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skim Oct 27. 2024

숭복사와 원성왕

- 신라 하대의 개창자 제38대 원성왕 

   옛 절터엔 석탑이 두 기 서있다. 비가 온 후라 처벅 처벅해서 신발에 물이 들어가는 바람에 발이 미끈 미끈하다. 생각보다 터가 꽤 넓다. 이 숭복사지 인근에 원성왕릉이 있는데 본래 그곳에 절이 있었다. 당시 이름은 곡사였다. 고니 鵠 字이다. 절에 고니 모양의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절이 있는 터가 명당이라 거기에 원성왕릉을 조성하고 절은 위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이때 절의 이름을 대숭복사라 하고 왕릉의 원찰로 삼았다는 이야기이다. 


  이곳은 원성왕릉으로 여기가 본래 곡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원성왕릉은 습지이다. 습지가 명당인가? 습지에 절을 짓는 것은 용 신앙과 관련이 있다. 황룡사지도 습지였다. 그런데 기존에 있던 절까지 옮기면서까지 왕릉을 조성한 이유가 뭘까?

  여기엔 기가 막힌 사연이 있다. 왕릉의 주인인 원성왕은 물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김경신은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으나 물 때문에 왕이 된 인물이다. 이가 원성왕이다. 37대 선덕왕 훙서 후 왕위 계승 순위는 김주원이 1순위였는데 마침 비로 인해 북천의 물이 불어 월성의 북쪽에 살던 김주원이 출근을 못했고 그 사이에 김경신이 얼른 궁궐로 들어가 왕이 되었다. 그래서 원성왕이 되었다. 물이 도와줘서 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원성왕의 물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가 김경신으로 있을 때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복두를 벗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꿨다. 복두는 벼슬아치의 관모인데 그걸 벗고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벼슬이 떨어질 흉몽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삼이란 자는 길몽이라 했다. 복두를 벗는다는 것은 왕관을 쓴다는 것이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니 길몽이라는 것이다. 꿈보다 해몽이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여하튼 원성왕은 물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으니 얼마나 물이 고마웠을까. 죽어서도 물을 도움을 받고자 했었나. 하필 습지에 들어서 있는 곡사를 빼앗아 능을 만들게 했다. 지금도 원성왕릉 뒤편엔 물길이 있고 물이 흐른다.


  죽어서도 물의 효능을 보려 했던 원성왕. 수맥이 흐르는 땅은 건강에 안 좋아 피하는 것이 상례인데 죽은 후 쓰는 무덤 터는 다른 것일까.

  최치원이 쓴 숭복사비문에 의하면, 숭복사는 제48대 경문왕의 모후인 소문왕후의 외숙이며 경문왕비인 숙정왕후의 외조부가 되는 파진찬 김원량이 세운 鵠寺가 그 기원이다. 그런데 원성왕의 왕릉을 조성하면서 풍수지리상 길지인 이 절터를 왕릉자리로 지목해서, 이에 절을 2.3킬로 떨어진 현 숭복사지로 옮기고 개창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절은 경문왕 대에 중수를 시작하여 헌강왕 11년(885년)에 절의 이름을 숭복사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역을 적은 비문을 헌강왕 12년에 최치원에게 짓도록 하였는데 헌강왕과 정강왕이 잇달아 승하하여 진성여왕 대에 이르러 완성되었고 실제 비석은 진성여왕 10년(896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내가 유심히 보는 주름돌(층급받침돌)은 4단이고 지붕돌과 하나의 돌로 깎아 만들었다. 석탑의 건립 시기를 885년으로 잡는다면 9세기 말엽의 탑이다. 탑은 많이 훼손되었으나 팔부신중상은 부조가 명확하고 왕실 원찰답게 솜씨가 뛰어나며 상태도 잘 남아 있다. 9세기 선종이 유행하면서 탑에 팔부신중, 인왕상, 사천왕상 등을 탑의 기단부나 탑신에 장식하는 풍조가 유행했다. 탑이 형식화되고 기교가 발달한 것이다.


왕실 사찰답게 비석을 이고 있는 귀부가 쌍귀부이다. 비신은 없어졌으나 쌍귀부는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있다.  

이전 02화 처용은 실제 인물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