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고 축복하는 나의 임신아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나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기 위해 기대를 포기하는 선택을 해왔다.
이 문장은 나의 삶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실망은 나에게 너무나도 큰 감정적 타격을 주었기에,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 나의 방어기제가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보고 싶던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도 나는 항상 ‘그렇게까지는 재밌지 않을 거야. 기대하지 말자’라고 다짐하며 영화관에 들어갔다. 누군가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어쩌면 실망을 미리 차단함으로써 감정적 상처를 피하려는 본능적 행동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행동의 배경에는 심리학적 설명이 있다. '자기 보호 기제‘라고 불리는 이 개념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감정적 고통을 주는 상황을 피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을 때 실망으로 이어지며, 이는 큰 감정적 상처로 남을 수 있다. 특히, 과거의 트라우마가 이러한 행동을 강화시킬 수 있다.
나에게 성격적인 문제가 보일 때, 항상 돌이켜 생각나게 하는 사건이 있다. 청소년기 때의 따돌림.
청소년기, 나는 또래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며 오랜 기간 고립되었다. 그 시절 느꼈던 수치심과 공포는 지금도 생생하다. 청소년기는 사회적 소속감과 자아 형성이 중요한 시기이다. 에리크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 이론에 따르면, 이 시기의 중요한 발달 과제는 '자아정체성 대 역할 혼란'이다. 그러나 나는 그 과정에서 '역할 혼란'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나의 자아정체성은 혼란 속에 남겨졌다.
이 사건 이후로 나의 성격은 크게 변했다. 나를 표현하는 것에 소극적이 되었고,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관심도 생겼다. 이러한 변화는 아마도 ‘반응적 애착 장애’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장애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불안과 어려움을 겪는 상태를 말한다.
어찌 되었든, 그 시절 친구에 대한 기대는 상처가 되어 돌아왔고, 나아질 것이라는 상황에 대한 기대는 수치로 돌아왔던 것은 사실이다.
기대는 실망으로, 기대하지 않음은 평정으로 이어지는 패턴은 나의 인생에서 반복되었다. 그로 인해 나는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나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도 있다.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감정적으로 둔감해졌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침착하고 초연한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나는 삶의 작은 기쁨들을 놓치고 있었다. 긍정심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대는 우리에게 희망과 동기를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올해 봄, 임신이라는 커다란 변화가 나에게 찾아왔다. 임신은 나에게 단순히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과정 이상이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기대하지 않는 나'에서 '기대하는 나'로 변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내가 바라본 '기대하는 사람'의 특징은 하루를 설레는 것들로 가득 채울 수 있는 능력, 기대해서 실망한 시간보다 기대하며 느끼는 즐거운 감정의 시간이 더 길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즐거움을 전해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삶으로의 전환
임신을 하면서 나는 내 아이에게 좋은 것들을 보여주고,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의 아이가 '기대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그러기 위해 엄마인 내가 먼저 '기대하는 사람'이 되려 한다.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감정적 안정도 중요하지만, 기대하며 살아가는 삶이 주는 기쁨과 설렘 역시 포기할 수 없는 가치임을 깨달았다.
'기대'와 '실망'의 균형을 찾는 여정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대'가 단순히 실망을 피하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아이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하기 위한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은 긍정적 정서가 개인의 회복력과 웰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강조한 바 있다. 긍정적인 기대는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결국, 나는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며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다. 이러한 선택이 내 아이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아이가 기대하고, 실망도 하며,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 삶을 살길 바란다. 엄마로서, 나는 그런 아이를 위해 '기대하는 사람'이 되기를 다짐한다.
이제, 나의 삶은 '기대하지 않는 삶'에서 '기대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천천히 변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주는 새로운 희망과 설렘이 나에게 더 큰 기쁨을 선사하고 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