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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원도감자 Nov 01. 2024

예민한 여자와 까다로운 남자

내 안의 수많은 모습들 중, 늘 없애고 싶었던 모습이 있다. 바로 예민한 내 성격이다.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내가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느꼈다. 길거리에 저 앞에 가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면 보통은 냄새를 맡거나 숨을 참고 가겠지만 나는 경로를 틀어서 멀리 돌아간다.


이렇게 예민하다 보니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는 걸 막기 위해 항상 계획을 짜둔다. 그리고 그에 맞춰서만 움직인다. 친구와 약속이 잡혔을 때 만약 약속시간 10분 전까지 도착하도록 출발하면, 가는 내내 이 지하철이 혹시나 연착되진 않을까, 환승을 하다가 어그러져서 지각하지 않을까 온갖 걱정이 샘솟으며 초조해진다. 그래서 초행길이면 30분, 아니라면 20분 전에 도착하도록 출발하기 때문에 나는 늘 약속장소에서 친구들을 기다린다.

스스로가 답답할 때가 많았다. 너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니?


나에게 제일 큰 스트레스 요인은 사람이었다. 타인의 표정, 말, 눈짓, 제스처 등등... 모든 것들이 신경 쓰였다. 그래서 나를 둘러싼 사람이 많을수록 에너지가 빠르게 고갈됐다.

'그 사람이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한 거지?' 자리가 파하고도 머릿속에 끊임없이 생각이 맴도니 혼자가 제일 좋았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 깜짝 놀랐다. 사람이 너무너무 많았다. 내 고향에서는 신호등이 켜지면 그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이 기껏해야 대여섯 명 정도였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한 신호에 사람들이 40명씩 건너고 있었다. 이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마주 오는 사람과 부딪히지 않으려 몸을 피해가며 건너야 된다니..

서울사람들은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사는구나.


내가 남자친구를 만나고 그의 모습에서 제일 좋았던 건 그가 감정기복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늘 미소를 띤 같은 모습으로 한결같았다.

누가 몸을 팍 부딪히고 가든, 무례하게 굴든 그냥 허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한 번은 내가 시간을 착각해 그가 출국할 비행기를 놓칠뻔한 적이 있었다. 급하게 집을 나섰지만 까딱하면 비행기를 타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당장 다음날 오전 강의를 들어야하는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가는 내내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달랬다. "감자야 괜찮아~ 난 대만 안 가고 감자랑 있으면 더 좋아."


코로나 때는 자꾸 변수가 생기자 불안하고 감정적으로 예민했었다. 그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가끔은 찡찡대고 싶었다. 하루는 내가 찡찡대고 그가 나를 달래주는데 감정이 가라앉자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예민해서 너까지 스트레스받게 하는 거 같아." 그러자 그는 그게 무슨 관련이 있냐 되물었다.


"내가 예민하게 막 난리 치면 너도 같이 불안하겠지. 옆에 있는 사람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잖아."

"그런가? 아니야. 난 틴틴이가 혼자 막 흥분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돌고 난리 쳐도 그냥 파닥거리는구나 싶은데?"

어? 틴틴이는 그의 가족이 키우는 강아지 이름이었다.


 <어바웃 타임>이라는 영화 속 남자주인공은 시간을 여행하는 능력이 있다. 주인공이 아버지의 권유로 같은 일상을 두 번 살아보는 장면이 나왔다. 처음엔 지하철 옆자리에서 시끄러운 음악을 듣는 사람에 주인공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두 번째로 살아보는 인생에선 그는 새어나오는 그 음악에 맞춰서 같이 몸을 들썩인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며 첫 번째의 주인공이 나의 모습이고 두 번째의 주인공이 남자친구 같다고 생각했다.


그와 연애를 시작하고 주변에서 나에게 여유로워 보인다며 날카로운 느낌이 사라졌다는 말을 자주 했다. 웃음이 늘었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와 함께하며 비로소 내가 안정됐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나보고 넌 참 무던한 easy going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easy going 하다고?

