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5-2
스타워즈 OST 첫 소절이 들리자마자 관객들은 환호했다.
무대 뒤편 커다란 스크린 위로 전투 장면이 나오자 또 한 번 열광했다.
나는 한 솔로나 레이아 공주, 혹은 요다, 하다못해 추바카라도 나오기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렸지만
공연주최측이 영화사로부터 사용 허락을 받지 못했는지 주요 캐릭터들의 모습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그러고보니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잊고 있었네.
첫 곡이 끝난 후 지휘자 데이빗 뉴먼의 인사와 공연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낸시가 건네준 헐리웃볼 안내책자를 보니
이 공연에는 존 윌리엄스가 만든 곡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헨리 맨시니, 레너드 번스타인의 작품도 세트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었다.
존 윌리엄스, 헨리 맨시니, 레너드 번스타인 이 세 사람은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던 동료였다고 했다.
다음 순서 소개가 끝나고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하얀 천 위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
책상 앞에 앉아 타자기를 치고 있는 남자주인공 폴(조지 퍼파드 분).
밖에서 노랫소리가 들린다.
창가로 다가가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본다.
여자주인공 홀리(오드리 헵번 분)가 아래층 창틀에 몸을 기대어 앉아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Moon river, wider than a mile.
I’m crossing you in style someday.
그 곳에 모여있던 관중 모두, 숨죽이고 오드리 헵번의 <문리버>를 들었다.
아주 작은 소리라도 이 공간을 감싸고 흐르는 선율을 흐트러뜨릴까봐.
<문리버>에 이어 <핑크팬더> 메인테마 연주까지 끝낸 후,
데이빗 뉴먼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오드리 헵번과 헨리 맨시니,
이 셋의 관계가 어땠는지 들려주고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오드리 헵번 주연의 또다른 영화 <샤레이드>도 추천합니다.
이번 공연에는 포함되지 못했지만 이 작품 또한 매우 훌륭하거든요.”
샤레이드?
귀가 쫑긋 섰다.
아, 그래, 샤레이드라는 영화가 있었지.
그러고보니 나도 고전영화를 찾아보던 시절이 있었네.
<샤레이드>는 여러 고전영화 추천목록에 들어있었다.
그 당시에 나는 구할 수 없어 보지 못했고, 그러다 잊었었는데,
그 이름을 십년이 지난 후 다른 나라에서 듣게 될 줄이야.
가슴이 설랬다. 옛날에 친했다가 연락이 끊긴 이의 소식을 듣고 반가워하는 것처럼.
최근 십 년 간은 드라마나 영화를 거의 못보고 있지만 십대 중후반부터 이십대 중후반까지
영화, 영화제, 기획전, 비디오 등을 부지런히 챙겨보던 시절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 때 접했던 작품들이 내가 여태까지 봤던 영상물의 구십 퍼센트를 차지한다.
인생의 사분의 일의 시간동안 내가 보고 듣고 읽고 느낀 것들이 내 평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다니.
앞으로도 그 때만큼 예술작품을 많이 보고 하나 하나 볼 때마다 온 마음을 다해 감상할 수 없을 듯하니,
그 때 듬뿍 흡수해놓길 잘했다.
중학생 시절, 열 시 넘어 학원이 끝나면 집에 들어가는 골목길 초입에 있던 동네 비디오가게부터
먼저 들려 신작 비디오 케이스가 위아래 뒤집혀 꽂혀 있는지 확인했다.
집에 들어가선 이것저것 하다가 MBC 라디오 프로그램 <FM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독서실을 다녔던 고등학생 땐, 밤 열두시까지 내 맘대로 보낼 수 있는 자유시간이 통으로 생겼다.
그래서 집에서 가기 편한 강남역과 신사역 사이의 씨티극장, 동아극장, 뤼미에르극장, 브로드웨이극장 등 영화관으로 갔다. 부모님이 자식 이러라고 독서실 비용을 대주신 건 아니었지만.
이십대에는 어느덧 서울아트시네마를 드나드는 시네필이 되어있었다.
지금은 정동길에 있는 서울아트시네마는 2005년부터 2015년까진 악기상점들이 모여있는
종로의 낙원상가 4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전에는 허리우드극장이라는 이름의 영화관이었는데
서울아트시네마로 완전히 탈바꿈하기 전에 상영관 두 개 중 하나는 허리우드극장,
나머지 하나는 서울아트시네마 영화관으로 운영했던 기억이 난다.
이 곳에서 나는 잊지 못할 추억 두 개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