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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원도감자 Aug 27. 2024

내 대만보이는 가정부가 아니에요

그는 그저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코로나로 국경이 닫히고 강제로 사이버 연애를 하고 있던 날이었다. 우리는 하루의 마지막 루틴으로 영상통화를 하다 잠이 들었는데, 어느 날 그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오래 못만날 줄은 몰랐는데... 너한테 제대로 밥 한번 못해준 게 후회가 돼.


 듣자마자 의아함이 앞섰다. 그는 내 자취방에서 매일 아침 커피를 내리고 버터에 식빵을 굽고, 계란 감자 샌드위치도 종종 만들어줬다. 내가 좋아하는 양파장아찌나 오이소박이 레시피도 익혀서 냉장고에 만들어 두고 갔다.  

내가 그에게 얻어먹은걸 줄줄 읊자 그는 그건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라며 반찬이나 국수 같은 ‘진짜 요리'를 만들어주지 못한 게 미안하다 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나 했더니.. 그날은 남자친구가 친구 커플의 집들이에 간 날이었다. (대만은 연인들이 자유롭게 동거하고 가족, 친구들에게 거리낌 없이 알리는 문화다.) 그 동거를 시작한 커플이 초대를 해 여러 대만 친구들이 그 집에 모였다고 한다.

주방이 좁은 이유로 각자 하나씩 간단한 요리를 해오자고 했는데 커플로 참석한 친구들만 남자 쪽이 여자친구 몫까지 두세 가지의 요리를 해온 걸 보고 문득 내가 생각났더랬다.


그 애들이 자기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반찬을 잔뜩 해왔더라고. 지금 생각해 보니 여자친구한테 1년간 밥 한번 제대로 안 차려 준 나는 나쁜 남자친구야. 

나는 그에게 시리얼만 우유에 말아줬지 버터에 식빵을 구워준 적도 없었는데.. 뭐야 그럼 나는 최악의 여자친구잖아!

내가 외치자 그는 조금 신기한 얘기를 했다. 감자는 여자니깐 왠지 그래야 된다는 생각이 안 들어.


 그러면서 대만의 가정 풍경을 들려줬다. 대만은 반정도는 삼시 세끼를 다 사 먹는 집과 아버지가 요리하는 집으로 나뉜다한다. 그의 집도 요리 담당은 아버지셨다. 자라면서 본 풍경이 그러니 자연스레 요리를 포함한 집안일은 남자의 몫이란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제일 놀란부분은 할아버지의 집에 가도 할머니는 가만히 앉아계시고 할아버지가 식사를 차리고 과일을 깎아온다는 부분이었다. 한국에서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기에 그런 얘기를 자세히 들으며 신기하기만 했다. 너무 이질적이라 성역할이 바뀐 세상에 사는 어느 프랑스 블랙코미디 영화처럼 느껴졌다.


 먼 나라 이웃나라 얘기로 듣는 건 신기하고 재밌었지만 남자친구가 어떤 압박감에 의해 본인을 못난 남자친구라 생각하는 건 싫었다. 그는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면 자기가 식사를 챙겨주겠다는 말을 여러 번 했고 나는 지금도 충분하다고 했다.


 하늘길이 열리고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벼르고 있던 요리를 해주기 시작했다. 그때 살던 내 자취방은 화구가 딱 하나인 아주 좁은 주방이었는데 그 협소한 곳에서 날 위해 요리해 주는 남자친구가 마냥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먹을 때 마냥 기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왠지 모를 미안함과 무리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함께였다. 그는 내 염려를 듣더니 말했다. 그냥 많이 먹어! 나는 사랑표현을 요리로 한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그런데 언젠가부터 대만 남자들이 밥을 열심히 한다는 게 소문이 난 것 같았다. 처음 그를 만난 2019년만 해도 나에게 대만 남자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보통 국제연애 자체에 포커스를 두고 '문화차이는 없냐'는 질문을 하곤 했는데 몇 년 사이에 첫 질문이 달라졌다.

대만 남자들은 가정적이고 밥도 잘해준다는데 진짜야?

 처음엔 어떻게 아셨냐며 무한 긍정의 대답을 했다. 진심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신기했다. 난 그때까지 멕시코 남자는 타코 먹는다 정도의 사실밖에 몰랐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어느 나라 남자가 어떻다는 걸 알고 있는지 신기했다.  사람들은 어디서 들은 얘기가 진짜라는 걸 확인하고 꽤 흥미로워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꼭 한두 마디를 더 덧붙였다. 아~ 대만남자나 만날걸. 여자를 엄청 떠받든다는데... 좋겠다, 부럽다!

