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번도 동생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가족들이 모여 사진첩을 보는데 대여섯 살쯤 된 내가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동생들의 발을 내 허벅지에 올려놓고 양말을 신기고 있었다.
다른 사진들도 다 동생들을 옆에 두고 밥을 먹이고 있거나 동생손을 잡고 길을 걷는 모습들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저 나이부터 동생들을 챙기는 착한 누나였다고 뿌듯해했지만 나는 그 사진들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외가와 친가 양쪽에서, 그 많은 사촌들 중에서도 나는 가장 나이가 많았다. 사촌들은 자주 우리 집에 머물렀다. 나는 보호자라는 단어가 싫었다. 어릴 때부터 네가 보호자니까 동생들이 배고프거나 다치는건 모두 네 책임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커서 돌이켜보니 그때 나 역시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나이였다.
남자친구를 처음 만난 날, 남자친구 이전에 먼저 눈을 마주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조계사 근처의 골목을 지나고 있었는데, 마주 오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한 가족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비니를 쓰고 있는 한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나를 향해 눈웃음으로 인사를 했다.
그 순간 그들이 외국인 관광객이란 걸 알았다.
나도 어색하게 눈인사를 했고 거리가 좁혀지자 중국어가 들렸다. 그러다 가족들 중 한 남자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 남자친구였다.
그의 가족들이 그 자리에 굳어서 나를 쳐다보는 남자친구와 나를 번갈아 보고는 그의 팔을 때리면서 웃었다.
그리고 비니를 쓴 그녀가 나에게 가보라는듯이 남자친구의 등을 떠밀었다. 나는 그렇게 남자친구와 그의 가족들을 동시에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 눈인사를 건냈던 그녀는 남자친구의 누나였고 남자친구가 가족들 중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반년 뒤, 그해 여름방학에 대만으로 여행을 갔다. 그리고 남자친구는 내가 대만에 있던 시기에 군대에 갔다.
대만은 출생연도에 따라 복무 기간이 다른데 남자친구가 입대할 시기엔 복무기간이 4개월이었고, 대학진학자에 한해서는 2개월로 나눠 단계적 복무를 시행했다.
그래서 대만 대학생들은 주로 신입생과 2학년 여름방학 때 2개월씩 두번으로 나눠 복무했다.
(현재는 1년간 복무한다.)
내가 여름방학 때 대만에 갈 계획이라고 했을 때, 그는 대만은 군인들이 주말에 집에 돌아가기 때문에 주말에는 나와 함께 할 수 있고, 휴가를 한 번에 모아서 나올 수 있으니 상황을 보며 5일 정도 대만에 오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꼭 남자친구와 함께가 아니라도 대만에 오래 머물며 여행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3주간의 여행계획을 짰고 남자친구를 볼 수 있는 날이 있다면 그때만 보자고 했다.
처음엔 당연히 숙소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께서 본가에 머무르라며 여러 번 권유하셨기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다시 그의 가족들을 만났을때, 그들은 모두 내게 친절하게 대해주셨지만 그의 누나가 유독 나에게 말을 걸어주며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언니는 이미 한국에서 여자들끼리 연장자를 '언니'라고 부른다는 걸 알고 있었고 나에게 영어이름을 부르거나 언니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다.(대만사람들은 다들 영어이름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언니를 이름으로 부르는건 왠지 어색해서 언니라고 불렀다.
남자친구의 본가에 머무는 동안 그의 방을 쓸 줄 알았는데, 남자친구의 방엔 침대가 없다는 이유로 언니가 자기 방을 내어주었다. 내가 사양해도 언니는 한사코 손님은 침대에서 자야 한다며 본인의 방으로 이끌었다.
머리맡에는 귀여운 인형과 편지, 그리고 하트모양의 입욕제가 있었다.
남자친구의 부모님과 큰형은 풀타임으로 일했고 언니는 알바를 했기 때문에 집에서 유유자적 빈둥거리는 건 나뿐이었다.
나는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천천히 구경하는 여행을 즐겼고, 매일 새로운 동네를 한바퀴 돌고 집에 와도 가족들이 퇴근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았다.
내가 청소나 요리를 조금 하려고하면 언니는 기겁을 했다. 언니는 늘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퇴근하고 와서 밥 해줄 거니깐 그냥 쉬고 있어!"
하지만 유교걸에게는 이 문장이 너무 낯설었고 하루이틀 머무는게 아니었기에 매일 가만히 있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장을 보거나 저녁준비를 조금 돕기 시작했고 언니는 나를 쉬게 하려고 직접 요리를 했다. 내가 장을 보러가는것도 꼭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매일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점점 가까워졌다.
