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집안에든 말썽쟁이가 있다 PART1
누구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열 살 때 고모가 어떤 아저씨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 이제 마음이 좀 편해지겠구나 안도했었다.
고모는 화가 많고, 저주를 잘 퍼부었으며, 성격이 불같아서 조금만 꾸물거려도 닦달하기에 능했기에
나는 고모와 같이 살았던 십 년 동안 고모를 무서워했다.
나는 고모가 과거에 한국에서 식구들에게 어떤 패악질을 부렸는지,
미국에서 왜 큰고모 가족과 등돌리게 됐는지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청취를 해왔다.
말하는 건 주로 고모에게 시집살이 당한 엄마였다.
엄마가 수제비 만들 때 꼭 꺼내는 이야기가 있었다.
“옛날에 니가 내 뱃 속에 있을 때 내가 수제비를 끓이면,
작은 고모가 애 얼굴 수제비처럼 넓적하게 낳으려고 또 수제비 먹는 거냐고 악담했단다.”
하아…
박여사님, 그런 불쾌한 일화는 더이상 복기하지 않는게 낫지 않을런지요.
그 때 엄마와 함께 듣고 있던 태아는 기억도 못했을 텐데 엄마때문에 알게 되었다고요…
저는 저주받은 당사자라고요. 그런 말을 전해들으면 딸이 기분이 나쁠까요, 좋을까요?
입밖으로 꺼내야 속시원하시겠다면 수제비 얼굴형의 저주를 받은 저 말고 다른 이와 뒷담화를 하심이…
묵묵히 수제비를 퍼먹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다행이 나는 고모의 저주를 튕겨내고 아빠쪽 유전자를 물려받아
달걀보다 더 갸름한 잣 모양의 얼굴형으로 태어났다.
만일 고모의 저주가 먹혀들었다면 수제비 얼굴형 저주는 나의 여동생에게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그래도 고모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날,
나는 이제 고모를 못본다는 슬픔에 김포공항 화장실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 미국 가려면 인천공항으로 가야하는 거 아니냐고요?
80년대에는 김포공항에서 모든 비행기가 뜨고 내렸답니다.
그로부터 삼십여년 뒤, 고모를 만나기로 한 식당으로 가는 길.
고모를 보면 기분이 어떨까.
조금 긴장한 상태로 주차장 입구로 들어서는데 한 구석에 서있는 어떤 여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이 고모다.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다니.
뇌야, 넌 어떻게 이렇게 빨리 답을 내놓는 거니.
그러나 난 차 창을 내려 고모! 부르는 대신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가서서 거기에 차를 세웠다.
어떤 모드로 재회의 순간을 맞이해야 할지 여전히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식당에 들어와 오늘 모임에 동석하기로 한 사돈의 팔촌 쯤 되는 아저씨 내외를 만나 고모를 기다렸다.
식당 입구가 보이는 방향에 앉아있던 나는 고모가 들어오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했다.
노랗게 염색해서 높이 말아올린 머리, 길게 꼬리를 뺀 아이라인,
숱이 풍성한 인조속눈썹, 빨간 립스틱, 여기에 치렁치렁한 귀고리까지.
어떤 칠십대 할머니와도 차별점이 확실한 저 스타일.
여전하군, 여전히 화려하게 하고 다니시는군. 덕분에 어색하진 않겠네. 반가웠다.
“날 닮긴 뭘 닮아. 지 엄마랑 닮았구만”
내 옆에 앉은 고모는 내 얼굴을 뜯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전하군, 여전히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씀하시는군. 덕분에 어색하진 않겠네.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지금, 오빠의 부고를 듣고도 오빠의 가족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자신을 미국으로 초청이민시켜준 언니와도 척진 채 살고 있는 작은 고모를 만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