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였다
Curiosity killed a cat.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였다’, 뭐든 지나치게 파고들면 좋을 게 없다라는 의미이다.
고모와의 재회는 한 번으로 그쳤어야 했는지도.
집으로 가는 내내 카톡이 날아들었다.
뒷좌석엔 선율이가 타고 있고 모든 차가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 위 인지라
전화통화를 하면서 운전하기엔 위험해서 나는 눈으로 읽기만 해야 했다.
고모 말로는 내가 큰고모집에서 머물고 있어 큰고모 눈치를 보느라 자신과 만나는 걸 피한다는 거다.
네에?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들어온 기습공격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미국에 도착한 당일, 꼭 고모 좀 만나보라고 하신 분이 큰고모이신데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했지만 고모는 받지 않았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십 분 늦춘 건 변명의 여지 없이 내 잘못이었다.
나의 지각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기에 나는 얼마든지 무릎꿇고 용서를 빌 준비가 돼있었다.
그런데 이걸 자신과 조카의 재회를 방해하려는 큰고모의 음모론으로 몰고 가시면 저는 어쩌란 말입니까.
답은 오지 않았다.
그 날은.
다음날 아침, 카톡- 카톡- 카톡- 소리에 잠에서 깼다.
고모였다.
채팅창에 들어갔더니 어떤 액정화면 속 숫자를 찍은 사진 두 개가 보였다.
아래에 사진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고모는 나 때문에 화가 나서 심장이 빨리 뛴다고 하셨다.
그래서 심박계로 심박수를 측정해서 사진찍어 나한테 보낸다고 하셨다.
흠, 이 정도로 본인이 화가 났다는 걸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게 일반적인 건가.
십여 년 간 거의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지 못했고,
만나더라도 감정적 교류 없이 사회적 관습과 예절로 대하면 충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이렇게 순도 백퍼센트의 감정표현이 낯설었다.
여기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까. 고민이 됐지만 일단 죄송하다고 한 번 더 말한 후,
고모를 한 번 더 보고싶다고 먼저 말한 것도 나였다고 답장을 보냈다.
고모를 오랫동안 봐왔던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원래 이렇다고,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그 다음날 아침, 모닝저주카톡이 왔다.
나보고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셨다.
저도 이렇게 살고싶진 않습니다만…
힘껏 삽질하느라 고생했던 나의 인생을 잠시 안타까워하다가,
아차차 고모말은 이 뜻이 아니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메시지를 보았더니
본인을 무시하지 말고 까불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타인을 무시하지 말고 까불지 말라는 문장 자체는 옳았으나,
나는 고모를 무시한 적이 없었으므로 옳지 않았다.
그 다음다음날 아침, 모닝저주카톡이 왔다.
너 아빠 젊었을 때 얘기듣고 싶다그랬지! …
뒤에 내용이 한참 이어져있었지만 나는 글자가 내 눈밖에 나도록 눈을 위로 떴다.
나는 문자를 읽고 싶지 않아도 문자가 내 시야에 들어오면 바로 인식을 한다.
사진앱에 탑재돼있는 이미지 글자 추출 기능처럼.
이 과정에서 불필요하거나 모르는 게 나을 정보를 알게 되는 불상사도 자주 겪었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슬쩍 봐서 글씨들 틈에 어둠의 냄새를 풍기는 단어가 껴있으면 시야에서 차단하는 것이다. 이런 어휘들은 문장 사이에서 홀로 볼드체인 듯 눈에 바로 들어오는 게 특징이다.
모르는 게 약입니다 정말.
그 다음다음다음날 아침, 모닝저주카톡이 왔다.
잘 안보이도록 일부러 눈을 흐리게 하고 봤는데
그 중에 ‘악마’라는 단어와 사촌동생들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결국 고모를 차단했다.
내가 악마라는 낱말을 일상에서 사용한 적이 있었던가. 고모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거지.
채팅방은 남겨두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뭐라고 썼는지 확인하고 싶어질지 모르니까.
채팅방 이름은 자동으로 ‘조용한 채팅방’으로 바뀌었다.
나처럼 상대방을 차단했지만 그 사람과의 대화는 남겨둔 이용자들이 많았나보다.
당신들은 어떤 사연이 있었던 건가요.
큰고모께 그간에 벌어졌던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다. 여전히 아쉬워하시는 큰고모에게
“Let it go, let her go.” 라고 말씀드렸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고모에게 전화를 했지만 통화는 하지 못했다.
이걸로 끝인가보다 싶었다.
…
…
아님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님.