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하는 길, 멀고도 험난하다.
그가 대만으로 돌아가고 몇개월이 지난 21년 봄, 그가 진지한 이야기를 꺼냈다.
"감자야 어느 순간엔 우린 한 곳에서 만나야 해. 언제까지고 이렇게 떨어져서 왔다 갔다 할 수는 없어."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우리 적어도 20대 후반에는 서로의 나라나 혹은 제3국에 함께 정착하자. 그리고 나는 감자와 만 30세 이전엔 꼭 결혼하고 싶어. 감자는 어때?"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든 생각은, 그가 나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고 있어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나 또한 몇 살까지라고 나이를 정해두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 나라에 같이 있을 방법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던 중이었다.
나는 구체화해서 미래를 그려보았다.
내 전공으로 그의 나라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일단 첫 번째로 중국어에 능통해야 했다. 그리고 대만어(대만의 구어, 민남어)에도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야 했다.
그 후엔 직업의 자격증격인 대만의 면허시험에 응시해 합격해야 한다. 먼저 대학성적증명서와 졸업장을 번역해 공증받아 인증받은 뒤에 응시 자격을 얻어야 한다. 그 후 두번에 걸쳐 면허시험을 치루고, 시험에 합격하고 인턴쉽을 1년간 수료한다면 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
나는 혹시나 해서 메일을 통해 내 학교를 밝히고 이 학교의 졸업생인 외국인이 대만에서 응시 자격을 얻을 수 있냐고 문의했고,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 답메일을 받으니 갑자기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전공공부와 중국어 공부를 하느라 하루가 모자랐다. 차라리 그와 떨어져 있어 강제로 데이트를 못해서 다행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중국은 간체자, 대만은 번체자를 쓰기 때문에 대만인 선생님께 중국어를 배워야 했지만 적당한 분을 찾기가 힘들었다. 번체자로 중국어를 공부하신 한국인 강사님을 찾아 공부를 시작했다. 내 계획은 23년 5월까지 만 2년간 중국어를 공부해 중국어에 능통해지고 나서 기초 대만어를 익히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번은 그에게 택배를 보내며 중국어로 손편지를 보냈는데 그가 좀 이상한걸 눈치챘다.
"감자야 혹시 이 편지 누가 대신 써준 거야...?"
"그럴리가! 내가 쓴 거지.“
"요즘 중국어 공부해?"
"...... 아니? 그냥 번역기 도움도 받고 이것저것 찾아가면서 쓴 거야"
"감자야... 이건 번역기가 쓴글이 아니야. 필체도 예전이랑 다르잖아! 정말 중국어 공부하는거 아니야?"
"들켰네..."
그는 그 사실을 도대체 왜 숨기냐며 웃었다. 나는 적어도 중국어능력시험인 HSK나 TOCFL 목표 급수는 달성하고 나서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여태껏 세운 계획을 말해주니 그는 내가 함께 할 미래를 자세히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에 기뻐했다. 그러면서 여태까지 자기가 알아본 한국 정착 루트도 알려주었다.
알고 보니 그는 이미 한국인 행정사와 연락을 해서 절차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가 한국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취업에 성공을 한 뒤, 취업비자를 받아 들어와야 했다. 그가 취업비자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e7 전문인력 비자로 들어오는 방법이 유일했다. 하지만 e7 비자는 자국민 노동자를 쓰는 대신 외국인력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인을 대신해서 ‘굳이’ 외국인을 고용해야할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만 비자가 발급됐다. 자국민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직종도 52개의 직종으로만 특정됐고, 대졸자는 전공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분야에서 1년 이상 근무한 경력을 가져야 했다.
