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5-3
하나는 상영관 한가운데 서서 혼자 영화를 본 기억.
상영작은 <에반게리온>의 제작사 가이낙스의 최초의 작품 <왕립우주군>이라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이미 일본에서 망했기에 손님이 나밖에 없었을 수도.
극장이 어두워 진 후, 관객이 나 하나라는 걸 확인하고 이 때가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 싶어
좌석에서 일어나 상영관 정중앙에 섰다.
이야기는 지루했으나 8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답게 작화가 훌륭해서 그림을 보는 재미가 있었고,
나만을 위해 영화관 하나를 통째로 빌린 것처럼 근사한 기분이었기에 관람은 만족스러웠다.
다른 하나는 아픈 기억이다.
정말 말그대로 신체 일부를 다쳐서 아팠으니 아픈 기억이 맞지.
서울아트시네마의 내부는 항상 깔끔했고 오랜 세월 걸레질한 바닥은 맨질맨질 윤이 났다.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예산이 부족해서 2000년 대에도 좌변기가 설치돼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 칸의 가로폭이 다른 곳에 비해 좁아서 칸막이에 닿지 않기 위해서는
몸을 공벌레처럼 말아서 앉았다가 일어나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어느 날, 화장실 칸에 들어가서 앉았다가 일어나는데 머리쪽 벽에 달려있던 휴지케이스에 머리를 박았다. 머리통을 너무 깊게 숙였었는지, 고개를 들다 일어난 일이었다.
사실 그 전에도 몇 번 휴지케이스에 머리를 찧긴 했었기에 놀라진 않았지만 대신 너무너무 아팠다.
성인이 되고 이렇게 정신 나갈 정도로 아팠던 적이 있었던가.
진짜 괴로워서 차라리 정신줄을 놓는게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정신을 잃으면 적어도 아픔은 느끼지 않을 테니까.
다행이 아직 이성이 남아있어서 충격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문을 열려고 다친 부위를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렸는데 손바닥에 피가 묻어있어요?
이게 왜 여기에 묻어있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문을 열고 나가 세면대로 가서 거울을 봤다.
거울 속 내 얼굴에는 빨간 선 하나가 머릿속에서부터 턱까지 주욱 그어져 있었다.
아까 찍혔을 때 두피가 찢어져서 피가 나고 있었던 것이다.
좀 어이가 없었을 뿐, 머리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았다.
이제 괜찮아진 것 같은데 이왕 온 김에 하나 더 볼까 하다가 그래도 다친 부위가 나름 중요한 머리니까,
나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은 상태로 가는 중일지도 모르니까
간단히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건물을 나서서 근처 약국을 향해 걸어가는데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가니 나를 보는 건지,
내 쪽을 보고 있는 건지 모를 약사가 두루말이 휴지를 자기 몸 가까이로 가져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약국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까 그 약사님이 두루말이 휴지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곤 무언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우선 피부터 닦으세요”
아차차, 피가 멈춘 게 아니었구나. 영화관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에도 계속 피가 나고 있었구나.
벽에 붙어있는 거울을 봤더니 아까랑 똑같이 얼굴에 한 줄이 그어져 있었다.
피를 닦아내고, 약사님께 정수리를 들이밀며 얼마나 다쳤는지 보시고 약을 달라고 말씀드렸다.
약사님은 몇 초 들여다보시곤 별로 안다쳤다고 괜찮다고 하시면서
대신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니 마시라며 무언가 한 병 내밀었다.
라벨을 보니 마시는 청심환이었다.
나는 그 약사님의 상술, 아니아니 진단과 처방에 더 놀랐다.
선생님, 저는 원래 얼굴이 하얀데요.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지만 아무말 않고 쭉 들이켰다.
이미 다음 손님에게로 관심이 넘어간 약사님에게
그래도 연고같은 게 하나 필요하지 않을까요 물어서 마데카솔을 하나 사고,
마데카솔보다 훨씬 비싼 청심환약값까지 낸 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다친 곳을 사진찍어 봤더니 애개, 일 센티미터 조금 넘는 길이였다.
이렇게 조금 찢어졌는데 턱까지 흐를 정도로 피가 나다니.
영화에서 맥주병으로 사람머리를 내리치면 맞은 사람의 얼굴의 반이 금새 피로 뒤덮히는 게
과장이 아니었구나, 리얼리티를 제대로 반영한 거였구나 깨달았던 날이었다.
영화 얘긴 항상 재밌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