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커플의 대화
그가 취업을 한 뒤로는 일에 몰두하며 굉장히 바빠졌다. 그가 대단하다고 느꼈던 날이 있었다.
"감자야, 나 요즘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느끼고 있어. 사실은 취업이 안될 때도 막상 나를 쓰면 내가 얼마나 잘하는 사람인지 보여주겠다고 자신만만했거든.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 그래서 요즘 겸손해지고 있어."
그가 나보다 한살이 어리기 때문인지 나는 늘 그에게 의지하고 기대면서도 왠지 그가 애기 같았다. 그런데 내가 학생신분으로 있는 동안 벌써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신을 펼치고 있는 그가 어른처럼 느껴졌다.
다만 그가 일에 치여 녹초가 된 날에는 우리가 떨어져 있는 게 더욱 아쉬웠다. 그가 지쳐 보일 때면 대만으로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만약 내가 대만에 있었다면 이런날에는 그가 좋아하는 체리케이크를 사가서 먹일 텐데...'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냥 전화로 밥을 잘 챙겨 먹으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래도 국경이 열리고 한달에 한두번, 주말에 1박 2일 동안이라도 그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가 그렇게 첫 직장에 적응하며 바쁘게 살아갈 때쯤, 나도 한국에서 예상치 못한 터닝포인트를 맞았다.
그전까지 나는 내 전공에 큰 애정이 없었다. 평생 하고 싶은 일이 딱히 없었던 터라 애초에 부모님의 뜻에 따른 전공이었다. 직업인으로도 그냥 내 몫만 제대로 해내면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공부한 지 4년이나 지나고 나서야 내가 할 일에 대한 애착이 생겼다. 그때쯤 내가 일하게 될 현장을 미리 보며 실습을 시작했는데, 현장을 직접 마주하자 마음이 뜨거워졌다. 내가 소모되더라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세상에 어떤 쓰임이 되어야겠다는 나름의 비장한 마음이 생겼다.
23년 여름, 짧은 방학 동안 그를 보러 대만에 갔다.
나는 그에게 내가 요즘 느낀 것에 대해서 말해주고 싶었었는데, 그를 직접 만나 얘기하고 싶어 꾹꾹 참고 있었다. 대만에 도착한 첫날에 바로 요즘 내 머리를 지배한 생각들에 대해 얘기했다.
처음에 그는 같이 눈을 빛내며 잘됐다며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내가 점점 구체적으로 말을 하자 그가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실시간으로 싸늘해졌다.
나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그래?
-아니야.
-왜 그래? 내가 무슨 실수했어?
-아니야.
이 대화를 여러 번 반복하다 내가 안절부절못하자 그가 입을 뗐다.
-감자는 이미 한국에서의 모든 미래를 다 그린 것 같아.
-응?
-이미 졸업 후에 어떤 트레이닝을 받을지 다 계획을 세워둔 거잖아. 나는 어떻게든 한국으로 가는 쪽으로 생각하는데... 감자의 미래엔 내가 없어 보여.
-아니야. 그 트레이닝은 대만에서도 할 수 있어. 나는 그냥 그쪽으로 일하고 싶다는 건데... 왜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진 거야?
-글쎄.. 감자는 내가 1순위가 아닌 것 같아.
대화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 나는 멍해졌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가슴이 뛰었다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에게 처음 말한 건데...
그때 우리는 산책을 하며 얘기하던 중이었는데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와서 입을 닫고 감정을 다스리며 앞만 보고 걸었다.
몇 분 뒤 그가 내 얼굴을 자꾸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앞만 보고 계속 걸었다.
"미안해.."
계속 앞만 보고 걷자 그가 또 말했다.
"i'm sorry..."
대답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살짝 고민하면서 걷는데 그가 또 입을 열었다.
"對不起..."
그가 가지고 있는 패 다 꺼내듯이 뚜이부치까지 꺼내자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
"너 왜 애교 부려!"
“아니야! 웃길라고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미안해서 그런 거야."
한번 웃고 분위기가 바뀌자 우리는 벤치에 앉아 얘기하기 시작했다.
