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카페 알바를 한 적이 있었다. 서비스업을 시작하며 진상 손님 정도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손님들이 있었는데, 커플로 온 손님 중 내가 남자손님에 몇 초 눈을 마주쳤다는 이유로 나에게 눈을 흘기는 손님이었다.
생각보다 그런 손님이 많아서 놀랐다. 단지 직원으로서 응대했을 뿐인데 나를 째려보거나 보란듯이 남자친구 팔짱을 끼며 '이 남자를 쟁취한 사람은 바로 나!'라는 눈빛을 보내는 손님들... 귀에 대고 속삭여주고 싶었다. 죄송한데 저도 남자친구 있고요, 그전에 취향이란 게 있어요!
처음엔 내가 도대체 내가 뭘 했다고 싶어서 억울했지만 이런 불쾌감도 무뎌질 만큼 그런 손님을 많이 만났다.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언니들에게 얘기하니 언니는 나에게 말했다.
"난 그래서 남자손님이 카드 줘도 여자손님한테 되돌려준다? 안 그러면 자기 남자 친구한테 아이컨택하고 카드 건넨 게 기분 나쁘다고 카드 휙 채가는 손님도 있어."
"정말? 너무 심하다. 그런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심리야?"
"나야 모르지! 오징어 지킴이들 너무 많아."
응? 오징어 지킴이가 뭐야?
탐나는 남자도 아닌데 뺏길까 봐 열심히 경계하는 애들!
그때 그 단어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오징어 지킴이라니...! 그 후로도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잘 모르는 사람에게 억울한 견제를 받았다는 친구들의 입에서 몇 번 그 단어가 나왔다. 나는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그 남자는 무슨 죄야. 여자친구의 유치한 질투심 때문에 가만히 있다가 멀쩡한 사람에서 오징어로 격하되다니...
나는 아무리 콩깍지가 씌어도 그런 우스운 짓을 하는 여자는 되지 않아야지 싶었다.
그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가 교환파견 온 학교에서 한국인 교류학생을 일대일로 연결해 주거나 외국인 학생 모임을 연결해 주겠다는 연락을 했었는데 그는 그런 프로그램을 다 거절했다. 아무래도 그는 다른 외국인 학생보다는 코로나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방역에 철저한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그 시기에 사람을 만나는 게 좋지 않다 생각하고 꺼리는듯 했다.(대만은 마스크 착용 의무 해제를 우리나라보다도 늦게 한 나라이다.)
그런데 그가 온 지 한 두달쯤 지났을 때, 한 교수님께서 한국에서 대학원 생활 중인 외국인 학생 모임이 있다며 연결해 줄 테니 대만으로도 돌아가기 전 한번 나가보라고 권유하셨다. 남자친구를 잘 챙겨주시던 교수님이었는데 그가 그런 시기에 한국에 온걸 안쓰럽게 생각하셨었다. 나도 그때쯤에 내심 그가 한국에서 외롭거나 심심할까 봐 걱정됐었던 참이었기에 나가보라고 적극 추천했다. 그가 처음 모임에 다녀온 날, 나에게 그 시간이 굉장히 즐거웠다고 말했다. 상기된 얼굴이 정말 그렇게 보였다. 어떤 친구들을 만났는지 알려주었다.
놀고 있는데 갑자기 남자친구 핸드폰에 문자가 한 명 왔다. 띵!
그런데 남자친구가 확인하려 핸드폰을 줍기도 전에 띵 띵 띵 띵 띵 띵 연속으로 여러 번이 더 울렸다. 뭐지?
남자친구가 옆에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 L이네!
그 문자의 발신인은 프랑스에서 왔다던 L이라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 연달아 울린 문자는 텍스트가 아니라 사진이었다. 낯선 남자의 사진이 주르륵 있었다. 누굴까 하며 같이 사진을 보던 도중 문자가 하나 왔다.
'널 어디서 봤다 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일본 배우를 닮았어.' 그리고 웃는 이모티콘.
그 순간 훅하고 쎄한 느낌이 몰려왔다. 순수하게 친구가 되고자 연락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의 촉이 그 여자가 내 남자친구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내 옆에서 답장을 하다가 나에게 물었다.
"감자야.. 혹시 문자 하는 거 기분 나빠?"
"응? 아니! 전혀! 그냥 친구인데 뭘~"
사실은 엄청나게 기분이 나쁘다 못해 남자친구를 잡고 캐묻고 싶었다.
그 친구는 남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 너는 모임에서 여자친구가 있다고 말했어?
