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덕왕릉을 찾아서 -
한 왕조가 뿌리를 내릴려면 주춧돌을 박고 기둥을 세우는 일을 하는 창업자가 있고 그 위에 서까래와 대들보 그리고 지붕을 잇는 수성자가 있어야 한다. 집의 외형이 갖추어 지면 내부에 화려한 치장을 하여 나만의 스타일로 집을 아늑하고 편안하게 하여야 한다.
이를 통일신라시대로 말하면 창업자는 문무왕이고 수성자는 신문왕과 성덕왕이며 집을 완성하여 통일신라를 내외측면에서 최종 완성한 왕은 제35대 경덕왕이다. 이때에 와서 비로소 고구려인, 백제인, 신라인이 통합되어 통일신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대 통일신라의 완성자, 그가 景德王이다. 시호가 그렇지 않은가.
경덕왕은 형인 효성왕이 후사 없이 일찍 훙서하자 이어 즉위하였다. 성덕왕과 경덕왕은 장남이 아니니 본래 왕이 될 지위에 있지 않았으나 형들이 후사를 두지 않고 일찍 죽는 바람에 왕이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통일 후 혼란기에 어린 군주가 즉위한다면 나라가 위태로울 수 있었을텐데 다행히도 형제가 즉위해서 왕으로써 통치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 그들이 명군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래 재임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현명한 군주라도 일찍 죽으면 기량을 펼칠 수 없다. 조선의 문종과 인종이 그런 예이다. 세종이 성군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재위기간이 30년이 넘었다는 점이다. 성덕왕은 35년, 경덕왕은 23년 재위했다. 이 58년이란 기간에 통일신라는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자. 12지신상을 자세히 보자. 성덕왕릉의 12지신상은 별도로 만들어 면석 앞에서 세워 배치했다. 그러나 경덕왕릉은 어떤가? 들어갔다. 탱주석에다 아예 조각을 했다. 둘레석의 일원인 탱주석에다 진한 고부조로 12지신상을 조각하였다. 공예측면에서 보면 진보한 것이다.
왜 능에다 12지신상을 조각했을까. 하나는 방향이고 또 하나는 방위 수호신의 역할이다. 그래서 무장의 복장을 하고 있다. 다만 김유신 묘의 12지신상만은 무인의 복장이 아닌 문관의 옷을 입고 있다.
아주 잘 다듬어 놓은 통일신라 묘제의 전형이다.
부록으로 12지신상 변화를 비교해 보시지요.
1. 성덕왕릉(33대)
별도 제작에 환조이다. 무인복장.
2. 효성왕릉(폐왕릉)(34대)
면석 안으로 들어갔으며, 오목하게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부조로 12지신상을 조각했다. 그리고 문관복이다.
3. 경덕왕릉(35대)
탱석 부분에다 고부조로 12지신상을 조각했으며 무장의 복색이다.
4. 김유신 장군 묘(흥무대왕릉)(7세기)
김유신은 통일신라인이 아니다. 7세기 삼국시대 인물인 김유신 묘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조각이란 일정한 패턴이 있고 특히 왕릉의 장식으로 배치되는 조각은 그 시대 트렌드를 보여준다. 만약 현 김유신의 묘를 통일 전 묘제로 보면 12지신상이 있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태종무열왕릉에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가설은 김유신이 흥무왕으로 추숭되는 42대 흥덕왕 시기에 묘를 다시 왕릉으로 개축했을 가능성이다.
그래서 이 시기 시대조류를 반영해 12지신상을 조각했을 가능성이다. 이는 흥덕왕릉 12지신상과의 면밀한 대조와 비교 고찰이 필요하다. 왕릉 전문가인 고 이근식 교수는 현 김유신 묘를 35대 경덕왕릉으로 지목한다. 묘제가 너무 완벽하다는 것이다.
5. 42대 흥덕왕릉
흥덕왕릉의 12지신상이다. 동시대라면 김유신 묘의 그것과 비슷한가요? 김유신은 무장인데 12지신상이 문관 복장을 하였고 흥덕왕릉의 그것은 무장복장을 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조성했다면 왜 복식을 거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