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덕왕과 장화부인의 잉꼬 사랑 이야기 2 -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제42대 흥덕대왕(興德大王)이 보력(寶曆) 2년(826년) 병오(丙午)년에 즉위하고, 얼마 안 되어 어떤 사람이 당(唐)에 사신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는데,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었다. 홀로 남은 수컷이 애처롭게 울기를 그치지 않자, 왕은 사람을 시켜 앞에 거울을 걸게 하였다. 새가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 짝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여 그 거울을 쪼다가 그림자임을 알고서 슬피 울다가 죽었다. 왕이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알 수 없다."
얼마 전 죽은 우리 집 앵무새 수리와 벼리 이야기가 생각난다.
수리는 수컷, 벼리는 암컷 앵무새이다. 둘은 티격 태격했지만 서로 사랑하고 사이가 좋았다. 어느 날 벼리가 알 4개를 한꺼번에 낳았다. 엄마 벼리는 알 4개를 교대로 품느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새 장 앞에 밥을 갖다 주면 한참을 뜸 들이다가 잠깐 나와 밥을 먹고 얼른 들어가 다시 알을 품었다.
엄마 새는 하나인데 알이 4개다 보니 알을 돌아가며 종일 품다가 지쳐갔다. 4개의 알을 계속해서 품고 있는 것은 여간한 중노동이 아니다.
밥도 거의 못 먹고 알을 품은 채 꿈쩍도 하지 않으니 자연 엄마 벼리의 몸은 쇠약해져 갔다. 걱정이 되어 밥을 바로 앞에다 갖다 놓아도 혹시 그 사이 알이 어떻게 될까 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엄마 새는 이렇게까지 무리를 하면서 알을 품는 걸까. 아마, 이전에 서툴러서 알을 제대로 품지 못해 부화되지 않은 채 새끼를 잃은 슬픔과 경험을 기억해 이런 행동을 취하는 것 같아 동물이지만 모성애에 마음이 짠했다.
새끼 넷을 부화시키려고 밥조차 먹지 않고 1주일을 견디던 어미 벼리는 털이 다 빠지도록 알에서 떠나지 않았고 쇠약해진 몸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힘들어하는 벼리가 걱정되서인지 수컷 수리는 알을 품고 있는 벼리에게 다가갔으나 그때마다 벼리는 신경 쓰인다는 듯이 쫓아냈다.
1주일 전 벼리가 죽은 후 수리는 혼자 남았다. 죽은 벼리는 베란다 화단에 묻었다. 얼마 뒤 벼리의 죽음을 인지했는지 수컷 수리는 화단 주위를 맴돌면서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집에 들어가 밖에 나오지 않았고 밥을 줘도 먹지 않았다. 아침에 너무 기척이 없어 새 장을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수리가 밖으로 나와 내 어깨에 앉았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시간 뒤 수리는 숨을 거두었다. 조용히.
아, 죽기 전에 자신을 돌봐 준 주인에게 마지막 하직 인사를 한 것이구나 생각하니 애통한 마음이 들었다.
새끼를 잃지 않기 위해 곡기도 끊고 알을 품다 죽은 벼리, 그런 벼리를 잊지 못해 1주일간 곡기를 끊고 슬퍼하다가 아내를 따라 죽은 남편 수리.
흥덕왕의 앵무도 그러했을 것이다.
왕이 되자마자 돌아간 왕비를 그리워하며 홀로 지냈던 흥덕왕, 그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아내의 무덤에 자신을 같이 묻어달라고 했다.
그런데 왜 장화왕후의 능은 그렇게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조성했을까.
상상을 해보자면 장화왕후는 도성을 떠나 외진 곳에 조용히 묻히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가까이 있으면 막 왕위에 오른 부군이 정사를 소홀히 할까 봐 심모원려의 마음으로 일부러 먼 곳에다 묻어달라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흥덕왕은 시호처럼 신라 하대의 마지막 중흥주였다. 장보고를 등용하고 청해진을 설치하여 한중일 무역을
활성화시켰고 외국 상품이 나라안에 유행하자 사치를 금하는 법령을 공포하기도 하였다. 왕은 나라를 순시해
환과고독(취약계층)의 사정을 살피고 곡식을 하사해 위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비를 잃고 상심한 나머지
건강이 악화되었고 재위 11년 만에 승하하고 말았다. 유언에 따라 안강에 있는 장화왕후능에 안장되었다.
흥덕왕과 장화왕후의 합장릉. 경주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안강에 있다.
흥덕왕릉엔 유난히 소나무 숲이 우거졌다. 왕이 되기 전 흥덕 아니 김수종 왕자와 장화공주는 이곳에 놀러 와
아름다운 추억을 쌓은 것은 아닐까? "나, 잡아 봐라~" 그래서 장화부인은 추억이 깃든 이곳 비화양(안강)에다
묻어달라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