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사귀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그는 나에게 말했다. 감자랑 결혼하고 싶어. 나랑 결혼할 거지? 나랑 결혼해야 돼!
예전에 친구들이 남자들은 좋아하면 애정표현을 결혼하자고 한다고 말했었는데 정말이었다. 조르는 그가 귀여웠다. 나도 같이 장단을 맞췄다.
남자친구와 나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 둘다 2남 1녀 구성의 삼남매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날 형제가 많아 좋은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나중에 딸 낳고 싶어 아들 낳고 싶어?
그 질문은 그가 나에게 늘 하는 '나랑 결혼해야 해!'와 같은 가벼운 말이었다. 나와 같이 유치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할 줄 알았는데 그는 대뜸 정색을 했다.
"사실... 나는 아이 낳을 생각이 전혀 없어." 그가 너무 단호해서 당황했다. 그에게 아이를 낳고 키우면 즐거울 거 같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부부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기쁨을 누리고 싶은 건 별로 안 중요해.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게 안 태어나는 것보다 낫다는 확신이 필요하지. 그런데 나는 태어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
왜인지 나는 그가 당연히 아이를 원할 거라 생각했다. 그는 상냥하고 마음이 따듯한 남자였다. 아이를 원하는 것과 성품과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데도, 나는 왠지 그 같은 사람은 당연히 아이를 갖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덧붙였다.
내가 아이에게 집을 하나씩 해줄 정도가 될지 모르겠어. 집을 못해준다면 내 자식은 평생을 집을 사려고 허덕이다 죽을 거야. 그럼 나는 평생 고생하는 자식을 보며 너무 미안할 것 같아.
타이페이의 집값은 서울 집값보다 높지만 월급은 훨씬 적다. 대만의 내집마련 현실은 한국보다 더 가혹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그런 현실적인 생각에서 떨어져 있는 사람인줄 알았다.
한 번은 남자친구의 학교에 놀러 갔다가 그의 남자 친구들을 만나 함께 술을 마셨다. 한국은 어떤지 대만은 어떤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아이 얘기가 나왔는데 그의 친구들 셋 중에 아이를 낳고 싶다는 친구는 한 명뿐이었다.
A가 말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노후 대비가 안되셨어. 내 교육에 다 투자하셨거든. 나를 위해 희생하셨는데 내가 모른 척할 수는 없어. 그래서 나는 나랑 상황이 비슷한 사람이랑 결혼해서 딩크로 살고 싶어. 같이 부모님 부양하고 여유돈으로 아내랑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내 노후대비도 하고.. 그게 내가 원하는 삶이야.
다른 친구 B 가 말했다. 나는 아기 낳고 이런 생각 안 해. 대만에서 부자가 되려면 사업을 하는데 나는 사업을 할 성격이 안돼. 아무리 애써봤자 고소득 직장인이 되겠지. 그럼 난 자식한테 타이페이에 집 못 사줘. 평생 공부만 해서 이 학교에 왔는데 입학했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없어. 나는 지금 6명씩 쉐어하면서 살아. 내 친구는 10명이서 쉐어하면서 살아. 미래에는? 내가 집을 사주지 못하면 내 자식이 얼마나 더 많은 인원과 방을 쉐어하면서 살아야 할까? 사실 사는 것이 고통이잖아.
그가 한 말이 맴돌았다. Actually, life is pain. Is life worth the pain and suffering?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그전까지는 한국에서 내 또래의 친구들한테 이렇게 암울한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b는 계속 말했다.
미국은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은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못 먹잖아. 고기도 가공육만 얻을 수 있지. 곧 모든 자본주의 사회가 그렇게 될 거야. 부자 부모가 되어서 좋은 삶을 제공해 줄 수 있다면 낳겠지만... 잘 모르겠어.
그들은 내게 대만이 얼마나 불안한 상황인지도 말해줬다.
그날의 대화가 유난히 충격적이었던 건, 평소에 나는 대만사람들이 한국보다 여유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만 사람들과 대화할때면 긍정적인 에너지와 순수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늘 친절했고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만은 아직 낭만이 살아있는 사회라고 생각했다. 그의 친구들도 이 얘기를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 그들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있을 줄 몰랐다.
남자친구의 친구들은 모두 영어를 매우 유창하게 했다. 알고 보니 대만에선 영어를 해야만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부모가 무리해서 자녀 영어 교육에 힘을 썼다. 남자친구도 어릴 적 누나와 1년간 영국에서 유학했다.
나는 집에 오는 길에 그에게 물었다. 너도 사는 게 고통이었어? 그래서 아이를 낳기가 싫은 거야?
그러자 그는 말했다.
