋은 추억 쌓아서 다행이야.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기억이 좋았는지 이야기 많이 했어"라고 이모가 전해주었었다.
눈물이 난다. 이모부와 더 많은 곳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갈 수 없다.
이모부가 돌아가시는 날 난 새벽에 꿈을 꿨다.
꿈에서 나는 이모부집에 놀러 갔다.
이모부가 멀쩡해 보인다.
"이모부" " 이제 안 아파요?"라고 내가 물었다.
이모부는 안방에서 옷을 챙기시면서 케리어에 짐을 넣고 계셨다.
"하얀 와이셔츠와 정장 몇 벌 챙기고 계셨고, 평소 입고 계시던 흰 티와 반바지를 입고는 침대에 앉아서 짐을 싸고 계신다...
"어! 00이 왔어??? 이모부 이제 안 아파! 정말 멀쩡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아 진짜 다행이다. 이모부 그럼 이제 우리 여행 가요!"라고 말했다.
"여행 좋지! 근데 이모부는 같이 못 갈 거 같아."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활짝 웃으셨다.
그러고는 잠에서 깼다. 그때 부고 문자가 와있다. 이모부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펑펑 울었다. 정신줄을 놓을 만큼....... 이모부가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그때 코로나 때문에 이모부 병문안도 못 갔다. 못 들어 가게 해서이다. 그래서 항상 영상통화를 했다.
"이모부 오늘은 어때요???" 이런 말을 매번 했다.
항상 "이모부? 괜찮지 ~~ 하면서 장난을 치셨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서는 매우 또 아프셨었나 보다.
우리에게 티를 안 내신 거다.
너무 그립다. 아직도 생각이 난다. 이모부가 말이다.
하지만 산 사람이 너무 돌아가신 분을 그리워하면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한다고 하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나는 너무 그립지만 가슴속에 묻어둔다.
우리 이모는 더할 것이다. 이모가 외롭지 않아야 할 텐데... 요즘 바쁘다는 핑계로 이모를 챙기지 못했다.
반드시 성공해서 이모부에게 못해준 미안함을 나의 소중한 이모에게 다 해줄 것이다.
그리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다. 그 옛날 어릴 때부터 우리 이모가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살았던 만큼 그보다 더 이모에게 잘하고 싶다.
난 우리 이모를 정말 정말 사랑한다. 이모 없는 인생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지금 글을 쓰면서 이모가 없어지면 어쩌나 갑자기 겁이 난다. 이모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몸이 약해서 자주 아프신데, 건강했으면 한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더 성공하면 세계여행을 함께 하고 싶다.
to. 사랑하는 이모에게
이모의 반쪽은 좋은 곳으로 가셨지만, 이모는 조금 있다가 더 있다가 가도 돼.
우리와 함께 조금만 더 많은 곳을 보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다니고 행복하다가 아주 아주 행복한 기억만 가득가득한 채로, 그렇게 우리랑 계속 같이 있었으면 해.
아직도 조카들한테 아프다고 말도 안 하고 혼자 끙끙 대고, 이모 그러지 마.
이모가 아프면 우리가 더 아파. 이모도 그렇잖아! 우리가 아프면 이모는 더 아파하잖아!
그러니 우리 서로 아프지 말자! 사랑해 이모!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하려고 한다.
오늘 첨으로 글을 쓰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 눈물이 슬픔의 눈물일까.... 그리움의 눈물일까.... 추억에 대한 회상의 눈물일까....
그 답은 굳이 찾지 않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