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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skim Nov 17. 2024

통일신라의 명군들(2)

- 성덕왕릉을 찾아서 - 

  통일신라 제33대 성덕왕은 32대 효소왕이 16세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효소왕과 성덕왕은 신목태후 소생으로 동복형제이다. 왕의 시호를 보면 그 왕의 업적과 역할 등 특징을 알 수 있다. 즉 시호는 그런 것을 감안해 짓는다는 뜻이다.

  무열왕과 문무왕은 삼한일통을 이룬 영웅에 걸맞은 이름인데 그 후계자인 31대 왕의 시호는 神文王이다. 왕호에 神자가 들어간 경우는 53대 神德王과 둘이다. 뭔가 이 당시에 왕통을 신성시하는 장식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孝昭王은 孝照王으로도 불린다. 왕호에 孝자가 들어간 것은 선왕을 계승했다는 의미이지 효자라는 뜻은 아니다. 34대 효성왕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사람 이름에 함부로 쓰지 않는 글자가 바로 聖자이다. 聖은 유교에서는 聖人이나 聖天子의 의미로 쓰이고 불교에서는 전륜성왕의 의미로 사용된다. 즉 왕호에 聖자가 들어가 있는 왕은 불교를 진흥한 왕이거나 전륜성왕을 자처하며 왕권을 강화한 강력한 군주를 말한다. 백제에 성왕이 있었고 신라에 성덕왕이 있다. 다만 청해진을 파하고 장보고를 죽인 찌질이 왕인 46대 文聖王도 성자를 쓰고 있다.

이는 사찰을 많이 건립하는 등 친불교 정책을 편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럼 통일신라시대 위대한 명군 성덕대왕릉을 찾아가 보자.


흥덕왕릉처럼 성덕왕도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그런데 소나무들이 모두 곧지 않고 뒤틀려 있다. 그래서 옛말에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다. 


통일신라시대 최초로 완비된 왕릉이 성덕왕릉이다. 왕릉에 12 지신상. 석사자, 문무인석 등의 석물 배치는 성덕왕릉에서 시작되었으므로 통일신라 왕릉 묘제의 전형이 성덕왕릉이다. 기준이 되는 왕릉이기에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왕릉 네 귀퉁이에 사자상이 있다. 이로써 보면 원성왕릉의 사자 네 마리는 앞쪽으로 옮겨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보탑이나 분황사탑에도 방위별 네 귀퉁이에 사자가 있다. 즉 사자는 군대용어로 사주경계 서고 있는 것이다.


다시 자세히 보았다. 문인석인데 자꾸 앞의 옷자락에 칼을 숨기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뒷 옷을 갑주로 보기 때문인데 이는 현대적 사고이다. 무인석이 따로 옆에 있는데 왜 문인석이 칼을 들고 있게 만드나. 당시 관복을 좀 더 연구하면 옷이 갑주가 아님을 알 것이다. 근데 문인석의 두상이 몸체와 색깔이 다르다. 떨어져 있는 걸 올려 붙인 것 같기도 하고. 아예 새로 만든 것 같기도 하다. 



능의 둘레석이 있고 역삼각형 모양의 받침석이 탱주를 받치고 있다. 그리고 앞의 난간석을 연결하고 있는 가로로 된 장대석의 모양이 육각형이다. 김유신 묘나 원성왕릉 모두 육각형인데 42대 흥덕왕릉은 구멍이 둥근 원형이다. 흥덕왕릉도 주인이 명확한 능이므로 각형이 원성왕릉과 흥덕왕릉 조성 사이에 원형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본래 12 지신상은 신장으로 불교의 탑 기단부 등에 조각이 되었다. 그것이 왕릉으로 옮겨왔다. 

12 지신상이 왕릉 면석에 부조로 조각되어 있지 않고 별개로 만든 후 면석 앞에 배치하였다. 성덕왕릉부터 12 지신상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초기 묘제에서는 따로 만들어 세웠다가 어느 시기에 면석에 부조로 조각하는 것으로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황복사지 폐왕릉이 효성왕의 능이라면 성덕왕 다음 대부터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폐왕릉의 12 지신상. 면석에 부조되어 있다.



성덕왕릉 귀부는 사후 18년이 지난 경덕왕 13년(754년)에 세웠다. 흔히 시간이 지날수록 문명과 기술이 발달하여 후대에 만든 것이 전대의 것보다 미적으로나 완성도 면에서 더 발전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미술공예나 건축은 그 시대의 문명 수준을 반영하기 때문에 후대가 전대에 비해 꼭 진보한다는 법칙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문명이 극성기를 지나면 쇠퇴하기에 그렇다. 귀부에 비석을 세우는 방식은 태종 무열왕 대부터 시작되었다. 무열왕릉 귀부는 공예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솜씨를 자랑한다. 그 후에 만든 귀부는 모두 이에 미치지 못한다. 거대해지긴 하나 조형성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성덕왕릉 귀부이다. 비신은 사라지고 받침석인 귀부만 있는데 그나마 거북이 목은 잘라나갔다. 세월 탓인가? 우측의 귀부가 쪼개졌다. 등 위 비석을 세웠던 받침 홈도 없다. 이 정도면 파괴에 가깝다. 자연적 재해로 이 정도가 되진 않는다. 인간들이 고의로 훼손시키고 비신은 다른 용도로 쓸려고 훔쳐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제일 궁금한 점은 귀부의 머리가 용일까? 거북이 일까이다. 이는 아주 중요하다. 어느 쪽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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