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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원도감자 Oct 25. 2024

그가 푹 빠진 한국 연예인

우리가 만난 지 며칠 안 됐을 때 그는 나에게 한국 연예인들이 대만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에 대해 얘기해줬다. 대만 길거리에선 항상 한국 아이돌 노래를 들을 수 있고 남녀노소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즐긴다고 했다.

그말을 듣고 그에게 너는 어떤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본적이 있냐 물으니 그가 급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한국 컨텐츠나 연예인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기억을 더듬더니 말했다. 아! 대만에선 RM이 인기가 아주 많아. 나도 RM을 본 적이 있어.

RM이 누구지? 사람인가 하고 물으니 그가 풀어서 설명해 줬다. Running Man!


그는 대만에서 런닝맨의 인기가 얼마나 많은지 알려줬다.

"아마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는 대장금이 제일 유명했다면 우리 세대에서는 런닝맨이 제일 인기가 많을거야."

알고 보니 대만에서는 주기적으로 런닝맨 팬미팅이 열리고, 멤버들 개인이 유명 대만 가수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와 만나며 우리는 서로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언어에 소질이 있는 나보다 그는 한국어 실력이 빠르게 늘었는데, 코로나 시국에는 화상한국어 수업을 시작해 이때부터는 문법이나 회화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언어가 트이기 시작하자 한국 컨텐츠를 섭렵했는데 자기가 막 습득한 한국어를 드라마나 예능에서 듣게 되는 게 재밌다고 했다. 그는 점점 미묘한 어감이나 개개인의 고유의 말투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한국어 수업을 마친 그가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했니?'라는 표현이 '~했어?' 나 '~했냐?'보다 부드럽게 들린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응 맞아. 뉘앙스의 차이인데 '했니'라고 하는 편이 훨씬 다정하게 들려."


그러자 그가 대뜸 퀴즈를 냈다.

"감자야 한국사람들 중에 저런 부드러운 말투를 쓰는 사람이 누군 줄 알아?"

난가? 허허... 내심 기대했는데 그의 입에서 대뜸 외간남자의 이름이 나왔다.  


지석진이야!

... 응?

지석진!

지석진...? 내가 아는 지석진?

응. 요즘 느끼는 건데 지석진이 되게 부드러운 한국어를 구사해. 다른 한국 연예인들이 말할때랑 달라서 몇몇 표현들을 듣고 적어놓을 때가 많아. 그리고 어미를 길게 늘여 말하기때문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친근감을 느끼게 해.


그런가?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걸 외국인인 그는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 당시 런닝맨에 재미를 들렸는지 오래 전 회차부터 런닝맨을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점 그의 입에서 지석진의 이름이 나오는 빈도가 늘었다.


"지석진은 '~더라'라는 어미를 자주 쓰는데 가르치듯이 말하는 것보다 이렇게 소식을 전하듯 말하는 방식이 은연중에 상대를 배려하는 것 같아."

"지석진은 누가 그게 아니라고 말하면 한참 동생들한테도 아유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해."

"감자야, 지석진 목소리 너무 좋지 않아?"


그는 무례하지 않으면서 웃음을 주는 지석진이 한국 최고의 코미디언이라고 했다. 점점 좋아하는걸 넘어 팬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루는 그가 대만에서 지석진을 열심히 검색해 보다 런닝맨 멤버 중 지석진이 대만에서 인기 1,2위를 다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꽤 흥미롭게 생각했다. 그가 괜히 지석진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몸에 흐르는 대만인의 피가 지석진을 원하는 것이었다!

 내가 지석진이 왜 유독 대만에서 인기가 많은거같냐 묻자 그가 말했다. "글쎄... 대만 사람들은 권위적이지 않은 너그러운 어른을 좋아하는 것 같아. 그리고 머리스타일이나 외모가 낯설지 않아. 대만 길거리를 잠깐 구경하면 그와 닮은 아저씨를 여러 명 볼 수 있을걸? 어느 집에나 그와 비슷한 삼촌이 한명씩 있어."