-왜 그런 얘기를 했어? 나한테 서운한게 있었어?
-아까는 그렇게 말했지만 난 사실... 감자가 대만에 오는 건 기대도 안 했어. 내가 당연히 갈거라 생각했지... 감자가 오고 안 오고는 문제가 아니야. 감자 마음을 모르겠어. 난 너랑 함께 하는 게 최우선인데 너도 똑같은 마음인지가 궁금해.
-나도 너만 있으면 된다고 항상 얘기했잖아. 그게 내 진심이야. 난 너랑 함께 살 수 있으면 한국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어! 왜 내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감자는 내가 한국에 가는 방법에 대한 얘기를 해도 큰 반응이 없고 항상 ‘한국에 오는 걸 우선하지 말고 네 커리어를 먼저 생각해.’ 라고 하잖아. 내가 한국에 가는 게 부담스러워?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난 네가 좋은 기회를 놓칠까 봐 무서운 거지... 일단은 각자의 공부와 일에 집중하다가 적당한 때에 만나면 된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생각하면 우린 못 만날 거야.
-현재에 충실해서 열심히 살다 보면 만날 수 있어. 난 되려 네가 왜 그렇게 조급해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었어.
-나는 우리처럼 장거리로 연애하던 국제커플들 얘기를 많이 찾아봤어. 그런데 각자의 나라에서 열심히 자리 잡은 커플들은 결국 헤어져. 왜냐하면 이미 각자의 나라에 너무 깊게 뿌리내렸기 때문에 그걸 포기할 수가 없는 거야.
그 사람들도 다들 현재에 충실하면 언젠가는 연결돼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렇지만 국제커플이 한 나라에 정착하게 되는 건 어쩌다 운 좋게 되는 일이 아니야. 열심히 살더라도 서로가 만나는 방향으로 계속 가야 된단 말이야.
그의 말을 들으니 미안해졌다. 나는 다른 국제커플들이 어떤 시행착오를 겪으며 같은 나라에 정착하고, 어떤 문제로 헤어지게 되는지 한 번이라도 찾아본 적이 있었나? 내가 대만에서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니 그거면 된다 생각했었다. 그가 수많은 고뇌 속에 있을 동안 나는 천하태평이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가 다른 불만도 내비쳤다.
- 감자는 내가 한번 요즘도 중국어 공부하냐 물었을때 중국어는 어렵다며 얼버무렸잖아. 그렇게 얘기하면 나는 섭섭해. 우린 늘 영어나 한국어로만 대화하니 난 감자가 얼마나 중국어를 공부하는지 알 수가 없어. 그렇지만 내가 여자친구한테 내 나라 언어 공부를 계획대로 하고 있냐고 계속 캐묻는 것도 웃기잖아.
- 나 계속 공부하고 있었어. 그렇지만 내가 생각한 목표까지 도달하기 전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아서 얼버무린 거야.
-우리가 앞으로 겪을 일이 많을 텐데 얘기하지 않으면 난 감자 마음을 몰라. 2년 전에 감자가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 뒤로 난 늘 궁금했어.
-그냥 내가 생각이 있을 거라고 믿고 기다려주면 되잖아. 만약 이런 저런 목표가 있다고 말해서 네가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어떻게 해?
-내가 왜 실망해? 실망 안 해. 결과를 같이 받아들이면 되지.
그가 그렇게 말하는데 들을수록 내가 틀리고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 같이 받아들이면 됐는데 난 왜 그렇게 얘기하기가 꺼려졌지?
점점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 했으면서 내 상황에 대해선 입을 꾹 닫았으니... 그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나는 주섬주섬 핸드폰 사진첩을 뒤져보았다.
"나 사실 TOCFL c1 땄어. 이거 딴지 몇 달 된 거야!"
그에게 대만 언어시험 합격증을 보여줬다. 그 시험을 잘 모르는 그에게 따기 힘든 거라고 칭찬해 달라고 하자 그가 놀라서 얼떨떨해하며 잘했다고 했다. 그는 왜 말을 안 했냐고 물었다. "c2가 최고레벨이니깐 c2까지 따고 나서 말해줄라 그랬지..."
