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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천관사지를 찾아서

-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 품은 천관사지 - 

by jskim Jan 12. 2025

경주 천관사지를 찾았다. 최근에 정비를 하여 팔각 석탑이 하나 서 있다. 

이렇게 탑의 석재들이 널브러져 있던 것을 조립하여 탑을 복원한 것이다. 

자. 탑의 지붕돌이 팔각이고 주름돌(지붕돌 층급받침돌)이 연꽃 모양이다. 거의 새로 복원했기에 탑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층급받침돌이 연꽃모양인 탑은 여기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을 어떻게 고증한 것일까?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그 증거가 있다. 


근데 왜 이 원형돌을 탑의 복원에 사용하지 않은 걸까? 구구한 추측이 난무한다. 기단부는 여느 통일신라 석탑 양식이고 탑신부는 팔각형 형태라 이형탑이라 표현하였다. 



전설은 전설대로 놔주자. 굳이 밝힐 필요가 있을까.

천관녀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 토속신의 제사를 주관하는 일을 하던 여사제로 보여진다. 신라 상고기에는 큰 권능이 부여되어 있었으나 불교가 토속신앙을 대체하자 지위가 떨어져 천시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니 술을 팔고 기예를 하는 기녀가 되었을 것이다. 이인로의 파한집에는 女隸家라 했으니 마치 여종처럼 여겼다는 말이다.


사진을 보면 도당산 아래에 천관사지가 있다. 도당산은 도당굿이라 하듯이 토속신앙의 장소이다. 천관은 토속신앙과 도교가 습합되어 제사를 주관하는 직책이었을 것이다. 김유신이 열박산에 올라가 천관에게 기도했다는 기록을 봐도 전통적인 신앙체계 속에 천관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유신이 천관녀와 어울리는 것에 만명부인이 반대한 것은 신분의 차이도 있지만 당시 왕실 등 고위층은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는데 출세해야 할 가야계 출신으로서 저급한 신앙을 담당했던 여자와 어울리는 

것이 탐탁치 않아서였을 것이다.

여하튼 천관사는 천관녀가 살던 집터에 세워진 절이다. 절을 누가 언제 세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몇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첫째는 천관녀가 생전에 자비를 들여 절을 세웠을 가능성이다. 사찰 창건은 재력과 공력이 들어가는 역사라서 신분이 낮은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둘째는 김유신 창건설이다. 설화의 당사자이니 가능성은 있으나 이또한 확률은 희박하다. 김유신은 냉철하고 앞을 재며 일생을 살았던 전략가이다. 그에게 순정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자신에게 불리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나 먼 훗날 늙어 70대가 되었을 때 혹 옛 일을 기억해 절을 지었을지 모르겠다.

셋째는 왕실의 창건설이다. 제일 신빙성이 있는 설이다. 원성왕이 천관사 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이걸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해몽한 것을 보면 천관사가 왕실의 원찰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토속 신앙이 쇠퇴하고 불교가 성행하자 토속신의 제사를 모시던 천관직은 폐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터에다 절을 세웠을 가능성이다. 신의 교체이다. 남미에 스페인 군이 들어가 잉카의 신전을 헐고 가톨릭 성당을 세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하튼 김유신의 집인 재매정 터와 천관사지는 500m 거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도당산 등 명산을 돌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하던 화랑 김유신으로서는 집으로 가는 길에 천관녀의 집에 들러 회포를 풀고 집으로 갔을 법하다. 자주 가다보니 말이 알아서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 것인데 김유신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말에게 전가해 말의 목을 쳤다. 목친 말은 그냥 버리고 달아났다.

천관녀는 원망하여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그게 怨詞이다.


어찌 절터에 사연이 없을까. 복원된 석탑만이 넓은 터에 홀로 서있으니 오직 뺨을 스쳐가는 바람만이 진실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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