그는 말했다. 응 나는 태어나서 감자만큼 무던한 사람을 처음 봐!

의문이 들었다. 콩깍지가 이렇게도 심하게 씌일 수 있나?




대만 그의 본가에 처음 갔을 때 그의 부모님께서 그가 잘해주냐 물으셨다.

내가 정말 잘해준다고 말씀드리자 부모님은 남자친구에게 너무 맞춰주지 말라며 깐깐한 사람을 맞춰주느라 네가 힘들겠다고 하셨다.

오잉 남자친구만큼 무던한 사람이 세상에 어딨다고요?


대만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그의 가족들은 자꾸 나에게 이 음식을 먹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왜 물어보시지 했는데 알고 보니 대만 음식은 향신료가 강해서 외국인들이 관광용 식당이 아니면 현지음식을 잘 못 먹는다고 했다. 그런데 난 모든 음식이 다 맛있었다. 취두부도 주셨는데 그것마저 맛있었다. 짭짤해서 사이다나 맥주랑 먹으면 좋을 거 같았다. 그의 누나가 취두부 거리에 데리고 가줄까? 하니, 남자친구는 본인은 그 근처에서 10초도 못 있겠다며 공기에 퍼진 취두부향도 못 맡겠다고 했다.


그의 부모님은 내가 그보다도 대만 음식을 잘 먹는다며 반찬을 콕콕 가리키시고는 얘는 이것도 안 먹고 저것도 안 먹는다고 장난스레 흉을 봤다. 그에게 이 음식이 왜 싫냐고 묻자 그는 이건 비리고, 저건 어떤 향신료가 들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갖가지 이유를 댔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쟤는 애기 때부터 본인이 직접 사지 않은 옷은 절대 안 입었어. 한 번은 색연필을 친구 집에 놓고 와서 쓰던 게 아닌 다른 걸 사 왔는데 얘 누나와 형은 눈치도 못 챘어. 그런데 얘만 난리를 치면서 예전 색연필이랑 같은 걸 사달라고 이 색연필은 안 쓰겠다는 거야! 그때 버릇을 고쳤어야 하는데 막내라서 봐주다 보니 성격이 그렇게 굳어졌어."

나는 그제야 그가 깐깐하다고 한 게 어떤 부분인지 알 것 같았다.


하루는 그의 어머님이 나를 데리고 치파오를 맞춰주겠다 하셨다. 나는 그런 경험이 처음이라 들떴다. 치수를 재고 원단을 고르는데 나는 연두색과 하늘색을 좋아해서 하늘색 원단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옆에 있던 남자친구가 치파오는 입으면 남색이나 빨간색 같은 짙은 색이 예쁘다며 나를 설득했다. 오 그런가...?

내가 '그럼 남색으로 할까?' 라고 하는 순간 그의 어머님이 호통을 치셨다. "감자가 입고 싶은 걸로 입게 해! 네 치파오가 아니야!"

그가 머쓱해하며 나에게 미안하다 했다.

언니가 말했다. "안 그래도 엄마가 화낼 거 같더라. 쟤는 저렇게 세게 말 안 하면 계속 고집부려."


집에 가는 길에도 어머니는 화가 여전히 안 풀리셨는지 운전을 하시며 화를 내셨다.

세상에 자기 여자친구 옷 사러 와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입으라고 하는 남자가 있냐?!

눈치를 보는 그의 모습이 풀 죽은 강아지 같아 보였다. 안쓰러운데 웃으면 안 될 거 같아서 웃음을 꾹 참았다.


나는 그동안 그가 까다롭다는 걸 왜 몰랐을까? 난 어릴 적부터 호불호가 없는, 취향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떤 걸 꼭 사고 싶다고 욕망한 적도 없고, 뭐가 특별히 맛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좋은 것도 없고 싫은 것도 없고... 그래서 나는 그가 여기도 가보고, 저것도 먹어보자며 눈을 반짝이면서 여기저기 데려가주는 게 좋았다. 화수분처럼 새로운 영화와 좋은 음악을 내게 꺼내보여 주는 게 좋기만 했다.  


