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신라 석탑의 특징과 건립 연대 알아보기
탑은 수투파라 하여 한자로 솔도파 또는 줄여서 탑파라고 한다. 부처의 유골을 안치한 墓이다. 인도에서는 산치 대탑에서 보듯이 사발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처럼 반구형의 복발이었다. 사리는 흙과 돌로 쌓아 올렸기에
맨 위에다 안치했으나 봉분을 올렸기 때문에 볼 수 없다.
그러다 불교가 동천하여 중국으로 오면서 분사리에 의해 부처의 진신사리를 이운해 왔고 그 사리를 보관하기 위해 탑을 만들었는데 초기에는 중국의 중층형 목조가옥을 모티브로 하였다. 즉 왕즉불 사상에 의해 임금이 사는 궁전의 궁궐 건축을 본땄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목조 건축의 기본구조가 탑에도 들어갔다.
탑은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목조 건축을 본땄으므로 지붕돌이 있고 지붕의 내림마루에 해당하는 우동이 있다. 그리고 옥개받침(주름돌)은 목조 건축의 공포를 본뜬 것이다. 기둥에 해당하는 것이 우주와 탱주이다. 모퉁이 기둥을 隅柱라 하고 면의 중간 부분 기둥 그러니까 안기둥을 撑柱라 한다. 이 모두 목조건축에서 온 구조이다.
인도 산치 대탑을 보면 왕릉과 같은 거대한 무덤임을 알 수 있다. 맨 정상부에 사각형으로 구획을 짓고 세 개의 둥그런 형태의 수직의 기둥을 세웠다. 신성함의 표현이다.
중국에서 탑이 전각형태로 조성되고 목재로 만들다 보니 사리는 목탑을 지탱하는 심주 아랫부분 땅으로 들어가서 안치되었고 인도의 복발형 형태는 탑의 상륜부로 올라가 축소되었다. 즉 상륜부에 인도식 장제 문화를 반영했으나 몸체는 완전히 중국식 전각형태로 변이 된 것이다.
초기 불탑은 목조탑이었다. 그런데 나무탑은 내구성과 화재에 취약하니 집 짓는 벽돌로 탑을 조성하게 되었다. 탑이 집을 만드는 것과 같은 건축이 된 것이다. 중국은 황하의 충적토가 좋아 탑에 벽돌을 이용한 전탑이 성행하였다.
우리나라는 석재가 풍부해서 석탑이 성행하였다. 물론 초기의 탑은 중국의 영향으로 목조탑을 만들었다. 탑은
백제가 신라보다 앞섰는데 현존 최고 최대의 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탑을 그대로 돌로 번안한 탑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목조탑의 형식을 많이 가미하였다.
미륵사는 3 탑 3 금당식 가람인데 가운데 중원에 9층의 목탑을 먼저 세웠는데 시기를 달리하여 두 기의 석탑을 좌우에 세웠다. 이 점이 특이하다. 목탑과 석탑이 동 시기에 같이 있는 절은 이 미륵사지가 유일하다. 거대사찰이다 보니 사찰 전각을 짓는데 목재가 많이 들어갔을 것이고 그래서 두 기의 탑은 재료로 돌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옆에 목탑을 두고 석탑을 만들었을 테니 지금 비록 목탑은 남아 전하지 않지만 석탑을 통해 목탑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석탑에는 본래 심주나 찰주가 필요 없는데도 미륵사탑은 목탑을 본땄기 때문에 심주석을 두고 그 안에 홈을 파고 사리기를 안치했다. 미륵사탑은 석탑이지만 목탑과 같은 거대한 전각형태를 띤다. 출입구에 문도 만들고.
정림사지 오 층 석탑은 백제 석탑의 전형이다. 목탑의 형식에서 불필요한 부분은 빼고 필요한 것만 석탑에 반영함으로써 뛰어난 정제미를 자랑한다.
이러한 백제의 뛰어난 조탑기술이 신라로 전해졌다. 목탑은 통일 전에 아비지를 통해 황룡사 9층 목탑으로,
통일 후 신라는 신라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옛 백제 지역에 많은 사찰을 창건했다. 물론 신라의 석탑 양식을
전파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