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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궁터에 세운 창림사 석탑

- 창림사지 삼층 석탑과 쌍귀부의 위용

by jskim

세 번째 경주 답사를 온 것은 지난번에 이 창림사지 삼층 석탑을 보지 못해서다.

그래서 이번엔 창림사지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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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창림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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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을 읽어보자.

탑지에 의하면 46대 문성왕 17년(855년)에 탑이 건립한 것으로 기재해 놓고 또 맨 끝줄에는 기단부 팔부신장 조각 솜씨로 보아 8세기경 탑을 조성한 것으로 적었다.
그럼 이 탑의 건립은 9세기 중엽? 8세기? 문화재 안내판이 엉망이다. 안내판은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쉽게 명료
하게 써야 한다. 그럼 이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언제 건립되었고 또 왜 이곳을 신라 최초의 왕궁 터라고 할까?

알영의 탄생설화에서 "궁실을 남산 서쪽 기슭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 삼국유사의 찬자인 일연이 주석을 달기를 "지금의 창림사"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에서 "신라 때 옛 궁전 터가 있었는데 후인들이 그 자리에 절을 세웠다."는 것이다. 알영정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박혁거세 탄강지인 나정과 창림사는 1.6킬로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탑이 있는 위치에서 내려나 보면 경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벌판이어서 입지적으로 궁실이 들어설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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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서 내려다본 경주시 전경)


그건 그렇고 탑지에 말한 문성왕 대의 탑지에 대해 알아보자. 1824년경 추사 김정희는 두 번째 경주 방문을 했다. 이때 창림사 석탑에서 나온 사리구들을 친견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추사는 대중 9년(855년) 명 동판으로 만든 "무구정탑원기"를 그대로 베껴 남겨 두었는데 그 탑지에 의해 창림사지 석탑이 855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런데 석탑의 사리공에 비해 사리기 동판의 크기가 커서 사리공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게다가 창림사지에는 현존 삼층 석탑 외에 다른 여러 기의 탑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탑지가 지금의 삼층석탑에서 나온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 창림사지 삼층 석탑은 언제 건립되었을까. 천상 탑의 양식을 가지고 추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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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부신중상을 석탑에 새긴 것은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우리나라만의 특징이다. 상층 기단의 탱주를 줄이고 두 면석에다 총 8개의 팔부신중을 조각했다. 기단에 팔부신중을 조각한 탑은 남산동 서삼층석탑과 숭복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서로 비교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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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림사지 삼층석탑의 문비와 팔부신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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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동 서삼층 석탑의 팔부신중상. 상층 기단부 면석에 각각 8개를 조각한 것이 창림사지 석탑의 그것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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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지 석탑의 팔부신중상. 숭복사지 탑은 건립 연대가 885년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기준으로 역산을 해보자. 숭복사지 탑의 지붕돌 아래 층급받침돌(주름돌)이 4단이다. 이는 주로 9세기 이후 석탑에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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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림사지 삼층석탑은 크기가 서남산에서 제일 크고 기단부 양식이나 층급받침돌 등으로 보아 8세기 중엽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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