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복사지 석탑의 비밀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이 국토를 통일했으나 고구려인, 백제인들이 바로 통일신라인이 된 것은 아니다. 현재 한반도 남쪽도 국민통합이 안되는데 하물며 700년 이상 분열되어 각기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어찌 단박에 통합이 되겠는가?
그것은 후왕들의 몫이었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려운 법이다. 무열왕과 문무왕은 창업을 했지만 통일대업을 유지해 나가는 것은 그들 후계자들의 몫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통일 직후 명군들이 등장하여 그 위대한 통일대업을 계승해 나가고 문물의 극성기를 이룩하였다. 그 주인공이 신문왕 - 효소왕 - 성덕왕 - 경덕왕이다. 이른바 진골 정권의 후계자들이다.
31대 군주 신문왕은 왕권을 안정시켰고 성덕왕은 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경덕왕은 그 토대 위에서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탑이며 또한 격동에서 안정기로 접어지는 통일신라의 사회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상징탑이 바로 황복사지 3층 석탑이다.
효소왕과 신목태후는 황복사를 신문왕의 원찰로 삼고 진골 정권의 안정을 기원하는 발원으로 692년에 3층 석탑을 건립하고 신문왕의 얼굴을 본뜬 금제 불상을 탑에 안치했다. 사리기 명문에 황복사를 성령 선원가람이라고 표현했다. 즉 황복사가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 가람이란 뜻이다. 진골 정권의 정통성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이다.
그 중심에 황복사지 3층 석탑이 있다.
3층 석탑은 둔덕 위에 세워져 있고 탑 아래에 큰 건물지가 발굴되었다. 그럼, 이 건물지는 금당이었을까? 아니다. 대석단으로 추정된다. 즉 성령 종묘 건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황복사가 다른 사찰과 다른 점이다.
왕실 원찰이며 종묘가람이었으므로 사역이 넓었을 것이다. 출토된 석재들을 모아놓았다.
(목이 달아난 귀부다.)
그런데 절 인근에서 왕릉에나 쓰였을 12지신상이 출토되었다. 12지신상은 왕릉의 둘레석 사이의 면석 또는 그 앞에 수호신의 의미로 조각되어 세워졌다.
석탑에서 250m 떨어진 곳에서 왕릉을 조성하려다 중단된 폐왕릉 유구가 발견되었다.
비록 폐왕릉이지만 12지신상이 무덤 둘레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시원적 왕릉이다. 누구의 무덤이었을까? 황복사가 신문왕의 원찰이므로 이 폐왕릉이 신문왕릉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리고 낭산기슭에 있는 현 신문왕릉을 효소왕릉으로 보고 현 효소왕릉은 일반 귀족들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석재들은 미완성된 왕릉 부재들로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황복사지에 있는 폐왕릉은 누구의 무덤일까. 가장 유력한 왕이 34대 효성왕이다. 효성왕은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왕이 되어 5년을 재임하였는데 병이 걸려 젊은 나이에 훙서했다. 왕이 오랫동안 병석에 있었으니 오래 살라는 의미로 壽陵(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살아있을 때 미리 축조한 왕릉, 수의와 같은 개념이다.)을 축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왕릉을 만드는 도중에 왕이 죽었고 유언으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 바다에 뿌려달라고 했기에 능 축조 공사가 중단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폐왕릉으로 남았다는 것이다.
이 설에 나도 일단 긍정한다. 왜냐하면 황복사가 초기 진골정권의 종묘 가람이고 석탑의 조성자가 효소왕과 성덕왕이므로 그 후계자인 효성왕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왕릉 주위의 둘레석에 12지신상을 조각하여 배치한 것은 33대 성덕왕부터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진덕여왕릉에 12지신상이 있는 것은 다른 왕릉 추정) 효성왕릉 즉 폐왕릉은 두번째로 12지신상을 조각한 셈이다. 근데 면석에다 직접 부조로 조각한 형식이어서 12지신상을 환조로 독립적으로 조각하여 앞에 배치한 성덕왕릉의 것과 다르다. 그 사이에 12지신상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
33대 성덕왕릉에는 위의 사진처럼 12지신상을 면석에 직접 새기지 않고 따로 만들어 면석 앞에 배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