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원도감자 Nov 15. 2024

김치볶음밥을 잘 만드는 남자


연애 초반 삼겹살 집에서 김치볶음밥을 처음 먹어 본 그는 신세계에 눈을 떴다.

와 김치를 익히면 이런 맛이 나는구나..!

그리고 김치볶음밥에 빠져 열심히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그는 익힌 김치의 맛이 좋은지 한국 집밥 중에는 김치찌개와 김치볶음밥을 좋아했다.

김치찌개는 나보고 끓여달라 했는데 김치볶음밥은 자기가 만든 게 더 맛있는지 늘 직접 만들었다.


언젠가 우리가 김치찌개와 김볶밥을 함께 먹던 중 그가 말했다.


“이렇게 밥이랑 찌개 둘 다 김치 넣고 먹으니깐 진짜 한국사람 같다! “

“... 한국 사람도 이렇게 잘 안 먹어...”


삼겹살을 구워먹을때면, 내가 삼겹살을 굽는동안 늘 그는 김치볶음밥을 만든다.




그가 아침에 우리 집에 와 늦은 아침을 먹자며 김치볶음밥을 만든 날이 있었다.

나는 그가 김볶밥을 만드는 걸 구경하며 노래를 불었다. 김치볶음밥을 잘 만드는 남자~!

여느 때와 같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가 대뜸 나를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감자... 음악적 재능이 있는 거 같아."

응?

"그 멜로디가 예사롭지 않아."

"오잉? 이거 원래 있는 노래야! "

그는 내가 그 노래를 즉석에서 만든 줄 알았던 것이었다. 내가 이 노래는 <희망사항>이라는 유명한 노래라고, 원래가사는 ‘김치볶음밥을 잘 만드는 여자’라고 말하자 그가 궁금해했다.


그래서 그에게 희망사항을 들려주었는데 그의 반응이 예상과 너무 달랐다.


그는 앞부분을 들을 때만 해도 흥미롭게 들었다.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

그는 응? 하더니 웃었다. "와 이 노래 되게 솔직하다~"

"솔직하다니 너도 그런 여자를 원하는구나^^..."

"어? 아니야...! 감자야 난 아니야!"


얼떨결에 진심을 흘린 그가 노래를 듣더니 이내 갸우뚱했다.

내 고요한 눈빛을 보면서 시력을 맞추는 여자

"감자야 방금 시력이라고 한 거 아니야? 視力?"

"응! 視力 맞아."

"한국에선 시력이 맞춘다는 게 눈을 맞춘다는 뜻도 있어?"

그렇진 않지만 아마도 시적허용일 거란 얘기를 해주니 그가 그렇구나 했다.


그렇지만 또 다른 관문이 있었다.

웃을 때 목젖이 보이는 여자

목젖? 그는 목젖이 뭔지 찾아보고는 혼란스러워했다.

"신체구조적으로... 목젖이 보일 수가 없잖아. 플래시라이트를 켜야 보이잖아."

"원래는 못 보지만 엄청 크게 웃어서 보이는 여자가 좋다는 거지!"

"그게 뭐야... 페티쉬 같은 거야?" 그의 상상력이 뻗어나가자 웃음이 터졌다.

"그런 거 아니야!"

"근데 왜 남의 신체 장기를 보려고 해?"


나는 그에게 웃을 때 목젖을 보인다는 표현이 이상한 게 아니라며 설명했다.

그가 목젖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자마자 또 그를 경악하게 하는 가사가 나왔다.


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미니스커트가 잘 어울리는 여자

뭐?

그가 화들짝 놀라서 또 노래를 끊고 돌려 들었다.

"감자야! 이 가사 들었어...?"

그의 충격받은 얼굴이 너무 웃겨서 말도 못하고 웃었다.

"이런 가사 써도 돼? 선생님이 분명히 '통통하다'도 실례이고 '뚱뚱하다'는 모욕적의 의미로 쓰인다고 했는데?"

"맞긴 한데.. 옛날 노래라 그런가 봐."

그는 미국 래퍼들이 쓰고 욕먹는 가사 같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를 만난 이후로 미팅을 한 번도, 한 번도 안 한 여자

"어? 미팅이 소개팅을 말하는 거 아니야?"

"응. 대학교에서 다른 학교랑 단체 소개팅 하는 거 말하는 거야."

"그럼 미팅 안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남자친구 있으면 당연히 소개팅 나가면 안 되잖아."

"어? 그렇지.. 그렇지만 나가는 사람들도 있으니깐."

그가 또 한 번 놀랐다. 진짜야? 남자친구 있는데 소개팅을 왜 나가?