언니는 알바가 일찍 끝나는 날엔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곤 했다. 언니는 더 바디샵이라는 브랜드를 좋아했는데 바디용품이나 목욕용품을 사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그 입욕제도 더 바디샵의 제품이었다.
알바비가 들어온 날, 언니는 나를 더바디샵으로 데려가 자기가 좋아하는 제품을 손등에 발라주며 어떠냐 물었다. 그리고 내 반응이 좋은것들을 사주었다.
우리는 겨우 한 살 차이었지만 언니는 항상 나를 어린아이처럼 대했다. 걸을 때도 나를 인도로 끌어당기고, 장을 본 짐도 기어코 자기가 들었다. 나보다 체구도 작고 여리여리한데도 말이다.
내가 뭘 먹고 있으면 옆에서 내 머리카락을 귀에 꽂아 넘겨주거나 말없이 머리끈으로 내 머리를 묶어주었다.
그럴때면 나는 언니가 있다는게 이런 기분이구나, 보살핌을 받는다는게 이런거구나 싶었다.
언니의 눈빛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언니는 나에게 가족에 대한 얘기나 남자친구의 단점도 솔직하게 말했다. 남자친구가 철도 없고 의지가 될만한 남자가 아니라며 내가 왜 만나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했는데
나는 그런말을 들을때마다 나에겐 너무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내 남동생들도 누군가에겐 근사한 남자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언니는 스타벅스가 다른 대만의 개인 카페들보다 비싼데 비해, 특별히 자리가 편하거나 맛이 좋지도 않아 잘 가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가 스타벅스를 갈 때는 스타벅스 컵을 사러 가거나, 스타벅스를 간다는 기분을 낼 때뿐이라고 했다.
단지 커피를 마시러 스타벅스를 가는 건 사치스럽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한국은 어떠냐 묻기에 나는 한국에선 오히려 노트북을 들고 장시간 앉아있을 곳으론 스타벅스가 제일 무난해서 학생들이 자주 간다고 답했다.
그러자 언니는 알바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집 근처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와서 나에게 주었다.
나는 동생의 여자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애정을 받는 게 황송하게 느껴졌다.
대만을 떠나기 며칠 전 남자친구의 아버지쪽 가족모임이 있었다.
나는 당연히 안 가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께서 나도 간다고 말을 해놓았으니 같이 가자고 하셨다.
가보니 가족모임의 규모가 내 예상을 뛰어 넘었다. 엄청나게 큰 방에 20명씩 앉는 원형 테이블이 2개가 있었다.
총 40석으로 남자친구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친가 친척들 모두가 모인 자리였다.
식사가 시작되기전 할아버지의 권유로 나는 일어나 내 소개를 했고 그들은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며 여러 질문을 던졌다.
세대별로 식사 자리가 달랐는데 나는 그의 사촌들과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었다. 사촌들은 대부분 나에게 중국어로 질문을 던졌고 그때만해도 나는 중국어 기초 단어를 공부한 수준이었기에 남자친구의 형과 언니가 내 양옆에서 영어로 통역을 해줬다.
그러다 한 사촌이 으레 하는 외모 칭찬을 했다. 나는 그 말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촌이 뒤에 무슨 말을 했는데 갑자기 언니가 화를 확 내었다.
짧게 한마디를 한 게 아니라 길게 뭐라 뭐라 쏘아붙였기 때문에 그 옆테이블까지 그 자리에 있던 39명이 언니를 주목했다.
상황이 어색하게 수습되고 나서도 언니는 계속 기분이 나빠보였다. 왜 그러냐는 나에게 언니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신경 쓰지 말고 밥을 먹으라고 했다.
난 너무 궁금해서 남자친구의 형에게 무슨 일이냐고 속삭이며 물으니 오빠는 망설이다가 몰라도 되는 일이라고 하며 말을 아꼈다.
나는 왠지 언니가 그 정도로 화낼 일이면 나에게 성희롱을 한 건가 싶었다.
밥 먹는 내내 속으로 생각했다. '아! 중국어 공부 좀 열심히 하고 올 걸!!'
집에 돌아와서 오빠에게 무슨일인지 말해 달라 한번 더 부탁했더니 오빠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야기해주었다.
그 사촌은 내게 한국여자들은 성형을 다 한다는데 너도 성형수술을 한 곳이 있냐 물어보았고, 언니는 왜 그런 질문을 하냐며 생각하고 말을 하라고 화를 낸 것이었다.
