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어느 날 슬슬 느껴지는 추위에 가벼운 옷들을 정리하며 겨울옷을 꺼냈다. 옷을 입어보다가 당황했다. 지퍼가 잠기지 않는다...!
그동안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애써 외면해왔는데 연달아 바지 여러 개를 입어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살이 엄청나게 쪘다.
그에게 살이 쪘다고 하소연했더니 그가 말했다. "나는 7킬로나 쪘어!"
뭐?
헬스장에 다니는 그는 체중계위에 올라 매일 자기의 몸무게가 점점 느는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고 한다.
매일 붙어있느라 잘 몰랐는데 어쩐지 그를 살펴 보니 좀 포동해보이기는 했다.
그가 들어온 지 두 달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다. 이유가 뭘까 하니 그는 제일 먼저 날씨를 말했다. 한국의 여름이 대만에 비해 시원해서 땀이 안 난다는 것이었다.
처음 그의 나라에 방문하였을 때 나는 더위를 느끼고 깜짝 놀랐다. 분명히 기온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체감으로는 비교가 안되게 더웠다.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면 누가 뜨겁고 습한 공기를 뭉쳐서 입에 퍽 넣어주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덥다고 표현할 수 없었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길거리에 남녀노소 민소매를 입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날씨가 너무 덥고 습해 다들 옷을 가볍게 입는다 말했다. 그도 민소매옷을 오백만개 가지고 있었다.
대만 사람들은 집에서는 24시간 에어컨을 가동했다. 하지만 밖에서는 에어컨을 가지고 다닐 순 없으니 그냥 땀을 주룩주룩 흘리며 걸었다. 길에서 차나 물을 들고 다니며 수분을 보충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차가운 물을 싫어하는 대만사람들도 여름에는 차를 냉침해서 차갑게 먹었다.)
그는 한국의 8월의 폭염을 경험해 보고 대만의 5월 날씨 같다며 견딜만하다고 했다. 게다가 코시국에 한국에 온 그는 밖에서 잘 돌아다닐 일이 없었다. 그는 대만에서는 여름에 한번 나갔다 오면 땀이 쫙 빠지면서 지쳐 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느낌이 드는데 한국에 와서는 땀을 안 흘리니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환경이 바뀐 그야 그렇다 쳐도 나는 왜 살이 찐 걸까?
나는 우리를 살찌게 한 주범은 야식과 맥주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 당시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야식을 먹으며 맥주를 즐겼다.
그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 나는 그가 술을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가 술 마시는걸 잘 못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술을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대만 사회가 술을 경계하기 때문에 마시지 않은 것뿐이라고 했다. 내가 그런 분위기를 전혀 몰랐던 건 그의 친구들은 나와 처음 만날 때면 항상 나를 야시장에 데리고 가 시장을 구경시켜주며 맥주를 사줬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그의 친구들은 손님맞이로 술을 먹으며 분위기를 내준 것이었다.
한창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을 때 대만 라디오 뉴스를 자주 들었다. 하루는 진행자가 한 조사결과를 알려주는데 대만 국민의 1/4이 한 달에 한번 이상 술을 마신다며 그 수치를 굉장히 심각하게 얘기했다. 들으면서 의아했다. 남자친구에게 들려주며 내가 들은 숫자가 1/4이 맞는지 물어보았더니 맞다고 했다. 그럼 100명 중 75명은 한 달에 한번도 술을 안 마신다는 건데 저게 높은 수치인가? 했는데 남자친구는 당연하다고 말했다.
"내 주변엔 명절에 가족들이랑만 술 마시는 애들이 거의 대부분이야."
그러고 보니 남자친구는 친구들이랑 놀 때 항상 버블티나 디저트를 먹으러 다녔다. 친구와 만나는 장소도 항상 카페나 학교 내 잔디밭이었다. 술을 마시고 싶어도 같이 먹어줄 친구가 없었던 것이었다.
대만에서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술냄새가 나는 사람을 방탕하고 무책임한 사람으로 보는 듯했다. 대학생들이 술을 먹고 흥이 오른 것도 젊을 때 한때다 봐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부모님도 그가 술에 취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셨다.