 가끔은 좀 더 구체적이었다. 남자친구가 정말 청소를 잘하는지, 밥은 만날 때마다 해주는지, 빨래도 다 해주는지 궁금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런 질문은 새로운 가정부를 고용했다는 말에나 할 질문이 아닌가?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쏘아붙인 날이 있었다. 상대는 오다가다 몇 번 마주치면 어색하게 눈인사를 하던 선배였다. 그녀는 나보다 한학번 위의 선배로 내가 재수를 했기에 동갑이지만 친하지 않아 서로 존대하던 사이었다. 과방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물었다. 그거 남자친구가 만들어준 거예요?


 이미 우리 과에는 남자친구가 종종 내 도시락을 싸준다는 소문이 나있는 듯했다. 그렇다는 내 대답에 그녀는 감자님은 밥은 남자친구 시키면 돼서 편하겠다고 했다.

거슬렸다. 거기서 그만하기를 바랐건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떠벌리듯 말했다.  

내가 아는 애중에 홍콩남자랑 사귀는 애가 있거든? 근데 그 남자도 진짜 온순하고 여자친구가 하라는 거 다하더라. (나를 보며) 말 잘 듣죠? 중화권은 다 그런가 봐.

머리에서 멈춰! 신호가 도달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나갔다.


"무슨 개 키워요?"

일순간 주변이 싸해졌다. 평소 한산한 과방에는 그날따라 대략 13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인원이 모두 말을 멈추고 나와 그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한마디를 할까 하는 표정을 짓고 멈칫하더니 가방을 들고 그냥 나가버렸다.

집에 가는 길에 스스로 생각했다. 왜 그렇게 날카롭게 반응해야만 했니?


 그래 일단 내가 성질머리가 더러운게 첫 번째겠지... 그리고 그 말이 거슬렸던건 난 표현은 한끗차이라 생각한다. 남을 존중하지 않는 표현은 싫다. 내 남자친구는 여자를 떠받들어주기 위해 나와 연애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 밥 해주는 밥돌이로 그를 만나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나와 사랑에 빠져 나에게 종종 음식을 만들어줄 뿐이다. 그런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그가 마치 어떤 편리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떠들대는 게 불쾌했다. 그를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말 잘 듣는다는 말로 오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 '요 앞에 새로운 가게가 연다던데' 하는 것처럼 대만남자는 가정적이다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기에 그걸 대화의 소재로 쓴 것뿐이겠지. 그렇지만 가정적이다라는 표현과 말을 잘 듣는다는 확실히 다르다. 타인의 소중한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별로 그런 생각을 안 하는 듯했다. 어느 날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자아 없는 남자'

 '중국남자나 대만남자가 자아 없는 걸로 유명하지 않냐. 네 남자친구도 정말 그렇냐'는 말을 듣고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다. 처음엔 두 나라 모두 고된 입시를 겪는 나라이니 그 이유로 자아 성립의 시기를 건너뛰었다는 뜻인가 싶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요즘은 너드남을 넘어 '자아 없는' 남자가 대세라는 말을 했다. 여자친구의 말에 토 달지 않고 무한 '응응'으로 맞춰주기만 하는 취향도, 의견도 없는 남자가 인기란다. 하지만 그 표현은 좀.... 징그러웠다. 예스맨이랄지, 고집 없는 남자라는 완만한 표현이 있지 않은가. 자아는 한 사람의 세계이자 그 사람의 고유한 '그' 자체가 아닌가? 자아가 없다니. 세상은 왜 점점 거북한 말들을 거북하다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걸까? 상식선 안에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망해서 더 이상은 그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언젠가부터 주변에서 대만남자가 정말 가정적이냐 물으면 피해의식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 질문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적당히 대꾸하다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내 남자친구를 함부로 말하는 얘기를 타인에게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중화권 남자와 연애하는 여자를 만난다면 그 여자에게 애인이 정말 순종적이냐 묻지 맙시다. 정말 가정적이냐는 질문정도는 괜찮다.

하지만 떠받들어줘? 공주대접받아? 라는 질문은... 굳이 이렇게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자아 없다며! 생각하고 말합시다.  

말 잘 들어? 맞짱 뜨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의 요리 라구파스타. 우리는 파스타를 가느다란 카펠리니 면으로 먹는데 소스와 같이 볶으면 팅팅 분다고 소스를 계속 위에 올려준다. 먹어도 먹어도 맛있는 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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