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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skim Oct 20. 2024

처용은 실제 인물인가?

- 처용의 정체 

제49대 헌강왕 대는 통일신라 시대의 극성기였다.

삼국유사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헌강대왕 때는 京師(서라벌)에서 海內(동해)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연이어져 있었으며,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 풍악과 노랫소리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철마다 순조로웠다."


그런데 滿月은 곧 기울게 되듯이 극성기는 또한 쇠퇴를 잉태하고 있다. 헌강왕 대를 마지막으로 신라는 쇠퇴의 길을 가게 된다. 정강왕의 짧은 치세에 이어 진성여왕이 즉위하자 나라는 반란으로 혼란에 빠지고 서서히 망국으로 가는 길목에 접어든다.

  어쨌든 헌강왕은 태평성대에 아주 만족해했다.


{어느 날 왕은 지금의 울주 지역인 개운포에 소풍을 갔다가 돌아가려 하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게 되었다. 왕이 괴이하여 일관에게 물으니 일관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시어 이를 풀어야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유사에게 명해 용을 위해 그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했다. 왕령이 내려지자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개운포라 이름하였다. 동해 용은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풍악을 연주하였다. 그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들어와 정사를 도왔는데 이름은 처용이라 했다.}


"왕이 서라벌로 돌아오자 영취산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望海寺라고 했다. 곧 용을 위해 세운 절이다."


 이상은 삼국유사 기이 편의 처용랑 망해사조에 나오는 처용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설화는 진짜일까?

통일신라 시대 울산은 신라의 공식적인 대외 무역항이다. 이곳을 통해 신라는 중국, 일본은 물론 멀리 동남아시아와 대진국(고대 로마제국), 대식국(이슬람 곧 사라센제국)과도 무역을 하였다.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는 처용은 누구였을까? 지금도 궁중무용으로 처용무가 전해오고 처용탈이 존재한다. 악학궤범에 실린 처용탈은 인자하고 소탈한 할아버지상으로 험상궂지 않다. 문제는 처용은 악귀를 쫓는 가면인데 웃고 있다는 것이다. 


   처용은 누굴까. 용의 아들이라 하니 그는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다. 근데 하필 지역이 신라의 무역항인 울산이다. 그럼 처용은 바다를 건너 무역을 하러 온 외국 상인이 아니었을까. 용모가 토착 신라인과는 다르게 생겼으니 악귀를 쫓을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16세기 남미의 잉카족들은 백인 스페인 정복자들이 침입했을 때 그들을 환영했다. 자신들과 다르게 생긴 백인들이 자신들이 믿는 창조신 비라코차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자신들과 용모가 다른 인간을 보면 다른 세계에서 온 神이라 생각한다. 신라는 문명국가라 용모가 다른 처용을 신까진 아니어도 그가 신통력을 가진 인간이라 충분히 생각했을 만하다. 그래서 여러 설화가 생겨났고 그중의 하나가 역신을 쫒는 처용신화일 것이다.


  처용이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설화의 내용이 구체적이라는 사실이다. 헌강왕은 처용에게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주었고 그에게 급간의 벼슬까지 두었다. 급간이란 급벌찬을 말하는 것으로 신라의 17 관등 중 제9위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자, 여기서 잠깐 생각을 정리해 보자. 

처용은 일단 외모가 이국풍이었을 것이다. 키도 크고 그러나 호감 가는 스타일의 외국인. 혹자는 처용을 대식국 즉 사라센 제국의 이슬람 상인으로 보기도 한다.


  원성왕릉 입구에 있는 무인상의 모습을 많이 예로 든다. 이번에 숭복사지 가는 길에 원성왕릉을 지나갔다. 지난번에 갔었던 원성왕릉의 무인상을 다시 보자.


  처용의 모습은 이랬을까? 삼국유사에는 원성왕 대에 河西國(서역인)인이 당나라 사신을 따라 신라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보면 통일신라시대에는 서역이나 지금의 중동인, 로마인까지 왕래했다는 설이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처용은 재능이 좋아 신라 조정에 등용되어 벼슬까지 한 외국인일 가능성이 높다. 각설하고 내가 처용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망해사 때문이다. 이왕 울산까지 왔으니 헌강왕이 동해용왕 아니 대식국 상단을 위해 지었다는 망해사를 찾았다.


  망해사이니 당연히 바다가 보이는 산등성이에 있으려니 했는데 숲이 우거져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으나 현대에 지은 것이고 위로 올라가니 부도가 2기 있었다. 근데 보물이다.


  제49대 헌강대왕 때 통일신라는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외국 상단의 우두머리에게 절을 지어주고 그 아들을 조정의 관리로 등용할 만큼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었다. 처용은 무역을 관장하는 부처에서 일을 했을 것이다. 대외 무역항이었던 울산지역에 전해지는 개운포 처용 이야기는 한낱 가공의 설화가 아니라 통일신라의 번영기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도읍을 옮기지 않고 경주 지역에 머물렀던 이유. 그 미스터리는 바로 바다를 끼고 대외적으로 교역하여 부국을 지향했던 신라 지도자들의 위대한 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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