하지만 자존심에 그러지 못했다. 쿨한 척했지만 내 머리엔 그 친구의 이름이 박혀버렸다.
남자친구가 그 모임에 두 번째인가 세 번째로 갔다 온 다음날이었다. 아침 일찍 우리 집에 온 그가 우물쭈물하는 것이 나에게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왜? 할 말 있어?"
"혹시 그때 내가 말한 L기억나?"
"기억나. 왜?"
"사실 어제.... L이 이번주에 한번 같이 밥 먹자고 했어."
그 순간 놀라거나 화가 나기보다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 그래? 그럼 먹어야지. 먹는다고 했어?"
“그게... 거절하기가 좀 그랬어. 그래서... 감자랑 셋이 먹자고 했어."
네? 저는 왜요?
그가 황당해하는 나를 보고 변명하듯 말했다. "감자가 기분 나빠할 거 같은데 다른 사람들도 다 있어서 무안할까 봐 거절하기가 힘들었어. 그전에 나보고 바쁘냐 했는데 내가 수업도 많지 않고 하는 일 없다고 말했었거든. 그래서 여자친구랑 셋이 보자고 했어. 같이 나가주면 안 돼?"
"걔는 괜찮대?"
"응! 여자친구랑 셋이 놀면 더 좋대."
응? 더 좋다고 했다고?
도대체 이 친구는 무슨 생각인걸까.
그렇게 찝찝한 마음으로 L을 보게 되었다. L의 첫인상은 예상과 아주 달랐다. 도도하고 시크한 프랑스여자를 상상했는데 귀여운 얼굴을 하고는 무채색 세상에서 혼자만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었다. L은 나를 마주치자마자 활짝 웃으면서 이야기를 들었다며 남자친구가 널 보러 한국에 오다니 로맨틱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경계심이 조금 풀어졌다.
그녀와 밥을 먹고 자리를 옮겨 얘기를 나눌수록 점점 내가 잘못짚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어떠한 이성적인 관심도 없는 듯 보였다. 오히려 나를 잡고 신나게 수다를 떨었고 남자친구는 우리 둘이 떠드는걸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사람이 그리워 보였다.
아 내가 이상한 오해를 했구나. 그 말을 친구에게 하니 친구가 말했다.
"난 처음부터 아닐 거라 생각했어. 서양인들은 친구에 성별이 없대잖아. 그리고 걔는 네 남자친구가 대만으로 돌아갈 날이 두 달도 안 남은 걸 알고 있는데, 상식적으로 그 짧은 시간에 꼬셔서 뭘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게 말이 돼?"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질투심으로 애먼 사람을 의심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았다.
그 만남에서 나는 L과 번호를 교환했었는데 L에게 문자가 왔다.
처음 (남자친구)를 만나고 드디어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 싶었는데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 네가 신경 쓰일까 봐 걱정했었어. 하지만 넌 정말 친절했어. 나를 진심으로 환대해 줘서 고마워! 우리도 좋은 친구가 됐으면 좋겠어.
그 문자를 읽는데 마음이 쿡 하고 찔렸다. 그리고 한 단어가 떠올랐다. 나 혹시... 내가 그렇게나 한심하게 생각했던 그 오징이 지킴이었나...
남자친구를 보는 그녀의 눈빛을 직접 보고 난 뒤로는 그녀가 남자친구에게 연락을 하는게 거슬리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셋이 자주 보게 되었는데 가끔은 L이 이틀 연속으로 같이 놀자고 연락하기도 했다. L은 함께 있으면 즐거운 매력적인 친구였다. 평소에 내가 과외수업을 하는 동안 남자친구는 종종 내 과외 학생 집 근처로 마중 나와 나를 기다리기도 했었는데, 한 번은 과외가 끝나고 내려가보니 L이 있었다. 남자친구에게 연락했는데 나를 기다린다 해서 먼저 만나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하루는 L이 말했다.
"너네들 데이트하는데 껴서 미안해. 그렇지만 난 한국생활하면서 멘탈이 터지는 일이 많은데 기댈 남자친구도 없고... 친구가 필요했는데 마음 맞는 친구를 찾기가 힘들었어."
우리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함께 노는 게 즐겁다 말했다. 그렇지만 그 말을 듣고 나서 계속 그녀가 한국어로 '멘탈이 터지는 일'이라 말한 게 떠올랐다. 타국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그러던 그때 내 머릿속에 한 가지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좋은 친구를 찾아 소개해주는 거야!