충분히 기분이 나쁠만한 말인데도 그말을 듣고 사실은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더 나쁜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말의 의미를 알기 전에 언니가 대신 화를 내주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보다는 조부모님의 형제들까지 계신 자리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화를 낸 언니의 기개가 놀라웠다.
오빠는 나에게 물었다.
"혹시 00이(언니)가 그전에 너한테 성형수술 했는지 물어봤었어?"
"아니? 그런 거 안 물어봤는데 왜?"
"아까 00이가 화낼 때 감자는 태어날 때부터 이 얼굴로 태어났다고 했거든. 그래서 나는 00이가 예전에 물어본 줄 알았지."
내가 성형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면서 냅다 그렇게 외친 언니가 웃겨 오빠와 함께 웃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 언니가 대만에서 나를 찍어던 사진을 인화해서 보내주었다. 몇번 더 만나며 언니와는 편한 사이가 되었고 가끔씩 연락을 하며 안부를 묻고 둘이 만나 같이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나는 남자친구의 졸업식엔 가지 못했지만 언니의 졸업영화제엔 참석해서 졸업작품을 볼 수 있었다.
대만에는 재작년까지 러쉬매장이 없어서 언니는 여행지에서 러쉬 제품을 잔뜩 사갔다. 그래서인지 나는 한국에서 러쉬 매장이 보이면 자동적으로 들어가 언니가 좋아할 만한 제품을 고르게 되었다.
나는 대만에 방문할때마다 그의 가족들께 드릴 선물을 사갔는데 항상 아무생각없이 사서 모아보면 언니의 선물만 많아 몇개는 언니와 둘이 있을때 따로 주었다.
한 번은 과외를 하다가 속상한 일이 있었다. 나는 과외학생의 집에 갈때는 항상 덧신처럼 생긴 실내화를 따로 챙겨가는데
하루는 장마철이라 장대비가 와 수건을 챙겨서 샌들에 맨발로 갔다.
신발장에서 수건으로 발을 닦고 실내화를 신고 들어가는데 그 모습을 학생 어머니가 빤히 보고 있었다.
과외가 끝나고 어머니는 나를 따로 불러 남학생 앞에서 맨발을 보이는 건 학생을 성적으로 자극하는 거라 내 생각이 짧았다고 따졌다.
나는 당황해서 앞으론 그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했지만 그 후로 며칠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냥 과외를 그만할까? 하는 욱하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얼마 안 남은 수능까지 함께 가기로 학생과 약속했었다.
나는 원래 속상한 일이 있으면 친구나 연인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그냥 혼자 곱씹으며 스트레스를 받을 뿐이었다.
그러다 며칠 뒤 언니에게 전화가 왔고 평소처럼 언니가 안부를 물었다. 그 순간 왜인지 며칠간 속상했던 마음을 언니한테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말하는데 말하는 도중에 '내가 이걸 왜 언니한테 말하고 있지..' 싶어 후회가 돼 얼버무리며 마무리했다.
그런데 언니는 내 말을 듣고 분개해서 화를 내주었다.
언니가 화를 낼수록 내 마음이 편해졌다. 다음엔 남자친구가 신던 양말을 신고가서 비에 적셔 학생 집에 발냄새를 풍기라는 언니의 말에 웃었다. 가만히 있던 남자친구는 발냄새 나는 남자가 됐다.
언니가 한 말, 왜 내 동생(妹妹)을 왜 괴롭히냐는 말에 며칠간 나에게 스트레스를 줬던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누군가의 동생이 된다는 건 이렇게나 좋은 거구나 싶었다.
涼拌雞絲 잘게 찢은 닭고기 냉채
이 대만 음식은 반찬으로도 좋지만 밤에 술을 마시며 너무 기름진 안주랑 같이 먹기엔 양심에 찔릴때 안주로 먹기 좋다.
닭가슴살과 오이는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닭가슴살을 삶은 뒤 아주 잘게 찢어준다. 포크로 긁듯이 찢어주면 뜨겁지 않다. 오이는 절여놓았다가 물기를 짜서 더해준다.
양념에는 참기름, 식초, 설탕, 소금이 기본적으로 들어가고 기호에 따라 간장, 땅콩소스, 굴소스, 샤차소스, 차오티엔소스(강추)를 더하기도 한다.
또 가쓰오부시나 고수를 넣기도 한다.
그는 涼拌雞絲를 만들 때 고수를 오이만큼 넣어서 먹는 걸 좋아하는데 이렇게 먹으면 비누맛 닭고기를 먹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