그가 교환학생을 왔을 때 우리는 매주 일요일이면 런닝맨을 시청하였다. 그가 그날의 런닝맨을 재밌어하는 기준은 뚜렷했다. 지석진이 많이 나오냐 적게 나오냐.


지석진에 대한 그의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증폭되어 우리가 떨어져있는 동안에도 그는 열심히 팬심을 키워나갔다.

지금도 그에게 카톡으로 유튜브 링크가 오면 10번 중의 7번은 지석진이 나온 방송이다. 핑계고에 나온 지석진, 놀면 뭐 하니에 나온 지석진, 지석진 유튜브에 나온 지석진...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현재 활발히 활동해서 새로 볼 컨텐츠가 많다는 사실이 기쁜듯 했다.


처음에는 예쁜아이돌도 배우도 아닌, 아빠보다 나이가 더 많은 개그맨 아저씨를 좋아하는 그가 웃겼다. 그런데 언젠가부턴 남자친구에게 다정한 한국어를 알려주고, 자상한 한국어른의 모습을 보여준 지석진씨께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와 함께하며 나는 지석진이 뮤지컬 배우와 가수로 활동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정규 1집 타이틀곡 '우울한 오후엔 미소를'이라는 노래를 꽤나 좋아하게 되었다. 그와 떨어져 있던 시간에 쓸쓸한 마음이 드는 날이면 길을 걸으며 이 노래를 자주 들었다.



작년 겨울, 그가 늘 바라던 제주도 여행을 함께했다. 우리가 곧 다시 만나게 되는 걸 기념하는 여행이었다. 밤이 되고 숙소 마당에서 모닥불이 타는 걸 보며 별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스피커를 가져오더니 노래를 하나 틀었다. 감미로운 R&B노래가 나왔는데 처음 듣는 노래였다. 그는 All4one의 I swear이라는 노래라며 가사를 잘 들어보라고 했다.

.

.

.

And I swear by the moon and the stars in the skies 저 하늘의 달과 별에 맹세해요

I'll be there 당신의 옆에 있겠다고요

I swear like the shadow that's by your side I'll be there 맹세할게요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 옆에 있겠다고요

For better or worse till death do us part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I'll love you with every beat of my heart 내 모든 마음으로 사랑할게요

I swear 맹세할게요


가사를 듣다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와 함께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을 보며 담요를 덮고 있는 그 순간이 꿈만 같았다. 우리가 이렇게 빨리 다시 한 땅에서 지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떨어져 있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어깨에 기댄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감자야...

응?

이 곡... 너무 좋지?

응 너무 좋다...

이곡... 지석진이 90년대에 리포터 오디션 보면서 부른 노래야...

응?

 

여기서 지석진이 왜 나와...?

나는 황당함을 누르며 그에게 물어봤다. "지석진이 90년대에 대만에서 오디션을 봤어?"

"아니~ 한국오디션 봤을 때지. 지석진은 94년에 오디션장에서 코미디도 보여주고 노래 부르는 모습도 보여줬어. 그때 부른 노래가 이 노래야!"


넌 도대체 지석진이 94년에 한국 오디션장에서 부른 노래를 어떻게 아는 거니..

분위기 다 깨졌다. 못 말리는 지석진 사랑이구나 싶었다.



계란말이, 주먹밥, 콩나물불고기, 샤인머스켓
제육볶음, 주먹밥, 잡채, 무생채


그가 한때 푹 빠졌던 한국음식 제육볶음. 그는 처음에 고추장을 생으로 먹어보고는 이상한 질감이라며 별로 안좋아했다. 비빔밥을 먹을때도 고추장을 공들여 제거하고는 나물과 비벼서 소스 없이 맨밥으로만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제육볶음을 먹어보고는 너무 맛있다며 모든 양념 요리에 고추장을 넣어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대만의 모든 간장 베이스 요리에 고추장 한스푼을 넣으면 원래 있는 요리처럼 너무나 잘 어울렸다. 함께 여러 요리를 해보며 고추장이란 식재료가 신기하다 느꼈던 건 간장 4,5스푼에 고추장은 한스푼만 넣어도 그 요리는 고추장 요리가 된다는 것이었다. 고추장의 존재감은 강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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