그렇지만 남자친구는 세계순위 200대 이내 대학 졸업 예정자였기 때문에 예외 조건으로 1년의 경력이 면제되었다. 학사 학위만 소지하고도 무경력으로 취업비자를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 사실에 기뻐했지만 행정사님은 사실은 이 면제조건이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비자를 받기 전에 일단 먼저 한국의 기업에서 남자친구를 뽑아야 하는데, 한국인 대졸자를 놔두고 굳이 갓 졸업한 대만인을 뽑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에 제일 빨리 들어올 수 있는 방법으로 한국 대학원 입학을 추천받았지만 그는 고심 끝에 한국대학원 생활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대만에서 먼저 커리어를 쌓아서 오는 방법뿐이었다.
행정사님은 세계 500대 기업에서 근무 경력이 있다면 취업비자를 받을 때 가산이 되는 경향이 있고, 그 전에 이름이 있는 기업에서 일하면 한국취업에 유리하니
웬만하면 세계 500대 기업 안에 드는 다국적 기업이나 대만 기업에서 경력을 쌓으라고 했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공부하는 것 뿐이었다. 우리는 떨어져있는 동안 각자의 공부에 집중했다.
그는 다음 해 여름이 지나고 4학년이 시작되자 본격적으로 취업활동을 시작했다. 다국적 기업의 대만지사나 세계 500대 기업 안에 드는 대만 대기업에 원서를 넣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서류에서도 합격이 힘들었다. 정규 취업이 아닌 인턴쉽 지원도 번번이 떨어졌다. 처음엔 투명하게 나에게 모든 상황을 공유하던 그가 언젠가부터 점점 말을 줄였다.
나는 한국에서도 일반적인 취업 준비를 해본 적이 없기에 그 상황도 잘 몰랐고,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답답했다.
그렇게 그의 졸업이 다가오는 어느 날, 그가 말을 꺼냈다. "사실은 원래 1지망이었던 기업들 말고도 다른 대만의 대기업에도 지원을 해봤는데 몇몇 군데에서 1차 합격을 했어. 이 기업에서 일하는 게 당장 한국행에 도움이 안되더라도, 경력을 쌓고 이직하는 것도 방법이라 생각했어."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우선 그가 1차 합격을 받았다는 것에 다행이다 싶었고, 그동안 그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여러 가지 고민이 있었을까 싶어 안쓰러웠다. 나는 그에게 한국에 오기 위해 조급해하지 말라고, 고생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가 졸업과 동시에 한 대만 기업에 최종합격을 받았다. 그의 입사를 축하하며 그의 부모님과도 전화를 해서 기쁨을 나눴다. 그런데 이틀 뒤, 그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나 그 회사 안 가기로 했어. 딱 6개월만 더 글로벌 기업이나 1지망 기업에 지원해 볼 거야."
"....... 뭐라고?"
그에게 왜 그런 생각을 했냐 물었다.
"입사하게 되면 일 배우고 적응하는데 1년 이상을 보내야하고 그 시간동안 취업활동을 병행하기 힘들어. 어차피 1지망 기업에 이직할 생각으로 일을 할텐데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한명의 구성원이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거야. 취업활동을 더 해보고 싶어."
내가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라고 하자 그는 입사 포기 연락은 빨리 하는 게 예의이기 때문에 이미 연락했다고 말했다.
이 얘기를 듣고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그가 나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친 게 아닌가 싶어 심란했다. 그의 가족들과 전화했을 때 어머니는 분명히 그 회사가 좋은 회사라고 말씀하셨다. 자려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가끔은 누우면 심장이 쿵쿵 뛰는 게 내 귀로 들려서 진정시키려 새벽에 한시간 넘게 산책을 하고 나서야 잠에 들었다.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 회사의 합격에 감격하며 커리어의 첫 시작에 들뜨지 않았을까?'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취업활동을 이어나갔고 물어보진 않았지만 눈치로는 면접까지 가기 전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그가 다국적기업의 중국지사나 홍콩지사에도 취업활동을 해보려고 한다는 말을 했다.
"글로벌 기업 중엔 양안관계 때문에 대만에 진출하지 않은 기업도 많고, 오히려 대만보다 홍콩에서 일하는 게 내 커리어에도 도움이 될 수 있어."