그는 자기 취향이 확실했는데 모든 것에 그랬다. 음악, 영화, 노래, 패션, 심지어 향까지 그랬다. 한 번은 헬스장에 가서 이어폰을 집에 두고 온걸 안 그가 20분 거리를 걸어 집에 다시 왔다. 운동할 때는 자기가 만든 플레이리스트를 듣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때는 좀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한번 말한 적이 있었다. "솔직히 남이 해준 건 다 맛있잖아?! 내가 요리를 안 하면 다 맛있어."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 난 내가 요리한 게 제일 맛있던데. 외식을 하든 아빠가 해주시든 결국엔 내가 내 입맛에 맞춘 게 제일 맛있더라"

난 그때까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남이 해준 음식을 제일 좋아하는 줄 알았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간보기 조수였다. 그가 나에게 하던 음식을 먹이고 간이 어떠냐 물어보면, 난 항상 딱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소금을 더 칠까? 간장을 더 넣을까?’라고 물으면 난감했다. “음... 이대로도 맛있고 좀 짭짤해도 맛있을 거 같아.”

그는 내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걸 깨닫고 저리 가라고 했다.




작년에 대만에 놀러 갔을 때 우리는 주얼리샵을 찾아 커플링을 맞췄다. 여러 디자인 중 고민하다 그의 의견대로 디자인을 골랐다. 계약서를 쓰는데 우리를 응대해 준 분이 나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보통은 여자친구가 하고 싶은 대로 고르는데 넌 정말 관대하다!

쥬얼리샵을 나와서 저녁도 먹고 산책도 하는데 그가 갑자기 쥬얼리샵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다.


-가서 감자가 처음에 원했던 디자인으로 바꾸자.  

-오잉 왜? 나 네가 고른 거 좋은데?

-아냐 생각해 보니깐.. 딴것도 아니고 커플링을 남자 취향대로 하는 건 좀 아닌 거 같아.

-아까 그 말이 신경 쓰여서 그래? 그런데 난 정말 네가 고른 것도 좋다니깐? 난 다 좋아.

-다 좋은 사람이 어딨어. 감자가 맞춰주는 거지... 지금 가서 바꾸고 오자.


나는 그에게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하고 나서야 그를 말릴 수 있었다. 난 정말 다 좋은데... 그는 취향 없는 사람의 머릿속을 잘 모르는 듯했다. 그게 그거고 저게 저거로 보이는 세상. 사실 난 그가 그냥 알아서 골라서 갖다 줘도 좋은데..


그는 늘 나보고 배려심이 깊다며 고맙다고 한다. "감자는 맨날 내가 하자는 대로 양보해 주고 배려해 주잖아. 내 식대로 해도 다 맛있다고 해주고..."

그럴 때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냥 쫓아다니고 얻어먹기만 하는데 좋은 여자친구가 되다니... 완전 꿀이잖아!





묵은지볶음, 과일, 소고기마늘쫑볶음, 미역국


겉절이를 사랑하는 그는 한국에 있는 동안엔 늘 알배추를 떨어지게 않게 사뒀다. 소금에 절여 배추에 물기가 쫙 빠지면 즉석에서 무쳐주었다. 그는 축축한 김치가 싫다고 했다. 오잉 김치는 원래 축축한 음식인데?

그가 익은 김치를 먹고 싶을 때는 배추김치나 깍두기에서 김치국물을 다 닦고, 고춧가루를 넣어 다시 무쳐먹었다. 묵은지는 씻어서 한 장 한 장 일일이 키친타올에 물기를 닦고 들기름에 볶아 먹는다.


이렇게 하는거... 번거롭고 귀찮지 않아?

아니? 나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만족스러운게 더 중요해.


가끔은 이렇게나 정반대에 있는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된것이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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