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왕과 장화부인의 잉꼬 사랑 이야기
신라 하대의 개창군주인 제38대 원성왕의 장남은 혜충태자 김인겸이다. 그러나 김인겸은 원성왕 7년(791년)에 죽었다. 그래서 왕 11년(795년)에 김인겸의 아들, 즉 손자 준옹을 봉해 태자로 삼았는데 이가 39대 소성왕이다. 그런데 혜충태자 김인겸에게는 장남 소성왕 외에 둘째 헌덕왕 셋째 흥덕왕 넷째 김충공이 있었다. 소성왕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애장왕이 되었으나 숙부 김언승이 조카를 시해하고 왕이 되니 이가 41대 헌덕왕이다. 헌덕왕의 뒤를 이어 셋째 동생이 왕이 되었다. 곧 42대 왕 흥덕왕(826~836)이다.
흥덕왕은 혜충태자의 셋째 아들이니 즉위 시 나이는 꽤 있었을 것이다. 소성왕과 헌덕왕의 재위만 18년이니 흥덕왕은 최소 30대에 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각고의 노력 끝에 왕이 되었건만 즉위한 지 2달 만에 왕후인 장화부인이 승하했다.
"왕은 왕비를 생각하며 잊지 못하고 슬퍼하며 즐거워함이 없었다. 이에 신하들이 왕에게 새 왕비를 맞아들일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짝이 없는 한 마리 새도 짝을 잃고 슬퍼하는데 하물며 좋은 배필을 잃은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어찌 무정하게 바로 다시 아내를 얻겠는가?라고 하면서 끝내 듣지 않았다. 또한 시녀도 가까이하지 않았고 좌우에 두고 부리는 사람은 오직 환관뿐이었다."
삼국사기 흥덕왕 본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흥덕왕이 그토록 사랑했던 장화부인은 누구일까?
장화부인은 김씨로 소성왕의 딸이니 흥덕왕에게는 조카이다. 숙질간에 근친 혼인을 한 셈이다.
흥덕왕은 10년간 왕 노릇을 하고 836년 겨울 12월에 승하하였는데 임종 시 먼저 죽은 장화왕후의 능에 합장토록 유언을 남겼다. 왕으로 있었으면서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그리워하며 수절을 지킨 흥덕왕. 여자를 멀리했으니 당연히 자식을 못 보았고 사후 격렬한 왕위 다툼이 일어났다.
그런데, 장화부인과 합장릉인 흥덕왕릉은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안강읍 육통리 산 42번지에 있다. 왕릉 주변에서 비 편이 발견되어 흥덕왕릉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럼 왜 흥덕왕릉만 유독 수도 서라벌에 멀리 떨어진
원거리에다 조성했을까? 물론 먼저 죽은 장화왕비 능이 거기 있었기 때문인데 왕이 그토록 사랑했다면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 능을 궁에서 바라보려고 가까운 도성 내 정동에 조성한 것처럼 또는 인도 무굴제국의 샤자한 황제가 뭄타즈 마할 왕비를 그리워하여 아그라 성에서 바라다 보이는 타지마할에 능묘를 만든 것처럼, 흥덕왕도 월성 가까이에다 왕비릉을 조성해야 이치에 맞을 텐데 거꾸로 먼 곳에 능을 만들었으니 무슨 이유에서 일까?
흥덕왕릉엔 유난히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42대 흥덕왕과 장화왕후 합장릉
사자는 사연을 알고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