그가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나 때문에 자꾸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머리에서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내가 그의 인생을 꼬는 것만 같았다.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어느 날, 그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감자야 혹시 만약 내가 한국에 취업을 못한다면 정말 감자가 대만에 들어올 생각이 있는거야?
-당연하지. 내가 왜 맨날 중국어 공부하는데! 그런데 나 가서 면허 따고 하는데 시간이 걸릴 거야. 그때동안 내가 돈 못 벌어도 괜찮아?
-난 그런 건 상관없어. 난 감자가 평생 일하지 않아도 돼. 그냥 우리가 한 나라에서 만나는 게 중요해. 국제부부들이 대부분이 이렇게 정착하는 걸?
그런데 이 생각은 나도 사실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꺼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나도 그에게 물었다.
-있잖아... 한국에 취업비자 말고 그냥 결혼비자로 들어와서 나랑 살 생각은 없어?
-일단 한국에 들어가서 취업하는 방법을 말하는 거야?
-그래도 되고... 그냥 내가 벌고 네가 주부로 사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난 너 먹여 살릴 자신 있어.
이 말을 꺼내기까지 그가 언짢아할까 봐 긴장했는데 그가 잠깐 말없이 멈춰있다가 빵 터져서 웃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응. 나 완전 진심이야. 세상에 너보다 주부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 같은데. 너는 꼭 일을 하고 싶어?
-아직 일해본 적이 없어서 일이라는 게 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지도 모르겠어. 내가 일 욕심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그렇지만 왠지 남자가 주부를 하는 건 상상이 안 가.
나는 그에게 그런 사회 통념 말고 우리 마음에만 집중에서 우리가 제일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뭘까를 고민해 보자 했다. 그는 좀 망설이다가 말했다.
"감자야 그런데... 나 만약 주부가 된다면 최고의 주부가 될 수 있을 거 같아!"
그와 함께 웃으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 발발 떨면서 아등바등 댔지 싶었다. 그래, 정 안되면 그냥 한 명이 벌어서 책임지면 되는데! 굳이 한 나라에서 둘 다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얼마 뒤 그는 조금 마음이 편해졌는지 우리는 아직 20대 초반이니 조금 더 여유 있게 생각하자 얘기했다. 그 후에는 그도 나에게 예전처럼 취업 상황을 종종 털어놓았다. 그가 터놓고 말해주니 마음이 편했다.
어느 날 학교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내가 공부하는 저녁시간이면 항상 전화하기 전에 '지금 전화해도 돼?'라는 문자를 보낸 뒤, 내가 괜찮다고 답장을 해야만 전화를 걸었다. 바로 전화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핸드폰에 진동이 울리는 순간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직감이란 건 무서운 것이었다.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가는데 손이 떨렸다.
그가 상기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감자야!"
마음이 급해 내가 바로 물었다.
"합격한 거야?!"
"어?! 어떻게 알았어?"
"진짜? 진짜 합격한 거야?"
"응! 나 00타이완에 합격했어!!!"
"뭐?"
그가 합격할 가능성이 적은게 아니라 아예 없다고 한 곳이었다. 계속 지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흥분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가 얼마나 이날을 기다렸는지 알것 같았다. 기쁘고 자랑스러운 마음, 그보다 왠지 모를 안쓰러움이 몰려와 울컥했다. 그렇게 그는 꿈에 그리던 첫 직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대만식 굴전蚵仔煎
대만 길거리 음식 중에 제일 추천하는 음식, 대만식 굴전인 어아젠이다. 홍콩에서도 거의 똑같은 음식을 판다. 친구들이 대만 야시장에 가서 뭘 먹으면 좋냐 물으면, 나는 닭날개볶음밥이나 지파이같은 음식도 맛있지만 그보다 먼저 어아젠을 꼭 먹어보라고 한다. 현지에서는 달짝지근한 소스도 함께 뿌려주는데 그래서 반찬보다는 간식이나 술안주로 더 잘 어울린다.
집에서 만들다면 기호에 따라 파 대신 청경채나 샐러리를 넣어서 만들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