나는 그에게 신입생 때 남자친구 있는데도 과팅이 어떤 건지 궁금하다고 나가보고 싶다고 한 동기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 3대 3 과팅에서 만나 호감을 표현한 남자가 알고 보니 여자친구 있어서 기분 나빠하던 친구 얘기도 해줬다.

내 얘기를 듣던 그가 심각해진 표정으로 그건 안된다며 주변에서 꼬셔도 넘어가지 말라고 했다.


"에이 당연하지. 절대로 안나가."

"진짜지? 약속해! 그리고 그런 친구들 있으면 놀지 마."

"내 친한 친구들 중엔 그런 애들 없어! 그리고 과팅은 스무 살 때 잠깐 하는 거지 그런 거 할 일도 없어."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미팅에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며 약속을 받아냈다.

나는 진정하고 뒷부분을 들어보라고 했다.


여보세요, 날 좀 잠깐 보세요. 희망 사항이 정말 거창하군요. 그런 여자한테 너무 잘 어울리는, 난 그런 남자가 좋더라


"무슨 노래인지 알겠지? 꿈도 크다! 이런 노래인 거야"

그는 그걸 듣고 이런 반전이 있었구나, 하면서도 자기는 이렇게 여러 종류로 충격을 주는 노래는 처음이라고 했다.  


내가 그에게 이 노래가 한국에서 엄청 유명했다고 하니 그는 대만에선 유명해질 수 없을 거라 말했다.

"이런 가사... 만약에 대만에서 부르잖아? 그럼 뒤에 반전 몰라. 뒷부분 나오기 전에 이미 여자관객들이 무대에 올라가서 가수 끌어내려서 뒤에 반전 있는 거 모르고 무대 끝나."

내가 만나본 화끈한 대만 여자친구들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김치볶음밥을 만들다 생각나 틀어준 노래가 본의 아니게 그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는 정작 '김치볶음밥을 잘 만드는 여자' 부분은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충격을 준 이 노래를 절망사항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들을때는 그렇게 경악해놓고 내심 뚱땅뚱땅거리는 이 노래가 중독적이었나보다. 그는 이 노래를 자주 들었다.


그가 언젠가 이런 변태 같은 가사를 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다며 작사가를 찾아보았는데

나도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노영심'


그는 여자 작사가가 쓴 가사라는 게 의외라고 했다.

"와, 당연히 남자가 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남자 마음을 이렇게 잘 알지?"

"응? 남자 마음? 뭐야 노래 이상하다며!"

"앗.."

뭐야 자기도 다리가 예뻐서 미니스커트 잘 어울리는 여자 좋아하는 거면서!


알고 보니 노영심은 작사가일 뿐만 아니라 피아니스트이자 직접 작사, 작곡하는 가수였고 그의 노래 또한 서정적이고 아름다웠다.


특히 그는 노영심의 '별 걸 다 기억하는 남자'라는 노래가 귀엽다며 좋아했다.

그 노래엔 이런 가사가 있다.

한강 인도교의 철조 아치가 6개인지 7개인지

그는 그 부분을 듣고 정말 한강 인도교의 철조 아치가 몇 개인지 궁금해했고 직접 가서 세어보고 싶어 했다.

알고 보니 한강 인도교는 지금의 한강대교였고, 우리는 여름날 노들섬에 가서 눈으로 확인해 보았다. 한강대교의 철조 아치는 6개였다.



김볶밥, 계란말이,포도


그는 김치볶음밥을 수십 번 만들며 김치볶음밥 마스터가 되었고 나는 갖가지 레시피로 만든 김볶밥을 얻어먹었다.

버터를 넣은 김볶밥, 마요네즈를 넣은 김볶밥, 누룽지로 밑면을 지진 김볶밥..

재료도 다양하게 먹었다. 참치, 햄, 삼겹살, 새우 등등

혈관이 많이 막히는 방법일수록 맛있었다.

그는 생김을 잘라 넣은 김치볶음밥을 좋아하고 나는 스팸을 넣은 김치볶음밥이 좋아 스팸과 김을 둘 다 넣어먹는다.


하지만 그가 김볶밥 마스터가 되고도 헤매는 게 한 가지 있었다.


"김복바!"

"아니 밥!"

"김! 뽑! 밥!"

"복!"

"김봅...! 하아... 감자야 발음이 안돼..."

아직은 ㄱ받침과 ㅂ받침을 연이어 발음하기란 쉽지 않은가 보다.


"그냥 줄이지 말고 김치볶음밥으로 말하면 되잖아."

"나도 감자처럼 김볶밥으로 부르고 싶단 말이야..."


그는 지금도 완벽한 김볶밥 발음을 향해 도전하고 있다.  




이전 20화 한 땅에서 살고 싶어! (2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