솔직히 인생을 매 순간 압박 속에서 산거 같아. 고등학교 입시, 대학 입시, 그런데 그게 또 끝이 아니잖아. 이젠 또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겠지. 우리가 좋은 교육을 받기 위해 부모님은 늘 초과근무를 하셨어. 그런데 내가 그저 그런 직장에 들어가면 안 되잖아... 이렇게 늘 허덕였는데 이 과정을 어떻게 자식한테 겪게 해?
나는 그가 버겁게 살아간다 생각하니 속상했다. 갑자기 그가 너무 안쓰러워서 그를 꼭 안았다.
내가 안아주자 그가 말했다.
“그래도 나는 감자를 만나서 행복해”
“나도 너랑 놀 때가 제일 행복해. 난 네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 마음이 아파..”
"감자는 좋은 환경에서 공주처럼 자랐잖아. 아까 말이 충격적이었지? 내 친구들이 너무 우울한 얘기를 했어.”
그가 그 말을 하자 마음이 쿡 찔렸다.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하루가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날이었다. 그때 마침 영화 부산행이 개봉했다. 친구들과 영화관에 가서 부산행을 보고 햄버거도 먹고 밤 10시쯤 들어왔다.
집에 들어왔는데 분위기가 싸했다. 며칠 전에 1학기 성적표가 나왔었다. 성적표가 나오기 전에 미리 엄마에게 수학은 기말고사를 잘 못 봐서 중간고사 점수와 합산해도 1등급이 안 나올 수도 있다 말씀드렸었다.
하지만 성적표엔 1등급이 찍혀있었다. 결국 1등급을 받은 성적표를 가져다 드렸으니 엄마가 신경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기말고사도 삐끗한 주제에 영화까지 보고 놀고 온 게 화가 났나 보다. 짐을 싸서 나가라고 했다. 서러운 건 난데 엄마가 울었다.
“너 수학 시험 그렇게 봐놓고 놀 생각이 들어? 그렇게 대충 살고 동생들한테 그런 모습 보일 거면 그냥 엄마도 너 키우는 거 안 하고 싶어. 왜 너를 낳아서 엄마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돼?”
짐을 싸서 집을 나오는데 아빠가 이 상황을 다 보고도 모른 척 고개를 숙이고 서있었다. 집 안에 가족이 넷이나 있었는데 아무도 나를 따라 나오지 않았다.
길을 걸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수모도 없었고 엄마와의 인연도 없었을텐데. 사실은 꽤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이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지금도 엄마와 내 사이가 원만해진 게 엄마가 이제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결국 엄마가 원하던 목표를 이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나는 모든 부모가 자식의 행복을 신경 쓰는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나는 그래서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를 꼭 낳고 싶다 생각했던적도 없지만 아이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낳게 되는 것만 같았다. 내가 너무 꽃밭에 사는걸까.
나는 내가 어릴적 우울했던 건 엄마 때문이라고 원망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자식한테 안그러면 된다고 생각했다. 행복하게 키우면 행복한 아이로 자랄 수 있겠지.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온화하고 사랑이 넘치셨다. 그는 그런 사랑을 받았음에도 삶이 버거워서 또 다른 생명체를 세상에 데리고 오고 싶지 않은걸까?
우리는 그 후로 아기에 관한 얘기를 몇 번 더 했는데 그는 마음이 확실한 듯 보였다. 특히나 대만에서는 낳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했다. 그의 마음을 다 들었으니 그 후엔 그 주제로는 더 얘기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떤지는 모른다.
나는 그를 만나 순식간에 빠져들었고 사랑에 절여진것만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섬뜩해졌다. 내가 눈뜨면 그를 생각하고, 샤워할 때도 그를 생각하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10대 때 이미 가족이든 누구든 이 세상에 나를 온전히 사랑하고 생각해 주는 사람은 없다고 결론 냈었다. 삶은 나 혼자 가는 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 다른 기대가 들었다. 연인은 헤어질 수도 있고 그가 언젠가 내가 싫어져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나는 절대로 남자의 품에 기대는 여자가 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었다. 그가 있어도 없어도 혼자 잘 살 수 있는 여자가 되자. 하지만 그와 만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뚜렷해지는 건 내가 그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가 없으면 못 살 것 같다.
아직은 서로 집중할 일이 있기에 결혼은 멀게 느껴진다. 하지만 언젠가 나중엔 다시 이 얘기를 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런데 내 직감으론 왠지 그가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만 같다.
한때 그와 나는 수육에 빠져서 겉절이와 수육을 엄청 만들어 먹었다. 나는 뒷다리살을 좋아하는데 남자친구는 삼겹살을 좋아해서 늘 두 개씩 넣어서 끓였다. 돼지고기 냄새를 잡을 때 쓰는 팔각이나 생강은 대만 요리에 꼭 필요한 식재료이기에 항상 집에 있었다. 고기만 사 오면 뚝딱이었다. 묵은지를 안 먹는 그는 매번 겉절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