그에게 나도 나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다는 걸 알려주었다.
tvbs(대만 방송사)로 매일 대만 뉴스를 듣고 있고, 따라서 중얼거린다고, 나에게는 학사를 마치기 전엔 중국어를 공부하는 게 최선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도 그와 함께하는 게 최우선이고, 그도 내 마음을 알고 있을 줄 알았다고도 얘기했다.
그는 내가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 걸 보고는 마음이 풀린 듯했다. 나에게 정색을 해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는 4년간 매일같이 수다를 떨면서도 정작 이런 얘기를 해본적은 없었다.
그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나는 그날에서야 그가 왜 그렇게 첫 직장을 글로벌 기업으로 잡는 데에 애를 썼는지 알게 되었다.
"sk가 아무리 큰 기업이어도 대만에선 잘몰라. 내가 아무리 좋은 대만 회사를 다녀도 tsmc가 아니면 한국에서 알까? 한국에 취업한 외국인들과 연락해 본 적이 있는데 그들의 경험을 통해 생각보다 한국에서 외국인 취업의 벽이 높다는 걸 알았어. 그들이 겪은 일은 ······이랬어. 그러니 얼마나 좋은 인력이든, 고용주가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뽑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잖아. 그래서 한국행에 가까워지기에는 이름값이 있는 글로벌 기업에 가는 게 최선이었던 거야."
그날을 대화를 통해 내가 깨달은 건, 우리 관계를 불안하게 했던 최대요인은 국제연애가 아니라 입을 닫아버려 그를 불안하게 한 ‘나'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앞으로는 그에게 좀 더 내 상황을 알려야겠다 마음먹었다.
대화가 마무리될 때 나는 혹시 또 서운한 거나, 아니면 더 바라는 게 있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머뭇거리다 말했다.
“감자는 애정표현을 잘 안 하니깐... 좀 부끄러워도 좋다는 표현을 많이 해주면 좋지."
“사랑해 말고 다른 표현?”
“응. 다른 표현.”
“어떻게...?"
“뭐... 나는 너 없으면 못살아 이런 거...”
뜻밖의 대답에 빵 터졌다. 그 후로 나는 그에게 시도 때도 없이 너 없으면 못 산다고, 관뚜껑 닫을 때까지 따라다닐 거라고 했다. 너무 해대서 지겨울 법도 한데, 그는 들을 때마다 수줍게 웃으며 좋아했다.
그리고 이 날의 대화로 내가 그와 같은 마음인걸 확인한 그는 한국행에 대한 마음을 다시 불태웠고, 본격적으로 한국 회사에 지원하기 시작했다.
한창 다이어트를 할 때 그가 자주 싸주던 메뉴이다. 비록 식단을 하겠다는 계획은 작심열흘이 되어버렸지만 그때 처음으로 또우장을 먹었다. 그도 직접 만들어본 건 그때가 처음이라고 했다.
또우장豆漿 은 대만식 두유인데, 콩물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음식이다. 대만 아침식사에서 제일 대표적인 음식으로 요우티아오라는 대만식 바게트를 푹 담가 적셔먹는다. 그는 한국에서 또우장을 잊고 살고 있었는데, 다이어트 식단을 찾다 공통적으로 두유가 들어가 있는 걸 보고는 또우장을 만들어 보았다. 만드는 과정을 구경하며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뭔가 하니 한국에서 두부를 만드는 과정과 거의 비슷했다.
그는 검은콩을 섞으면 더 고소하다며 항상 검은콩을 섞어 만들었다. 윗부분은 저렇게 고요한 액체로 보이지만 떠먹어보면 아래에는 자잘하게 엉긴 순두부들이 있다. 그래서 또우장만 먹어도 든든하다.
지금 다시 보니 다이어트 식단 치고는 좀 열심히 먹었다.
현지인들은 또우장에 고추기름을 넣어 먹는데 상상만 하면 안어울릴 것 같지만 그렇게 먹어보면 또 다른 맛으로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