남자친구도 좋은 생각같다고 하길래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한 번도 블라인드 데이트를 한 적이 없어서 늘 해보고 싶었다며 좋아했다.
그렇게 나는 그녀의 짝으로 괜찮을 법한 친구가 어디 있나 주변에 물었다. 남자친구는 기왕이면 같은 문화권의 서양인이면 더 낫지 않겠냐 했는데 마침 친한 동기가 자기가 아는 독일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 친구도 한국에서 몇 년간 공부할 계획이니 같은 상황의 둘이 의지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 첫 주선을 하게 되었고 그들은 연락처를 건네어 준 바로 다음날 만났다. 그런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줄 알았던 L이 소개팅을 끝나자마자 좋지 않은 목소리로 지금 만날 수 있냐고 물었다.
"어땠는데 그래?"
"사실 너한테 말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무례한 행동을 했나 싶었는데 L이 해준 얘기는 그 이상으로 충격이었다.
그 남자는 나치즘에 심취한 네오나치라는 것이다.
그는 그 독일 친구와 나눴던 대화를 얘기해 주며 자기는 그 자리를 뛰쳐나오고 싶었다고 말했다. 요즘 유럽에는 극우화 된 1020이 아주 많아서 놀랄 일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과거에 독일에서 군대에 입대했었다는데 자기는 그 말을 듣고 싸한 걸 바로 눈치챘다며 독일에서 군에 입대한다고 하는 사람 중엔 나치 선봉자들이 많다고 했다.
나에게는 낯설기만한 세계였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고 소개해줘서 미안하다고 했고 그녀는 아니라며 같이 소개해준 동기한테는 굳이 전하지 말라고 했다.
그녀가 마음이 상했을까 봐 걱정했지만 그 후로도 L은 어김없이 연락을 해왔고 같이 어울려 놀았다. 그리고 얼마 뒤 남자친구가 대만으로 돌아갔고 그가 떠난 뒤에도 나는 L과 둘이 만나 놀았다. 그러다 어느순간 연락이 뜸해지더니 끊겼다. 남자친구도 연락이 끊겼다며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그리고 몇 년 뒤 같이 주선한 그 동기와 있는데 대뜸 그 독일친구 얘기를 꺼냈다. 나는 동기가 아직까지 그 친구와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줄 몰랐다. 사실은 그때 이런 일이 있었는데 너도 알고 있냐며 말을 꺼냈다.
그러자 친구는 팔짝 뛰었다.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대화를 해보면 알잖아. 전혀 아니야. 나도 충분히 알고 대화를 해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깐 연결해 준 거지!
동기가 그 자리에서 연락을 해보았다. 그리고는 무서운 얘기를 했다.
"자기 군대 간 적 없다는데? 학교 졸업하고 바로 한국에 온거래. 입대할 생각은 해본 적도 없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힘든 식사시간이었다며 자세히 털어놓던 L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말을 듣고 당황해서 사과하던 나의 모습, 과외를 마치고 나와보니 L이 남자친구의 옆에서 "서프라이즈!"라고 말하던 모습도.
생각할수록 황당했다. 그냥 싫다하면 되지 어떻게 나치라는 뻥을 치냐... 창의력도 대단하다. 그녀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다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그만두었다. 다만 생각보다 내 촉이 꽤 잘 작동하는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바닷가 사람이라 어릴 적 먹고 자란 섭이나 석화같은 해산물을 좋아한다. 나는 입맛이 까다로운 그가 혹시 굴을 비리다고 생각할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도 집에서 굴을 자주 먹었다며 좋아했다. 대만에는 생으로 무쳐먹는 굴요리도 여러 가지였고, 튀기거나, 찌거나, 졸이거나, 전으로 부쳐먹는 등 우리나라만큼 다양하게 굴을 먹고 있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굴 요리는 오징어와, 양파를 넣어 간장 양념에 볶아먹는 가정식 반찬이다. 요리를 완성한 다음 불을 끄고 바질을 넣어 뒤섞는다. 양파+바질과 해산물 하나만 들어가면 돼서 굴이나 오징어 대신 새우로 해도 맛있다고 했다. 대만요리에는 바질이 많이 쓰이는데 한국에서 주로 쓰는 스위트바질이 아닌 타이바질을 쓴다. 타이바질은 스위트바질보다 향이 강하다. 그가 몇번 대만스타일의 닭튀김이나 오징어 튀김을 해줬는데 그는 항상 기름에 먼저 바질을 넣어 향을 충분히 내고 건진다음 그 기름에 닭을 튀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