이런 이유로 대만에선 술을 잘 먹지 않던 그였지만 한국에는 같이 술을 마실 사람도 있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처음엔 편의점 맥주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생맥주나 수제맥주를 포장해오기도 했다. 맥주를 마시며 그와 떠들고 영화를 보는 건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옷에 몸이 안 들어갈 정도로 포동포동해지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와 함께 다시 몸을 예전으로 돌릴 계획을 세웠다.
1. 술을 끊자
2. 하루에 한 끼는 간이 안된 닭가슴살을 먹자
3. 매일 유산소 운동을 하자
우리는 매일 아침 근처 공원에서 조깅을 하기 시작했다. 몸도 무거워진 데다가 마스크를 끼고 달리니 숨이 찼지만 일주일쯤 지나니 아주 상쾌해졌다. 달리기만 했는데 어깨 결림이 사라졌다.
하지만 술을 끊자는 계획은 금요일 하루만 마시기로 수정되었다. 또 잔뜩 사놓은 냉동 닭가슴살은 심각하게 맛이 없었다.
그가 어느 날 비장하게 말했다. "감자야 우리 행복하게 살아야 하니깐 이런 맛없는거는 먹지 말자." 한심하게 보일까 봐 말을 못 꺼내고 있었는데 그가 먼저 말해서 다행이었다.
그는 식이를 따로 안 하는 대신 우롱차 같은 차를 매일 마시자고 했다. 한겨울에도 아이스커피만 마시는 나는 따듯한 액체를 먹는 게 어색했다. 하지만 그가 자꾸 우롱차가 다이어트에 좋다고 꼬시길래 먹다 보니 왜 사람들이 차를 마시는지 알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차를 마시니 식사 직후에도 더부룩한 게 없이 속이 편안했다.
이렇게 조금씩 생활 습관을 바꾸자 살이 점점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두 달 동안 찐 살을 세 달 동안 다 뺐다.
우리가 살이 한창 올랐을 때 그는 그 와중에 좋은 점을 하나 찾았다.
"가슴 운동을 2년 동안 해도 큰 변화가 없었는데 살이 찌니깐 가슴근육이 커져!"
헬스장을 다녀온 그에게 무슨 운동을 했냐 물으면 답은 늘 같았다. 딥(딥스)하고 왔어.
딥스는 엉덩이 운동인줄 알았는데 가슴운동이었다. 아직도 왜 그런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정말 커지긴 했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운동을 하고 오면 매번 나에게 가슴이 좀 더 커지지 않았냐고 물었다. 솔직히 하루 만에 달라져봤자 얼마나 달라지겠냐마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묻기에 매번 커진 것 같다고 말해줬다. 가끔 내 가슴보다 크다고 하면 그가 매우 좋아했다.
대량으로 산 닭가슴살은 모두 싼베이지(대만식 찜닭요리)나 카레에 들어갔다.
물기 있는 김치를 안 좋아하는 그는 같이 애써 담근 깍두기를 씻어서 키친타올로 물기를 닦고 다시 양념해 먹었다.
일본카레는 내가 어렸을 때 동생들한테 자주 해주던 요리였다. 남자친구에게 한번 해주니 맛있다며 레시피를 알려달라 했다. 일본카레는 양파를 채 썰어 버터에 볶아 짙은 갈색이 날 때까지 카라멜라이징 해야 한다. 감자, 당근, 고기, 물을 넣고 끓이다가 토마토 페이스트와 고체 카레 블록을 넣는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엔 생크림을 붓는다고 알려주었는데 그가 코코넛밀크를 사 왔다.
"대만은 카레에 코코넛밀크를 넣어?"
"대만 카레는 아닌데.. 대만 사람들이 태국 카레를 잘 먹는데 태국 카레에 코코넛밀크가 들어가."
상상이 안 가서 조금 쫄았는데 완성된 음식을 먹어보니 맛있었다. 그다음엔 코코넛 밀크와 생크림을 둘 다 넣어봤는데 더 맛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대만에 가면 대만식 카레를 먹어보자. 대만 카레는 태국 카레나 일본 카레와도 다른 독특한 맛이야." 이 말을 듣고 나는 대만은 카레에도 향신료를 많이 넣으려나 싶었다. 그런데 후에 대만 카레를 먹어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뭐야! 이거 그냥 오뚜기잖아!
그가 독특하다고 했던 대만 카레는 오뚜기 카레와 맛이 99.999퍼센트 일치했다. 사장님이 오뚜기 카레로 만드셨나 의심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